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솔로윙픽시입니다.
전 간간이 보이는 수준 높은 글을 기대하고 밀게에 자주 드나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대로 된 군사적 지식을 소유하거나, 또는 그것을 피력할 능력이 되는 분들도 한분 한분 떠나가시고, 그나마 남아계신 분들의 댓글조차도 요즘은 드물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 가생이 밀게를 떠나는 것을 고민하던 차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글을 하나 적습니다.
바로 토론하는 법에 대한 겁니다.
이 게시판에 모인 분들이 밀리터리에 대해 빠삭한 민간전문가든, 또는 대충 타이거 탱크는 멋있고 셔먼은 폭발한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는 입문자이든 그건 게시판의 전체적 수준을 높이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제대로 된 토론법만 지킨다면 서로의 가설이 갖고 있는 단점이나 약점을 서로의 지식과 주장을 피력하는 그 과정에서 수준 높은 글타래가 완성되며, 토론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이 분야에서 한 단계 승화된 데에 만족감을 느끼며 기분 좋게 현실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다만 자신의 생각을 무조건적으로 강요하거나,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뒷받침하기 위해 실지식을 쌓고자 하는 조그마한 성의조차도 없이 무례한 말투로 상대방의 정체나 능력을 지레짐작, 과소평가하며 3분 라면같은 싸구려 댓글을 남긴다면 앞으로 가생이 밀게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속 빈 강정이 되고 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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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은 발제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논하고자 하는 주제가 군사든 정치든 연예든 간에, 토론하는 방법은 언제나 같습니다.
1. A가 가설을 제기한다. 이때 발제자는 자신의 생각을 쓰되 정중하게, 그리고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해줄 근거를 제시한다. 이 근거가 없다면 그건 토론에 어울리는 발제글이 될 수 없다.
(나쁜 예: 북한군이 땅굴을 파 서울을 공격하면 국군을 꼼짝없이 뒤통수 맞고 망합니다. 끝.)
2. B가 그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가능성의 존재만은 수긍하고, 어째서 그 가설이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틀릴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3. A 또는 A와 동조하는 사람은 B가 내놓은 안티테제의 개연성 또한 제로는 아니라는 사실을 수긍하고, 반론 또는 A의 가설에 대한 옹호를 '충분한 근거와 함께' 한다.이 때, 상대방의 가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가는 관계가 없습니다. 상대방이 장난으로 또는 단순히 트롤링을 하기 위해 올린 헛소리가 아니라면 일단 그의 가설에도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주장을 펼쳐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밀리터리의 경우, 제대로 된 지식에 기반을 두었다면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전에 고려하지 못한 작은 변수가 리버리지 효과를 일으켜 큰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기 마련이고, 그런 쥐구멍을 없애기 위해 군에서는 닥쳐올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비해 작계를 짜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반 지식이 틀렸다면? 예를 들어 중간단계를 다 뛰어넘고, 북한의 장사정포 세력 킹왕짱 -> 남한 전역이 불바다가 된다, 라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그럴 경우에도 토론을 할 의지가 있다면 위에 적은 토론의 2번 스텝을 밟으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 가생이 밀게에서는 제대로 된 토론이 성립되는 경우가 드뭅니다. 제대로 된 토론은 몇몇 고수분들이 우연히 같은 자리에 모였을 경우에만 볼 수 있는 기현상이 되고 말았지요.
그보다도 이곳에는 위험한 유행병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반론을 한다면 반대한다는 말만 적거나, 누가 그러더라, 라고 두리뭉실 넘어가며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그 정도에서 그치면 양반입니다. 근거 불충분한 반론을 적는 것만으로는 모자란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토론에 빠져서는 안 되는 건 도발이라고 생각했는지, '상대방의 자질'을 의심하는 글을 덧붙입니다.
(예: '조선족/짱개/쪽바리 인가요?' '군대는 나오셨습니까?' '생각이 부족하신 것 같네요' '웃기지 마세요' 등)
한번 이렇게 엇나가기 시작하면, 그건 토론이 아니라 단순한 말싸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상대방의 논리가 허무맹랑하고 아니꼽게 비치더라도, 일단은 차분히 그의 논리를 수긍하고, 어째서 그런 시나리오가 가능한지를 생각해본 후에 글을 써도 늦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머릿속에서 상대방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단순히 부정만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도 발전할 수 없게 됩니다.
어차피 자극적이지도 않은 글, 읽어주실 분이 얼마나 계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이 계신다면 한번 자신이 어떻게 댓글을 달아 왔는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시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조차도 위에서 말한 저 원칙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으나, 시간이 허락하고 주제가 어울린다면 언제나 사실에 근거해 성의 있는 답변을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 모두 더운 여름날 찬 음식은 피하시고 건강히 지내시길 바라며 작별인사 드립니다.
솔로윙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