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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4-04 21:20
[육군] k-9 비하인드 스토리
 글쓴이 : 넷우익증오
조회 : 7,388  

신형 155㎜ 자주포 `K-9'은 1990년대에 우리의 국방과학기술이 혼신을 다해 개발해낸 대표적 무기체계로서 세계에 자신있게 자랑할 수 있는 명품(名品)이다. 

K-9은 최대사거리가 40㎞에 달해 적지 종심(20~40㎞)에 대한 화력지원과 대화력 역습이 가능한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자동사격통제체계를 탑재해 사격명령을 접수한 지 30초 이내에 초탄을 발사할 수 있으며, 송탄 및 장전장치 역시 자동화돼 15초 이내에 최대 3발을, 3분 동안 연속 18발을 사격할 수 있다. 
이는 초기에 적을 무력화할 수 있는 요소가 되며 화력집중을 위한 분당 2발씩의 지속적인 사격이 가능하다. 

강력한 화력에 더해진 뛰어난 기동성 ·생존성도 돋보인다. 용이한 방향전환과 우수한 주행 가속성은 사격 후 즉각적인 진지이동, 즉 `사격 후 신속한 진지변환'(shoot&scoot)의 전술운용을 보장하며 국내에서 개발한 고강도강으로 장갑을 보호, 적의 화기와 포탄 파편으로부터 전투요원을 보호할 수 있다. 
이같은 K-9의 성능은 미군의 주력인 155㎜ 자주포 M109A6 `팔라딘'보다 사거리 ·발사속도 ·생존성 ·탄약 적재량 ·기동성 등 전 부분에서 우위를 보이며 영국의 AS90보다는 사거리 ·반응성 ·기동성 면에서 앞선다. 

독일의 PzH2000과는 탄약적재량(60발) ·발사속도(1분에 8발)에서 조금 못 미칠 뿐 사거리 ·반응성에서 대등하며, 기동성을 나타내는 유기압 현수장치 ·톤당 마력에서는 우월하다. 
특히 우리나라 방위산업 사상 최대 규모인 10억 달러에 달하는 물량을 오는 2011년까지 해외로 수출하는 쾌거를 올림으로써 그 성능을 확실히 인정받았다. 한마디로 K-9은 모든 성능면에서 세계 정상 수준의 자주포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자랑스러운 위용을 지닌 K-9이 개발 초기부터 `세계 최고'를 향한 기대와 지지를 폭넓게 얻은 것은 아니었다. 90년 봄, 소요군(육군)이 국방과학연구소에 제시한 작전요구성능(ROC)은 일반적으로 평가하는 우리 국방과학기술과 방위산업 역량 수준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이는 당시로 볼 때, 미국이 개발 중이던 M109A6보다 요구수준이 높았을 뿐 아니라 독일이 개발 중이던 PzH2000 자주포, 그리고 미국이 차세대 자주포개발을 위해 장기과제로 추진하던 AFAS(Advanced Field Artillery System), 즉 크루세이더 자주포(현재 개발중지)에 맞먹는 성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국도 아직 개발하지 못한 장비를 우리가 먼저 개발할 수 있을까” 같은 우려 아닌 우려, 또는 의혹의 눈빛이 한동안 연구진 주위를 맴돌았다. 
21세기 전장환경을 내다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주포 사거리가 40㎞ 그거 괜히 사거리만 늘리는 거 아냐?” “전차도 아니고, 자주포가 그렇게 `호화'로울 필요가 있나” 등 성능 자체의 필요성에 대한 의구심도 그치질 않았다. 

그러나 세계적 수준의 첨단 자주포를 보유하고자 하는 소요군의 의지는 강력했고, 번개사업 이후 쌓아온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충분히 개발할 수 있다는 국과연의 신념은 굳건했다. 
사업승인이 난 후에도 K-9 개발을 사시(斜視)로 바라보는 눈길은 여전했지만 연구진은 유기적인 산·학·연 협조체제를 바탕으로 군이 필요로 하는 무기체계를 적시에 공급할 수 있도록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98년 10월 연구진은 마침내 합참으로부터 K-9의 `전투사용가(可)' 판정을 받아 99년 말 서해 연평도에 최초 전력화한 데 이어 2000년 7월에는 터키에 양산요 부품을 공급하는 수출계약을 체결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것은 10여 년의 힘겨운 대장정이었다. 이제 국과연과 관련 방산업체 연구원 ·엔지니어가 걸었던 그 노정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터키 앙카라까지) 

`번개사업'서 독자개발 자신감 

“거스 히딩크의 성공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대표팀의 역대 감독들이 한 역할이 히딩크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우리 팀이 보여준 놀라운 체력도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강한 국력을 만들어 낸 기성세대의 피와 눈물과 땀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체력과 선전이 가능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역임한 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과학기술부장관을 지낸 서정욱(徐廷旭) 박사가 지난 6월22일 무역협회가 주최한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프로젝트' 토론회에 참석, 당시 화두로 꼽히던 히딩크의 성공 사례와 관련해 일침(一針)을 가하듯 한 말이다. 

서박사는 어떤 한 개인의 핵심적·주도적 역할을 높이 평가하기에 앞서 현재의 훌륭한 결실이 가능하게끔 과거로부터 쌓고 다져 온 역량과 기반을 강조하고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는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인 없는 결과 또한 없는 것이고 보면 오늘 우리가 `업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근원을 뒤돌아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K-9 자주포 역시 마찬가지. K-9은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우리의 국방과학기술이 10여 년에 걸쳐 빚어낸 주요 업적 중 하나이다. 그러나 K-9사업에 참여한 현재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인력과 그들만의 과학기술로 개발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비록 국과연 주도의 개발사업이었다 할지라도 100여 개의 시제(試製)·협력업체, 그리고 대학 등의 연구소 인력이 K-9 개발을 위해 힘을 모았다. 또한 1970년대 박격포 등을 모방 개발한 시기까지 더한다면 K-9이 탄생하기까지에는 10년이 아닌 30여 년의 세월과 노력이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할 것이다. 

돌이켜볼 때 우리나라 무기체계 역사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것으로 `화포'를 빼놓을 수 없다. 고려 말 최무선이 흑색화약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고 1377년에는 국가 공인 화약 ·화기 제조기구로 화통도감을 설치, 화포시대를 열었다. 특히 1555년에는 구경 130㎜, 무게 300㎏의 천자총통을 제조하는 등 오랜 화포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에 와서는 70년대까지 우리 손으로 제대로 만들어 낸 총포류는 하나도 없었다. 창군 이후 우리 군은 105㎜ M3 곡사포를 시작으로 70년대 중반까지 155㎜ 곡사포 ·평사포, 8인치 자주 ·견인곡사포, 175㎜ 무포탑형 자주곡사포 등으로 무장해 전투종심을 증가시킬 수 있는 포병화력을 구비했으나 대부분 미국의 군원 또는 베트남전 참전 대가로 인수한 것들이었다. 

국산 화포가 등장한 것은 국과연 창설 이후. 71년부터 추진된 `번개사업'에 의해 개발한 60㎜ 박격포(M19), 81㎜ 박격포(M29)가 시초를 이루며 4.2인치 박격포 ·105㎜ 견인곡사포가 그 뒤를 잇는다. 물론 견본 장비를 획득한 후 이를 역설계하거나 장비의 기술자료(TDP)를 미국으로부터 도입, 한국화해 방산업체가 생산하는 전형적인 모방 개발 방식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과연은 이때 미국 무기체계의 도면을 소화해 설계 ·제작할 수 있는 연구인력 ·기술력 ·개발 경험, 그리고 `독자적으로 무기체계를 개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쌓을 수 있었다. 

70년대 말 우리 군은 북한에 비해 현저히 열세에 놓여 있던 포병능력을 보강하고자 사거리 20~30㎞ 급의 화포를 갈망하고 있었다. 
국과연은 여기에 발맞춰 155㎜ KM114A2 견인곡사포를 국내 모방 개발하는 한편 설계에서 양산까지 독자적인 105 ·155㎜ 곡사포 개발에 돌입한다. 이것이 KH178 ·KH179 개발사업으로 국산 화포 개발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화포 개발" 독립선언 

KH179 155㎜ 곡사포가 처음부터 국내 독자 기술에 의해 개발키로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중반 사거리 20~30㎞ 의 화포를 보유하기 위해 독일의 155㎜ 곡사포 도면을 도입, 업그레이드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던 중 육군은 78년 3월 미국 M114A1 155㎜ 곡사포의 성능 개선사업을 소요 제기해왔다. 

이는 그해 12월 한·미 공동 개발을 전제로 한 개발 과제로 확정됐지만 79년 6월 미국의 제안을 접수, 검토한 국내 기술진은 이 공동 개발안을 거부했다. 75년 국방과학연구소에 입소, 98년 8월까지 화포 개발의 외길을 걸으며 `한국 화포 개발의 대부"로 불린 (주)풍산의 문상규(文相奎·63)고문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240만 달러라는 기술료가 지나치게 많았고 개발에 따른 전반적인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됐어요. 무엇보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시제 제작과 시험평가를 미국 내에서 해야 한다는 요구였습니다. 지적소유권에 대한 분쟁의 우려도 있었고요.” 

사업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었다. 개발기간 연장과 함께 국내 독자 개발로 그 수행 방법이 변경됐다. 이것이 155㎜ KH179가 태어나게 된 배경이다. 독자 개발로 변경되자 기술진에도 어려움이 닥쳤다. 사실을 말하자면, 국내 기술 수준은 이제 막 화포의 설계 개념을 이해한 정도였다. 한번도 독자적으로 화포를 설계·제작해 본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부담이었다. 특히 사격시 발생하는 각종 압력과 가속도 등 설계 변수를 어떻게 결정하고, 제작 후에는 어떤 시험평가 방법을 통해 성능·신뢰성을 입증하느냐가 문제였다. 

“국산화한 M101A1의 일부 문제점을 보완, 개발(모범생산이라고 한다)할 때 미국에서 기술지원한 자료 가운데 155㎜ 곡사포 M198의 포신 도면이 있었는데 이를 참고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문상규 기술고문) 

연구기술진은 포미환·폐쇄기·주퇴복좌기 등의 설계 개념을 정립하면서 개발에 박차를 가해 나갔다.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시험평가에 관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에서 화포 개발시 적용하는 장비시험절차서를 철저히 분석했다. 또 학계를 포함한 국내 관련 기술진의 두뇌를 모두 끌어모았다. 시제를 제작한 후에는 악조건 상태에서의 안정성 확인과 신뢰성 보장을 위해 실사격 외에 시뮬레이터를 통한 반복시험·파괴시험을 수없이 실시했다. 

문고문은 악조건 상태 중 하나인 저온에서의 시험평가 사례 한 가지를 들려주었다. “당시 안흥 종합시험장에는 극저온 시험시설이 있었지만 4.2인치 박격포 사격에도 설비가 깨져나갈 정도여서 155㎜ 화포시험에는 부적절했어요. 추운 겨울(82년 1월) 할 수 없이 다락대로 달려가 갖은 방법을 동원해 봤습니다.” 

먼저 화포를 방렬한 상태에서 베니어판·절연제로 집을 지었다. 실내에 드라이 아이스·알코올을 잔뜩 넣고 10개의 선풍기로 공기를 순환시키며 실내온도를 영하 44도로 끌어내리면서 화포를 냉각시켰다. 이렇게 20시간이 지난 뒤 포구와 포미 쪽 벽만 허물고 최대 장약의 115% 압력으로 5발을 사격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지만 이때 드라이 아이스·알코올은 2.5t 트럭으로 각각 3대, 1대분이 사용되었다. 
이렇듯 갖은 노력으로 개발한 155㎜ 곡사포에는 KH179라는 명칭이 부여됐다. KH는 한국형(Korea) 곡사포(Howitzer), 1은 최초 또는 시작이라는 뜻이며 79는 1979년 미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독자적 개발에 착수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화포 개발의 독립선언이라고 할 것이다. 

문고문은 “KH179의 개발을 통해 쌓은 기술력, 연구개발진이 보여준 용기·의지가 우리의 화포 개발 능력을 오늘날 세계적 수준으로 나아가게 하는 확실한 기반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KH179는 1983년 전력화한 이후 예상치 못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포병의 신뢰를 일시에 얻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K-9 자주포 개발사업이 초기에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포신 `악조건 시험' 이상무 

KH179는 사거리 30㎞로서 미국이 1977년 개발을 완료한 후 78년 주한미군에 배치한 M198, 그리고 영국·독일·이탈리아의 FH70, 스웨덴의 FH77 등 사거리 30㎞의 155㎜ 곡사포와 동등한 수준이다. 전력화 시기는 이들 선진국보다 다소 늦지만 견인포와 관련한 기술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84년 봄, 한마디로 잘 나가던 KH179에 성능시비가 일어났다. 발사시험 중 포구 쪽의 제퇴기가 세번 연속으로 부분 파손된 것이었다. 이 일은 “KH179의 포신이 깨졌다”로 확대돼 삽시간에 번져나갔고, 급기야 당시 윤성민 국방부장관에게도 보고됐다. 여기에 KH179에 대한 미국측의 견제까지 곁들여졌다. 미8군 지휘부 측에도 KH179의 성능을 의심할 만한 증거가 있다고 거든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KH179가 헬기에 의한 공중수송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자신들의 주력화포인 M198의 기술을 도용해 제작했다며 우리 군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포신 파손'으로 번진 문제는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단지 포탄과 포신 사이에 인터페이스 상의 문제로서 기술적으로 간단히 해결되는 사항이었지만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심각성을 더해갔다. 마침내 상급기관으로부터 KH179의 안정성과 운용성 등을 증명하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방법은 악조건 시험과 공중수송 테스트를 다시 수행하는 것이었다. 

먼저 포신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시험이 실시됐다. 투 스타가 지휘하는 검열반이 구성되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KH179 6문으로 포탄을 무려 230발 이상이나 쏘는 가혹시험이 진행됐다. 그러나 KH179는 아무런 이상을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개발단계에서 포신의 수명을 평가하기 위해 이보다 더 가혹한 평가를 실시했던 것이다. 즉, 100여 발을 사격한 후 포강 내부에 히트크랙이 발생한 포신 자체를 시편으로 만들고, 여기에 실사격과 같은 압력을 주는 시험을 파괴시까지 반복했던 것인데 이는 2만 발의 실사격과 버금가는 것이었다. 

공중수송 검증을 위한 훈련도 서부전선에서 실시됐다. CH-47 시누크기 12대가 병력 및 탄약을 실은 가운데 KH179를 6문씩 매달아 작전지역으로 수송했다. 미군의 M198도 1문 포함됐다. 그런데 수송 후 KH179는 사격이 가능한 상태로 안정되게 착지, 사격이 이뤄진 반면 M198는 그렇지 못했다. 헬기와 화포를 연결한 슬링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격조차 할 수 없었다. 내심 화포성능의 차이를 보여주겠다는 의도를 지녔던 미국측이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들은 훈련 후 비로소 “한국군은 매우 우수한 화포를 가지고 있다. 축하한다”는 말을 남겼고 성능과 기술도용의 문제도 일시에 해소됐다. 이후 KH179를 견제하는 미국측의 시비는 일지 않았다. 동시에 KH179와 국방과학연구소의 연구개발 능력에 대한 포병의 신뢰는 높아만 갔다. 

한편 육군은 KH179를 전력화하면서 화력증강을 위한 일환으로 자주포 획득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70년대 초부터 우리 포병은 175㎜ 자주평사포와 8인치 자주곡사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것들은 운용개념적으로 볼 때 견인곡사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육군은 많은 탄약을 탑재하고 포병들이 탑승한 상태에서도 사격이 가능하며 또 생존성 높은 현대식 자주포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83년 12월 미국이 79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155㎜ 자주포 M109A2를 한국에서 미국과 공동으로 생산키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포신과 포탑구조물은 미제를 수입하고 차체·사격통제장치·유압장치는 국내에서 생산하면서 체계조립하는 형태였다. 

이 자주포는 한국에서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K'자를 붙여 `KM109A2'로 명명됐다. 현재 야전에서 K-55로 통칭되는 자주포가 바로 이것으로, 삼성항공(현 삼성테크윈) 측에서 체계조립, 생산 시 익명으로 부르던 K-55가 야전에 그대로 전파돼 현재도 이 익명이 주로 쓰이고 있다. 어떻든 KM109A2의 국내생산은 훗날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자주포를 생산할 수 있는 산업적 기반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新자주포 개발의지 불태워 

국방과학연구소 화포체계실 연구진은 1982년 말 KH179 155㎜ 곡사포의 개발성공 후에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의지로 83년부터 세계 화포발전추세에 발맞추는 기초연구에 착수하고 있었다. 

문상규 화포체계실장(현 〈주〉풍산 고문)을 비롯한 홍석균 박사(현 국과연 1체계 1부장)와 안충호 책임연구원 등의 연구진이 참여한 `화포최적설계조건의 연구'라는 이름의 이 연구는 화포분야의 핵심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겠다는 주목할 만한 연구활동으로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K-9자주포 개발의 씨앗'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진은 이때 외국의 수많은 최신 연구논문과 보고서 등을 수집해 종합·분석하면서 미래 전장환경에 따른 화포의 발전추세를 전망했다. 즉 30~40㎞ 에 이르는 사거리 연장과 함께 작전개시 초기 급속사격(Burst Fire) 능력을 갖는 화포로서 10~15초에 3발의 화력을 집중할 수 있고, 또한 신속히 진지변환하는 `Shoot & Scoot'개념을 구현시킬 수 있는 자주포가 요구된다고 내다봤던 것이다. 

특히 홍석균 박사는 84년부터 15초 이내에 3발을 투발할 수 있도록 하는 탄과 장약의 자동장전 실험모델을 개발해 발사속도 증대 방안을 연구했으며, 안충호 책임연구원은 화포자동방열의 기본이 되는 수포(수평기의 물방울 Level Vial)를 전기적 센서로 대체하는 실험모델을 개발하는 등 화포 자동화체계 방안을 연구했다. 
“이 당시 연구를 통해 나온 연구 실험모델들은 애초 지금의 K-9자주포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던 만큼 기구와 형상 면에서 많이 다르긴 합니다만 훗날 K-9개발의 개념과 방향, 목표만은 그대로 적중됐어요. 새로운 화포개발을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홍석균 박사) 

한편 80년대 후반 들어 선진국들은 국과연 연구진이 전망했던 바와 거의 일치하는 개념을 지닌 자주포를 앞다퉈 개발하고자 했다. 
영국은 독일·이탈리아와 공동으로 추진했던 SP70자주포가 실패하자 AS90자주포(사진 위)를, 독일은 PzH2000자주포(사진 아래) 개발을 각각 추진 중이었고, 미국 역시 자주포 성능향상계획(Howitzer Improvement Program)을 수립해 M109A2 자주포를 현재의 사거리 30㎞ 급 M109A6팔라딘으로 개량하는 사업과 더불어 45㎞ 급의 새롭고 획기적인 크루세이더 자주포 개발사업을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국과연 연구진도 그동안의 연구성과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87년 육군에 KM109A2(일명 K-55) 자주포의 성능을 향상시키자는 방안을 제안했다. 한국적 여건에 적합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미국의 자주포 성능향상계획을 모델로 삼아 마련한 이 향상 방안은 30㎞ 용 포신과 45㎞ 용 포신을 동시에 개발해 사단용과 군단용으로 각각 운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안은 88년 말 육군본부의 전투발전심의회의에서 사실상 `불채택'이나 다름없는 `유보' 판정을 받았다. KM 109A2가 85년부터 생산돼 야전에서 운용되고 있는 시점에서 성능향상 사업은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결과는 다소 실망스러운 것이었지만 낙담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연구진으로 하여금 한걸음 더 나아가는 새로운 방향의 목표를 갖게 했다. 새로운 개념의 신형 155㎜ 자주포를 개발하겠다는 의지를 갖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의 결과로 볼 때 유보 결정은 잘된 일이었습니다. 연구진은 `그렇다면 신·자·포(신형 155㎜ 자주포)로 가겠다'며 개발의지를 불태웠으니까요.”(안충호 책임연구원) 

`신자포' 155㎜ 52구경장 포신 채택 

국방과학연구소 화포체계실은 1989년 1월부터 자주포체계팀(팀장 안충호 책임연구원)과 자주포무장팀(팀장 홍석균 박사)을 편성하고 새로운 자주포, 즉 신형 155㎜ 자주곡사포(신자포) - 이 명칭은 98년까지 연구개발사업 이름으로 계속 사용됐다 - 에 대한 개념 형성 연구에 돌입했다. 

K-9 자주포를 개발하기 위한 개념 연구가 시작된 것으로 자주포체계팀이 이때 세계적인 발전 추세와 러시아·중국·일본·북한 등 주변국의 자주포 및 한국 포병의 현황을 분석해 설정한 신형 자주포의 개발 방향은 155㎜에 52구경장의 포신 채택, 사거리 40㎞·최대 발사속도 분당 6발 달성, 관성항법장치 적용, 사격통제의 자동화를 통한 30초 내 초탄 발사, t당 20마력 이상의 기동성·생존성 향상, 국내 독자개발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같은 40㎞급의 신형 자주포가 필요한 이유는 여러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북한과 비교해 보면 화포의 경우 북한은 아군에 비해 수적으로 5000문이나 더 많고 그중 50%가 자주화 및 차량탑재용이어서 기동화가 용이했다. 아군으로서는 양적인 열세를 질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시급했다. 

전술적 운용면에서 볼 때 육군은 88년 기본(Air-Land)전투개념을 우리 전장환경과 장차전의 양상 등 관련 영향요소를 고려, 공세적 전(全)전장 동시전투개념으로 정립했다. 특히 적지종심(20~40㎞)작전은 적 군단 제2 제대급의 증원 역량을 무력화해 근접작전의 확실한 승리를 보장하는 데 주안을 두었다. 

포병은 이를 구현하기 위해 대(對)화력전투에서 적 종심지역을 타격하거나 적 2제대의 증원을 차단할 수 있는 사거리, 화생방전에서도 지속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생존성, 기동군단의 공세작전을 지원할 수 있는 기동력을 갖춘 무기체계를 필요로 했다. 

실제로 팀스피리트 한·미 연합훈련 등을 통해 야전포병 지휘관들은 포병의 6대 목표인 포탄을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보다 멀리 많게 쏘아 보낼 수 있고, 보다 생존성 높게 빠르게 기동함으로써 사격 후 신속한 진지변환(Shoot & Scoot)이 가능한 자주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면 155㎜/52구경장의 포신을 채택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는 국제간 탄약 호환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미국·영국, 그리고 독일·이탈리아는 87년 9월 탄도협정을 체결하면서 사거리 40㎞급의 자주포를 개발함에 있어 향후 10년간 155㎜/52구경장을 적용키로 결정했다. 따라서 신자포는 개발 초기부터 세계 정상 수준을 목표로 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 탄도협정을 적용함으로써 해외수출이 가능토록 고려했음을 알 수 있다. 

해외수출은 국내 독자개발이 전제된다. 선진 각국은 한국이 KH179 곡사포를 독자개발에 성공하고 수출까지 하게 되자 경쟁대상으로 인식, 자국의 방위산업 육성과 보호 차원에서 기술 이전을 제한하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 우리나라는 KM109A2(일명 K-55)를 한·미간 공동생산 중이었기 때문에 신자포 개발 이후 기술 도용 등의 지적소유권 주장에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연구진은 KM109A2보다 월등히 우수한, 완전히 새로운 자주포를 국내 독자개발함으로써 국내 획득과 수출시에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도록 해야 했던 것이다. 

89년 초봄 연구진은 신자포의 개발계획안을 가지고 육군교육사령부에 소요를 제기해 줄 것을 제안했다. 당시 교육사의 포병무기체계 소요제기 담당관은 박영철 연구관(70·예비역 중령)이었다. 그는 계획안을 유심히 읽더니 “바로 이겁니다”하면서 무릎을 탁 쳤다. 국과연의 연구개발 능력에도 상당히 신뢰를 보인 그는 “내 근무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포병 발전의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추진해 봅시다”라고 말했다. 

신자포에 대한 육군교육사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교육사는 40㎞를 야포로 투발할 수 있다면 “이는 군단화력으로서는 가장 경제적·효과적인 투발 수단이 될 것”이라며 심의를 거쳐 소요제안서를 육군본부에 제출했다. `신자포' 무기체계 소요안 결정 
무기체계 연구개발을 본격화 하기 위해서는 육군본부 ·합참 ·국방부를 거치면서 무기체계의 필요성과 성능, 소요량과 개발 시기 등을 종합적이고 세밀하게 검토하는 절차에 따라 소요가 제기돼 연구개발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연구개발에 있어 결코 녹록지 않은 과정으로서 육군이 신자포의 소요를 정식으로 제기하기까지는 많은 포병 관계자의 노력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 인물이 육군포병학교장을 역임한 안경선(安炅善 ·육사24기)예비역 소장과 현재 육군1야전군사령부 화력부장인 강대만(姜大滿 ·육사30기)준장이다. 당시 각각 대령과 중령이었다. 
1989년 봄, 강대만 중령은 육군본부 무기체계과의 실무장교로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그는 포병대대장을 지내면서 느낀 기존 화포의 사거리와 기동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던 차에 육군교육사로부터 신자포 소요 제안을 받았다. 
“신자포가 우리 실정으로 볼 때 획기적이면서 또한 포병에 꼭 필요한 무기체계라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특히 40㎞의 사거리와 분당 6발의 발사속도 등은 2000년대 우리 전장환경에 부응하는 성능으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강대만 준장) 

강중령은 신자포의 작전요구성능(ROC)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화포와 포탄을 함께 개발할 것을 강조하는 등 연구개발을 위한 소요 제기가 되도록 행정절차를 적극 지원했다. 
그러나 당시 육군본부 무기체계과에서 다룬 획득관련 무기체계사업은 20종이 넘었고 육본 입장에서 보면 신자포는 그중 하나였을 뿐이다. 신자포가 획기적이라는 것은 개발 위험성도 그만큼 높다는 것으로 “세계적 수준의 자주포를 국방과학연구소가 과연 개발할 수 있겠느냐”는 등 부정적인 견해가 만만치 않게 대두되었다. 

강중령은 “국과연에서는 군이 소요 제기만 해주면 개발할 수 있다”는 평범한 말로는 소요 제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신자포가 필요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무장하고 동료와 상급자, 그리고 심의 담당관들을 찾아가 맨투맨으로 설득해 나갔다. 
그의 설득 노력은 집요하다 싶은 면도 없지 않아 담당관들은 강중령과 마주치는 일 자체를 피할 정도였고 대화를 나눈다 해도 “신자포는 빼고 말하자”고 선수를 치곤 했다. 강중령은 이에 지지 않고 “육군 군단화력의 취약점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방안”임을 거듭 강조하곤 했다 
89년 11월 초순, 마침내 신자포는 육본 소요 제기 실무과장 토의회의에 정식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그러나 이날 회의에서는 신자포 안건이 나오자마자 국내 개발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회의를 주재하던 모 장군이 “KH179도 실패했는데 그보다 훨씬 어려운 신자포를 개발할 수 있는가”라고 강한 톤으로 반문한 것이다. 

강중령의 노력에 힘입어 신자포에 대해 긍정적일 것이라고 예상됐던 회의장은 일순 긴장의 침묵이 흘렀다. 장군의 일언(一言)은 어떻게 보면 신자포에 대해 완전히 부정적인 견해를 내보인 것이었고, 어떻게 보면 과연 포병이 국과연과 함께 신자포를 끝까지 개발할 수 있겠느냐는 의지를 확인코자 하는 뜻도 담고 있는 듯했다. 여기서 명답이 나오지 않는 한 신자포는 포기해야 했다. 

“KH179 사업은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침묵을 깬 것은 당시 육본 포병과장 안경선 대령이었다. 그는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KH179는 한반도 전쟁 억제력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장비입니다. 다만 후속적으로 조치해야 할 몇 가지 미흡한 사항이 있어 조치 중에 있습니다. 이 사항은 별도 보고드리겠습니다. 신자포는 육군이 군단화력으로 꼭 확보해야 할 무기체계입니다.” 

장군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육본에서 포병을 대표하는 포병과장이 이런 의지를 가지고 필요하다고 하니 검토해 봅시다”라며 토의에 올렸고 이견 없이 소요 제기안으로 통과되었다. 회의 후 안대령의 겁(?)없는 반론에 과장들은 미소를 담아 이렇게 농담조의 말을 건넸다. “소신도 좋지만 진급심사를 앞둔 대령이 그렇게 대들듯 말해도 되나?” 
한편 신자포 사업은 이후 전투발전심의회를 거쳐 90년 5월 육군정책심의회에서 육군 무기체계 소요안으로 결정되었다. 

국산화율 70%로 설정 

신형 155㎜ 자주곡사포의 전력화 시기는 최초 2000년으로 잡혀 있었다. 그러나 1989년 개념연구단계부터 시작, 전력화하기까지 12년이라는 개발기간이 다소 길다는 지적에 따라 89년 10월에 탐색개발 및 실용개발 기간을 각각 1년씩 단축, 98년 말로 조정했다. 

이를 연구개발 단계별로 보면, 89년부터 91년까지가 개념연구단계로서 체계개발 개념을 정립하고 체계개념을 설계하는 시기다. 이어 92년 1년간 탐색개발에 들어가 주요 구성품의 체계적합성과 최대 사거리(40㎞) 도달 가능성 등의 작전요구능력(ROC)에 대한 개발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시제(試製)를 제작해 시험평가를 갖는 선행개발은 93년 10월부터 96년 9월까지 3년에 걸쳐 수행되는데 군 ROC의 도달 여부를 확인하고 이를 수정, 보완하게 된다. 96년 10월부터 98년 말까지 2년간은 실용개발단계. 선행개발단계에서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등 ROC에 부합하는 실용시제를 제작, 야전운용 적합성을 시험평가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이 기간 중에는 또 종합군수지원(ILS)요소를 개발하고 국방규격화 작업을 마무리, 최종적으로 양산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계획됐다. 

이 계획과 일정은 92년 하반기에 탐색개발기간이 계획보다 9개월 늘어나는 등 약간의 조정을 거치긴 했지만 전력화 예정시기만큼은 변동이 없었고, 연구진은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전력화 약속을 지켜내는 저력을 보였다. 
한편 연구진은 90년에 연구개발분야를 체계종합 ·무장 포탑·위치확인 등 4개 분야로 확대한 데 이어 육본 정책심의회에서 소요제기안이 결정된 후 사격통제·탄도·탄약·차량분야를 새로 추가하는 등 전 분야에 걸쳐 개발팀을 구성, 연구에 박차를 가해 나갔다. 그런데 이즈음 국방과학연구소 화포체계실이 신자포를 개발하기 위해 확보하고 있던 기술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안충호 책임연구원이 이끄는 체계팀이 90년 말을 기준으로 개발에 필요한 기술을 7개 분야로 나눠 분석한 결과 그 수치는 사실 낙관적이지 못한 것이었다. 

신자포 개발과 제작에 필요한 기술은 모두 235종. 적용 가능한 기술 수준을 100으로 보았을 때 이에 도달한 기술은 이 가운데 107종으로 전체 45.5%에 불과했다. 앞으로 연구를 통해 확보해야 할 기술이 더 많은 상황. 체계팀은 향후 3년 이내에 확보 가능한 기술은 95종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항법 자이로시스템 등 33종의 기술은 5년 이상 연구해도 확보가 거의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체계팀은 분석결과에 난감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체계개발에 적용될 모든 기술을 100% 국내개발할 수는 없는 문제고, 사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석된 기술수준은 의외로 낮았어요. 육군이 요구하는 전력화 시기를 늦추고 미확보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기간을 연장할 것인가. 위험을 감수하고 개발을 강행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논의를 가졌습니다.”(안충호 체계팀장) 

하지만 도전의식과 긍정적 사고가 없으면 과학자가 될 수 없는 것인지, 체계팀 소속 4명의 연구원들은 곧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축구를 좋아하는 임종광(현 사통개발연구실)박사는 “골키퍼 있다고 공이 안들어 갑니까? 장애물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니 계획대로 추진합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밤낮으로 문제풀기를 즐겨 올빼미로 불린 성락훈(현 대천대 교수)박사는 “문제는 풀라고 있는 것이고 문제를 문제로 알고 있으면 문제는 풀린다”며 임박사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주(현 한양대 교수)박사도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쉬운 것”이라며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신념으로 추진하자고 말했다. 

연구진은 신자포의 핵심이 되는 분야에 해당하는 체계 ·무장 ·탄약 ·사통 ·포탑 구동장치 ·탄장전 이송장치 및 구조물을 국내개발을 추진하되 개발기간과 경제성을 고려, 항법장치 ·엔진 ·변속기 ·레이스링은 해외에서 도입 후 국산화율을 높이고 유기압 현수장치는 기술도입 생산키로 계획을 수립했다. 또한 개발기간 중 국산화율 목표는 가격기준 70%로 설정했다. 

핵심 무장개발 처음부터 난관 

신형 155㎜ 자주포의 개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거리 40㎞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탄을 발사(투발수단)시키는 무장을 비롯, 탄에 추진력을 제공하는 추진제, 탄의 비행안정성 및 탄 뒷면의 항력을 감소시키기 위한 항력감소 관련 탄두, 탄의 비행을 확인하는 탄도 등 다양한 연구분야가 복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무장이란 포열·포미장치·제연기·제퇴기로 구성된 포열과 주퇴복좌기로 대별되는데, 사거리 관련 연구는 이 발사기구인 무장이 개발돼 있어야 진행이 가능하므로 무장분야(팀장 홍석균 박사)부터 먼저 연구에 착수했다. 

그런데 당시 연구 형편은 연구진의 개발 의지를 뒷받침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설계 자료를 비롯한 정보와 장비·예산, 그리고 개발기간까지 모든 것이 충분치 못했다. 
연구진이 실제 그 당시 획득할 수 있는 설계 자료는 탄도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한 미국·영국·독일·이탈리아 등 4개국 탄도 협정에 의한 규정뿐이었다. 즉 `3556㎤ 의 약실체적에 나토 표준탄(L15A1)으로 초속 945m의 포구(砲口)속도를 내는 52구경장의 포신을 채택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신자포를 반대하는 측에서 황당하게 봤던 것도 사실입니다. 3556㎤ 라는 약실 체적만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연구자인 저 자신도 이 체적을 어떤 직경에, 기울기는 어떻게 해야 최적설계가 되는가. 아니, 최소한 안전 설계라도 되는가 하고 막연해 했으니까요.”(차기업 선임연구원) 

무장 설계는 다른 부품과 달리 설계에 착오가 있을 경우 불의의 사고가 인명 손실로 직결되는 분야. 당시엔 초속 945m의 포구속도를 낼 수 있는 추진장약이 개발되지 않은 상태여서 어려움은 더욱 컸다. 몇 번이나 반복 계산하고 또 계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같으면 컴퓨터의 성능도 뛰어나고 CAD 프로그램이나 분석 프로그램이 있어 간편하게 설계를 검토할 수 있겠지만 1989년의 연구 형편은 그렇지 못했다. IBM-XT라는 PC가 연구원 8명에게 한 대꼴로 처음 보급돼 보물 다루듯 했던 시절이었다. 

연구진은 39구경장 KH179에 쓰는 장약 중 가장 큰 M203A1 8호 장약(26lb)의 추진제(M30A1)를 사용, 포강 내 탄도해석을 수행했다. 그 결과 M30A1 추진제를 33lb 사용할 경우 초속 950m 정도의 포구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사격시 33lb의 이 추진제가 발생시키는 강내압력이 설계의 기준이 된다. 
그런데 이 결과는 연구진에 기대보다 실망을 안겨주었다. 강내압력이 예상치를 훨씬 웃돌았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최초 체계개념 형성 연구를 할 때 포신만을 설계대상으로 고려했으나 이제는 이 강내압력 기준에 따라 포미장치, 주퇴복좌기 및 장전장치 등 무장 전체도 새로 설계해야 하는 상황이 돼 버렸다. 어렵게 포신 설계도면을 완성할 즈음 문제점에 또 직면하게 됐다. 제작과 관련, 한정된 예산 ·시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이었다. 

신자포의 포신 길이는 KH179에 비해 2m 가량 더 길다. 따라서 소재의 단조처리 시설, 열처리로 및 자긴 가공기 등 제작업체의 시설 보강이 선행돼야 했다. 포신용 소재를 생산하는 업체는 한 번에 3개의 포신을 제작할 수 있는 양의 소재를 만들어 내는데, 연구진에 할당된 예산은 한 개의 포신 재료비만 인정되었다. 더욱이 업체 시설 보강을 위해서는 약 15억 원이 필요했다. 
포신 가공 또한 `말하기 어려운"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업체가 제작 가능한 포신 최대치는 KH179용 6m 포신. 따라서 기존 시설로 8m짜리 포신 가공이 가능한가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가공해 보면 될 것 아닌가.” 이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8m 포신 가공이 불가능하다면 설비를 서둘러야 했다. 연구진은 가공설비를 국내 업체에 공급한 해외 업체를 방문, 자문을 구했다. 해결책은 뜻밖에도 쉽게 구해졌다. 설계 엔지니어의 설명은 “약간만 보완하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연구진의 마음과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곳곳에서 아직 몸을 감춘 채 도사리고 있는 복병이 무수히 많을 것임을 실감하면서 각오를 더욱 다져야 했다. 


용어해설 

◆ 포열=탄두를 목표지점까지 비행토록 발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후미에는 탄약이 삽입되는 약실을 가지고 있다. 
◆ 포미장치=격발·사격 때 발생하는 사격력의 지지 및 뇌관 탄피 추출 등의 기능을 한다. 
◆ 제퇴기=탄이 포구를 이탈하면서 함께 방출되는 고압 사격가스 일부를 후방으로 방출시켜 사격에 따른 포신의 주퇴 운동량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 제연기=사격 후 포강 내에 남아 있는 연소가스를 포구쪽으로 배출시킨다. 
◆ 주퇴복좌기=사격간 차체에 미치는 사격 충격력을 감소시키고 포신을 사격 위치로 복귀시키는 역할을 한다. 
◆ 구경장=포열의 길이를 나타내는 말. 52구경장이란 구경의 52배 길이로서 155㎜/52구경장은 155㎜의 52배, 즉 8m라는 뜻이다. 

위험 도사린 무장 사격시험 

1990년 늦가을, 신자포 연구진은 화포 관련 방산업체의 관계자들과 자리를 함께하는 연석회의를 열었다. 연구개발 예산이 부족했던 탓에 무장 개발과 관련된 계획을 설명하고 설비 보강에 먼저 투자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이윤을 추구하는 업체에 개발 가능성만 가지고 선(先) 투자를 부탁하기란 대단히 난감한 것이었지만, 참석자 대부분이 KH179곡사포를 개발할 당시에 참여했던 이들이라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10여 년이 지나 각 업체의 이사 또는 부장이 된 그들은 연구진의 계획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날 저녁 만찬장에서의 화제는 단연 KH179곡사포였다. 당시 열처리 조건을 잡기 위해 밤을 새운 이야기며, KH179의 운명을 좌우했던 운영용시험 이야기 등 화제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누군가 건배를 제의하며 이렇게 외쳤다. “한번 화포맨은 영원한 화포맨이다.” 아직 열악한 환경 속에 연구진과 업체의 도전의지는 그렇게 투합됐다. 

업체의 지원으로 포신 제작이 궤도에 오르면서 연구진은 기술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우선 포신을 거치할 시험장치대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포신의 최대 외경이 KH179와 동일하기 때문에 KH179의 가신을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사거리 40㎞를 확인하기 위한 사격 충격력을 견디는 거치대는 못되었다. 

연구원들은 저마다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포신을 큰 콘크리트 더미에 묶어 사격하는 방안이 가장 현실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해결책이 우연히 찾아왔다. 안흥종합시험장 손원호 실장이 문상규(현 풍산(주) 기술고문)부장에게 “앞날을 위해 자체적으로 개발해 놓은 다목적 시험기가 있다”고 말해준 것이었다. 

“8인치 포가를 이용해 포신외경에 상관없이 기술시험이 가능토록 한 시험기였어요. 그것도 설계 단계가 아닌 제작이 완료된 상태로 즉시 기술시험이 가능했습니다. 하늘이 돕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지요.”(홍석균 무장팀장) 

최초의 기술시험은 1992 1월 안흥종합시험장 3사격장에서 실시되었다. 다목적 시험기에 장착된 포신은 차가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더욱 당당하고 늠름해 보였다. 사격시험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고 적어도 이때만은 마음이 넉넉했다. 하지만 시험이란 것이 어디 뜻대로 되는 것이던가. 개발 중에는 많은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연구개발 기간은 특히 그렇다. 

엄동설한에 두려움과 기대를 안고 드디어 최초 무장 연구 시제품에 대한 사격시험을 가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때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져 나왔다. 높은 사격압력으로 뇌관이 삽입링에 고착돼 빠지지 않는 예가 가장 먼저 발생했다.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드라이버와 펜치 등 온갖 공구를 다 동원해 무리하게 빼려다보니 손바닥 껍질이 다 벗겨져 나갈 정도였다. 

자동장전장치를 사용해 55도 고각에서 M549A1 탄을 장전했는데 약실에 박혀야 할 탄이 잘 올라가더니 그만 `뚝' 떨어지는 일도 벌어졌다. 그곳에 서 있던 추증호 연구원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게로 제대로(?) 떨어졌더라면 발등·발가락은 그냥 으스러졌을 겁니다.” 

탐색개발이 거의 끝나가던 93년 여름, 장사정탄 및 추진장약에 대한 기술시험을 지원하던 중 생긴 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례. 이날 연구원들은 포 뒤로 20m쯤 떨어져 귀를 막은 채 사격을 지켜보았다. 몇 발은 무리없이 잘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고막을 찢는 듯한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무엇인가 이영현 연구원 머리 바로 위로 `휙' 지나갔다. 

사수 요원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서 달려가 보니 그 두꺼운 포열이 확장돼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주퇴복좌기에 걸쳐져 있었다. 서로가 어이없어 하는 가운데 이연구원은 문득 머리 위로 날아간 물체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조사를 해보니 공이 뭉치가 온데 간데 없었다. “순간 몸이 경직돼 버렸어요. 키가 조금만 컸더라면 이자리는커녕 K-9 구경도 못하고 이름 석 자만 작은 비석에 남아 있었겠지요.”(이영현 연구원) 

누군가는 이같은 사례의 원인이 안전불감증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다만 사격시험 최일선에 서는 무장팀 연구원에게는 그 많은 위험들이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숙명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편 연구진은 안흥종합시험장에서 탐색개발 기간까지 250발의 사격시험을 가졌다. 시험 결과 초속 929m의 포구속도를 얻음으로써 최대사거리 40㎞ 도달 가능성을 확인했다. 

`링 레이저 자이로' 신자포 적용 

일반적으로 자주포라고 하면 운용·발사체계가 자동화돼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기존 자주포는 일단 기동이 가능한 차체에 포를 탑재한 것만 말할 뿐 자동화와는 관계없다. 

KM109A2(K-55)만 해도 모든 사격준비 절차를 인력에 의존하고 있다. 다만 자체 동력(유압)을 이용해 포신을 돌리고 올리는 수고로움을 덜어줄 뿐이다. K-9 자주포에 신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기존 견인포·자주포와 달리 화포의 완전 자동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화포 자동화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기존 견인포·자주포의 운용·발사체계를 살펴보자.  이 화포들은 사격을 위해 먼저 사격하고자 하는 장소를 측지한 뒤 화포를 그곳으로 이동시키고 땅을 파 가신(架身·스페이드)을 고정시킨다. 
사격 제원이 하달되면 화포로부터 50m 이상 떨어진 위치에 나침반이 들어 있는 방향틀을 설치, 수포(수평기의 물방울·level vial)·웜 기어가 있는 방향포경과 상호 정렬을 한 뒤 사격방위각을 장입하고 방향 손잡이를 돌려 포신을 사격 방향으로 구동시킨다. 

그리고 겨냥틀 ·겨눔대를 화포 밖에 설치, 사격 방향을 고정한다. 이어 고저상한의에 사격 고각을 장입하고 포신을 사격 고각으로 들어올린다. 그 다음 포신의 폐쇄기를 열고 포탄과 추진장약을 장전, 폐쇄기를 닫고 뇌관을 삽입한 뒤 사격하게 된다. 사격 뒤에는 탄이 발사되면서 발생하는 충격으로 화포가 밀려나게 되고, 재차 사격하기 위해서는 다시 화포의 방향과 고각을 사격 위치로 보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절차는 수동으로 이뤄짐으로써 초탄 발사에 2~11분의 시간이 소요되고 최대 발사속도도 분당 4발 이상은 곤란하다. 그러므로 화포 자동화가 이루어지면 적은 포반원의 인원으로 사격 임무를 신속히(초탄 발사 소요시간 30초 이내) 진행시키고 대량 화력을 투발(급속사격 15초 동안 3발과 최대발사속도 분당 6발)한 뒤 신속히 진지변환해 다음 사격을 준비하는 슛 앤 스쿠트(shoot & scoot) 작전이 가능케 되는 것이다. 

국방과학연구소의 화포 자동화는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1980년대 초부터 안충호 체계팀장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했다. 사격 방향과 고각을 바로잡는 수포의 역할을 대신할 전기적 센서, 이동 중 또는 정지상태에서도 신속히 포·포탑을 자동으로 정렬할 수 있는 구동 시스템 등을 연구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당시 안팀장은 우선 포의 자세를 알 수 있는 수포의 역할을 전기적 센서로 대체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그런데 연구는 오래 가지 못했다. 1년을 더 연구한 후 연구과제로서 승인받지 못해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팀장은 장차 신개념의 자주포 개발을 염두에 두고 자료 수집과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느 날 `군사저널'(IDR)에서 화포의 사격 충격력을 견딜 수 있는 링 레이저 자이로 시스템이 미국 허니웰 사(社)가 개발했다는 기사를 읽게 됐어요. 너무도 반갑고 흥분되는 뉴스였습니다. 지금 K-9 자주포의 핵심 장치 중 하나입니다.” (안충호 팀장) 

링 레이저 자이로 시스템은 도대체 무엇일까. 위치확인장치로 이해되는 이 장치는 지구 회전 각속도의 1만분의 1까지 감지 가능한 링 레이저 자이로, 지구 중력 가속도의 10만분의 1까지 감지할 수 있는 가속도계, 그리고 이들 센서가 감지한 관성정보를 이용해 항법계산을 수행하는 항법 컴퓨터와 함께 한 몸을 구성한다. 

이 위치확인장치는 주행하는 자주포의 위치, 화포의 진북(眞北)에 대한 방위각 및 지구 수평면에 대한 고각·경사각을 자체적으로 계산해준다. 계산된 항법정보·자세정보는 사격 통제장치에 제공되는데 10m 이내의 위치 정확도와 0.7밀(mil) 이내의 방위각 정확도, 0.35밀 이내의 고각·경사각 정확도를 갖는다. 

이 장치가 자주포에 적용되면 포의 위치·상태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수동으로 이뤄지던 일련의 사격절차를 생략할 수 있다. 일반 화포처럼 사격을 위해 사전에 측지한 위치로 이동하지 않아도 되고 방향·고각을 잡기 위해 방향틀·겨냥틀·겨눔대 등의 부수 장비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화포 자동화, 궁극적으로는 신형 자주포의 핵심 장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안팀장은 신자주포 개발사업이 정식으로 시작되면서 즉각 이 링 레이저 자이로 시스템의 신자주포 적용을 결정했다. 연구·개발하자면 이 시스템과 유사한 기능을 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 못할 것도 없겠지만 소요될 개발기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 / 포탑 구동시스템 독자개발 

정확한 사격을 위해서는 사격목표 방향과 높이로 포․포탑을 정밀하게 구동, 정렬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여기서 정밀이란 1밀(1mil) 이내의 정확도를 말한다. 1밀은 360도를 6400으로 나눈 값, 또는 기준점에서 1㎞ 떨어진 곳의 수직 1m 지점까지의 각도로서 0.05625도이다. 다시말해 급속사격을 위해 포탑을 회전시켜 목표방향으로 향하게 할 때 포는 이 1밀의 각도 내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포․포탑을 정밀하게 구동할 수 있는 기술을 시스템적으로 구성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관련된 최신 기술은 당시 영국 빅커스사(社)가 개발, AS-90 자주포에 적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포탑실 김동현 박사는 1990년 9월 영국으로 날아갔다. 그는 부분적 기술협력 교환을 제의했으나 빅커스사의 부사장에게 자주포 전체를 사라는 말만 듣고 황망히 문을 나서야 했다. 김박사는 2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마르코니사를 방문했다. 이 회사는 엄청난 기술 이전료를 요구했다. 공장 설비 소개도 하지 않으면서 단지 도면만 보여주고 200만 달러를 주면 시뮬레이터를 개발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ꡒ당치 않은 태도지요. 물론 우리 기술이 취약하니까 감수할 수밖에 없긴 한데… 차를 내주겠다는 말을 뿌리치고 그 길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죠. 저도 한 오기 하는지라 죽는 한이 있어도 이 구동시스템을 만들겠다고 마음 먹었지요.ꡓ(김동현 박사) 

안태영 박사를 비롯한 포탑실은 개발회의를 통해 전차의 포/포탑 구동장치를 개발했던 경험을 살려 전기․유압방식의 구동시스템을 독자 개발키로 하고 유웅재 박사 등으로 특별개발팀을 구성했다. 모두가 독한 마음을 먹은 것인데, 이것은 큰 모험이었다. 실패할 경우 개발사업 전체가 입는 영향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개발팀은 곧 구동장치의 실험모델(시뮬레이터) 제작 준비에 들어갔다. 포․포탑의 중량과 관성량을 계산해 이를 기준으로 구동속도와 정밀도 규격을 산출해야 했다. 신형 자주포의 형상과 운용조건이 아직 구체화하지 않은 상태. 많은 어려움 속에 각종 기술자료를 수집하는 등 설계 데이터를 작성, 이를 토대로 91년 구동 시뮬레이터를 제작했다. 
92년부터 본격적인 시험에 들어간 연구진은 곧 난관에 봉착했다. 52구경장의 무장이 갖는 불균형 모멘트(포신 구동에 따른 하중 변화량)가 KM109A2(K-55) 무장의 2배에 달했던 것이다. 기존 유압평형기의 용량을 증대시킨 평형기는 무장의 위치 변화에 따른 불균형 모멘트 값을 충분히 보상하지 못했고 구동하는 각도에 따라 구동력도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이 문제는 당시 한창 개발 중이던 독일의 PzH2000 자주포에서도 나타났던 것이다. 안박사의 제안에 따라 서울공대의 이교일 교수와 공동연구를 통해 평형기․실린더․포로 조합한 메커니즘의 정확한 이론 모델을 산출하고 이를 모사실험에 이용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큰 설계 변경 없이 평형기에 대한 효과적인 유압 설정으로 시스템 구성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포/포탑의 구동, 탄 장전 및 이송에 긴요한 유압에너지를 만들어 주는 유압발생장치에서 생기는 소음도 문제였다. 난청의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소음이 컸던 것이다. 이대옥․김동현 박사, 그리고 동명중공업 안동문 부장과 엔지니어 등은 며칠 밤을 새워 그 원인이 유압의 과도한 출렁거림(맥동현상)에서 오는 것임을 밝혀냈다. 
ꡒ자동차 머플러에 쓰이는 헬름홀츠 감쇠기의 원리를 이용해 실험장치를 만들었어요. 소음을 줄이기 위한 감쇠기 조건을 변경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시끄럽던 장비가 갑자기 조용해지고 유압 맥동현상도 확연히 줄어든 겁니다. 이후 발명특허 및 실용신안으로 등록했는데, 내내 자랑거리로 남아 있었습니다.ꡓ(김동현 박사) 

또한 사격 명중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포․포탑 정밀제어를 위해서는 보다 발달한 제어 방법이 요구됐다. 고정호 박사와 최준성 선임연구원이 이때 디지털 제어기술로 개발한 마찰보상 제어방식은 국내에서는 선구자적인 것으로 선진국 기술과 비교해 손색이 없었다. 
이렇듯 순수 국내기술로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포․포탑 구동장치는 신형 자주포의 주요 핵심기술로서 구동 정밀도가 기준오차 범위 `1밀 이하'라는 탁월한 성능을 지니고 있다. 

미래戰 대비 핵심기술 연구 

`국가를 방위하는 기본 병기를 제 손으로 만들지 못하는 국가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1990년대 초 삼성테크윈(당시 삼성항공) 창원공장에는 이같은 슬로건이 공장 내에서 가장 높고 규모가 큰 초대형 크레인에 쓰여 있었다. 당시 삼성테크윈의 방산사업 총괄을 맡고 있던 노석호 특수사업본부장은 직원들과 함께 그 슬로건을 보면서 삼성이 KM109A2(K-55) 자주포를 생산, 국가 방위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져왔다. 

91년 겨울, 신형 자주포의 체계개념 연구가 마무리될 즈음 국방과학연구소 화포체계팀은 자주포체계 전문방산업체로 지정 받은 삼성테크윈의 한삼수 전 특수연구소장 등 기술진과 신자포 개발 관련 업무협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체계팀은 신자포의 차량분야는 개발 경험과 기술력이 있는 업체가 담당하고 삼성테크윈은 체계조립을 맡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삼성테크윈이 비록 미국과 자주포를 공동생산하면서 자주포를 국내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데는 기여했지만 직접적인 개발 경험이 없어 국내의 다른 궤도차량 전문업체에 비해 개발기술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서 제안된 것이다. 체계팀은 그래서 탐색개발계획에는 기동실험차량(MTR : Mobility Test Rig) 개발계획이 없다는 내용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삼성테크윈 기술진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ꡒ심장이 멈추고 눈앞이 아득해졌을ꡓ(한삼수 소장) 정도였다. 당시 삼성테크윈은 KM109A2 자주포용 탄약운반차 사업을 두고 다른 기동장비업체와 첨예하게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은 더욱 크게 와 닿았다. 한소장에게는 이것이 삼성테크윈의 방산부문에 대한 국과연 기술평가의 의미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한소장은 곧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삼성은 중장비․조선사업도 하고 있어 차량 관련 시스템기술과 용접기술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고, 삼성중공업 기계전자연구소․삼성종합기술원의 지원을 받으면 궤도차량 또한 개발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KM109A2의 공동생산 경험밖에 없는 기술수준이었기 때문에 국과연 체계팀의 판단이 옳다 여기면서도 자주포 체계 전문업체로서 차량분야를 내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차량을 기본으로 포병과 관련된 탄약운반차량 ․사격지휘차량 등의 계열장비를 개발, 계속 생산해야 하니까요.(한소장) 
노석호 본부장은 한소장 등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곧 MTR 개발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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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우익증오 19-04-04 21:24
   
귀요미지훈 19-04-04 22:24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항상 걸림돌은 '우리가 이걸 어떻게 해?'라는 무조건적인 반대/회의론자들이군요.
     
점퍼 19-04-05 13:39
   
인도나 이런데를 보면 하라고 해도 못하지요. 우리나라는 하게만 해준다면 해낼 수 있는 인재가 수두룩 합니다.
조선 자동차 반도체 모두 그런식으로 성공 했습니다. 윗사람이 방해만 하지 않고 할 수 있게 기회만 준다면 무었이든 해냈습니다.
물론 그리고 공은 윗사람이 채가지만.... 그래도 묵묵히 제 할일을 해내는 과학자 공학자들의 인재 인프라가 바로 대한민국의 힘이죠.
러키가이 19-04-05 01:51
   
우와 좋은 글이네용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