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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10 13:23
[뉴스] 알제리에겐 허락되지 않았던 박애 정신
 글쓴이 : 노닉
조회 : 2,453  


알제리 전쟁과 프랑스의 두 얼굴


2차 세계대전 독일에 항전 나선 프랑스

샤를 드골 지휘하에 식민지 원주민 적극 동원

전쟁 끝난 후 알제리 독립 시위 벌어지자

국제사회 속 위상 지키려 강경 탄압 나서

자유·평등·박애 가치의 아이러니한 민낯 





[국방일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단 6주 만에 독일에 패배했지만, 영국으로 망명한 샤를 드골(1890~1970) 장군은 나치에 굴복하지 않고 항전할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드골 휘하에는 덩케르크에서 탈출한 프랑스 제1군의 잔존 병력과 세계 각지의 식민지에 흩어진 군대가 전부였다. 드골의 자유프랑스군은 오랜 세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식민지 원주민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유럽과 가까운 북아프리카 식민지 원주민들은 드골의 저항군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프랑스의 핵심 식민지인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세네갈 등지에서 무려 23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참전했다.


라시드 부샤렙 감독의 ‘영광의 날들’(2006)은 프랑스 해방을 기치로 내걸고 싸웠던 알제리 청년들을 다룬 영화다. 프랑스를 위한 전쟁에 수많은 알제리 청년들은 기꺼이 자원한다. 그들은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프랑스가 해방된 1944년 9월 이후에는 독일 본토로 진격하는 프랑스군의 선봉을 맡았다. 알제리 청년들은 자신들이 해방시켰으므로 프랑스는 자신의 조국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인 알제리 청년 메시우드는 프랑스에서 이레네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알제리에서는 프랑스 여자와 함께 다닐 수도 없었던 알제리 청년에게 이레네는 “당신을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메시우드는 전쟁이 끝난 후 당당한 프랑스인으로 살아갈 미래를 그리면서 들뜬다. 하지만 메시우드가 전장에서 쓴 편지들은 백인 장교의 검열에 걸려 조롱거리가 되었고 알제리 청년들에게는 음식조차 동등하게 배급되지 않았다. 단지 ‘프랑스인’이라는 소박한 희망을 꿈꿨던 메시우드는 1945년 1월 알자스에서 전사한다. 그의 묘비에는 ‘자유를 위해 죽다’라는 글귀가 새겨진다. 영화는 60여 년이 지난 후 한 전우가 그의 무덤을 쓸쓸하게 응시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영화는 프랑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고, 2006년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당시 영화의 시사회에 참석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북아프리카 출신 퇴역군인들에게 프랑스군과 동등한 연금과 사회적 혜택을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국기에 새긴 ‘선진국 프랑스’를 대변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진실은 전혀 달랐다. 전쟁이 끝나자 프랑스는 돌변했다. 1945년 5월 종전 무렵 알제리 동부 세티프에서 독립 시위가 벌어지자 드골은 알제리에서 프랑스의 주권을 위협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강경 진압에 나섰다. 전쟁이 끝난 후 미·소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국제무대에서 이등국가로 전락할 것을 염려한 프랑스는 식민지를 유지하여 국가적 위상을 지키고자 했다. 드골은 알제리를 “프랑스의 완벽한 일부”로 규정하면서 알제리의 독립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알제리 현지와 프랑스 본토에서의 인종차별도 계속되었다. 영화 ‘영광의 날들’에 묘사된 프랑스인과 알제리인이 같은 깃발 아래 하나가 되는 박애의 풍경은 환상에 불과했다. 프랑스의 자유를 외치면서 저항군을 이끌었던 드골의 이미지는 세티프 강경 진압으로 완전히 붕괴했고 알제리인들의 독립 요구는 점차 거세졌다. 전쟁에 참전했던 알제리 청년들은 환멸에 휩싸였고 그들은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의 주축이 되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베트남이 독립하자 알제리에서도 조직화된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알제리 무장조직은 프랑스 본토와 알제리에서 연속적인 ‘카페 테러’를 감행했다. 디엔비엔푸의 패배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프랑스는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저항은 줄어들지 않았다. 알제리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계속 증원을 요청했다. 알제리 파병으로 징집제가 부활하자 프랑스 젊은 세대들의 반감이 크게 고조되었다. 알제리 출신 프랑스 지식인들의 반전 운동까지 벌어지고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했지만, 프랑스는 1962년까지 전쟁을 지속했다. 알제리 전쟁 기간에 축적된 기성세대를 향한 프랑스 청년들의 분노는 훗날 ‘68혁명’으로 폭발했다.


질로 폰테 코르보 감독은 영화 ‘알제리 전투’(1966)에서 알제리 독립투쟁과 프랑스군의 폭력을 사실적으로 담았다. 알제리 정부의 지원 아래 만들어진 이 영화는 모두 알제리의 실제 장소에서 촬영되었고, 촬영에 자원한 알제리 국민은 독립항쟁 당시를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영화 속에서 레지스탕스 출신 프랑스군 지휘관 ‘마티스 대령’은 나치에 짓밟힌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싸웠던 자들이 식민지의 해방운동을 탄압하는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마티스 대령’의 실제 모델로는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 정보부 책임자였던 폴 오사레스 장군이 거론된다. 폴 오사레스는 2001년에 발간한 회고록에서 자신이 FLN의 지도자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살해했음을 인정했다.


프랑스로 망명한 이탈리아계 유대인인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은 이 영화로 프랑스가 내세우는 자유, 평등, 박애의 아이러니와 나치의 폭력을 그토록 강조한 프랑스의 이면을 폭로했다. ‘알제리 전투’는 1966년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영화의 상영을 금지했고 이는 2004년에야 해제되었다. 나치의 점령에 맞선 저항의 서사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자신들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범죄는 애써 외면하는 프랑스의 기만은 낯설지 않다. 우리가 겪었던 불행한 역사와 상당 부분 겹쳐지기 때문이다.  <이정현 문학평론가>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20201008/1/BBSMSTR_00000010010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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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만세 20-10-10 20:22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미영프가 뭔짓을 했는지만 봐도...
N1ghtEast 20-10-10 22:33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영국과 스페인과 프랑스 중에
그 중에 최악은 프랑스라~
수염차 20-10-11 02:00
   
현제도 프랑스는 최다 식민지를 보유한걸로 암....

2차대전의 발발원인은 여러가지가 잇겟지만...그중
경제문제도 큰걸로 알려졋음....

다수의 식민지를 지배중인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과는 달리...
주변국의 방해로 통일이 늦어졋던 독일은 식민지국이 없는 상태....

이로인해 생산원가가 따라가질 못햇고.....
결국 전쟁으로 귀결.....

나찌가 무조건 나쁜놈??
영프소등은 좋은놈??

소련의 스탈린은 최대의 인구를 학살햇고....
영국과 프랑스등의 패악질로 아프리카 중동이 지금도 저난리중.....

특히나 영국은 아편으로 청을 공격한 패륜국가 ㅋㅋ
     
승리만세 20-11-03 16:11
   
인간도살자는 미국인데, 가장많은 영토를 뺏고 거주민을 애고여자고 싹다학살하고 그거에도 성에 안차자 필리핀인 100만명을 학살하며 식민지배하고, 미국건국역사만봐도 완전 싸이코 학살마 집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