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이러한 덩치를 옆에 놓고, 지난 2천여년간 우리의 조상들이 고민했던 것과 같이, 도전이냐 적응이냐를 놓고, 깊이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다.
태평양과 대륙 사이의 교두보에 살고 있는 우리이다. 양대 세력 모두가 이 곳을 필요로 하며 모두에게 치명적인 지역이다. 그들 간의 충돌이 잦아지면, 주변의 파도가 거칠어진다. 그들의 표현대로 허브(Hub)이다. 허브가 약하면 주변에 휘둘린다. 허브가 강하면 주변의 균형을 이끌 수 있다. 한국이 이젠 주변에 휘둘릴 만큼 더 이상 약하지는 않다.
어떤 일이 있어도 더 이상 남북이 진영간 대리전에 참여는 분명히 없다.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맞닥뜨렸던 가혹한 현실이 내살 끝에 차갑게 와 닿는다. 김상헌의 척화(斥和)와 최명길의 주화(主和)는 단순한 찬반 논쟁이 아니다. 선악시비(善惡是非)로 나눌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또 이 논리가 국가수호와 백성의 안위라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또 다른 가치와 겹치는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할 것인지, 그 결정을 어떻게 순리적으로 내재화(국민설득)할 것인지가 핵심이 된다.
요컨대 김상헌과 최명길의 대립은 생존의 길이 부딪히는 가운데, 무엇이 공동체와 구성원들을 위해 더욱 중요한지를 논하는 방향의 논쟁이었다. 지금도 어떤 원칙을 따르고, 어떤 기준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운명이 갈리게 된다는 점에서, 다름이 없다. 지금 역시 남한산성을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청나라는 여진(만주)족의 나라였고 지금의 좌국은 한족 중심이니 직접적인 감정을 대입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우리의 결정이 당연히 우리를 대상으로하는 유불리를 판단함으로 이루어 질 것이지, 더 이상 무력이나 강요에 의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만약 강요에 의할 것 같으면 당연히 생존 무장을 선택 할 것이니 말이다. 다만 염두에 둘 것은 우리의 선택에 동맹에 의한 강제적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동맹이란 그녀를 믿지 마라, 동맹이란 그녀에게 속지마라. 동맹이란 그녀는 그 순간만 진실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우리와 동맹을 맺은 것이기 때문이다. 뜨거웠던 시기가 지나면 그녀는 제 갈길 간다. She will leave you when needed. 우리의 생존은 100% 우리의 책임이다.
그럼에도 집단지성을 모아 최선의 공존의 길을 찾아 어려움을 이겨내야 할 것이다. 매우 안심이 되는 것은 현 정권이 비의존적(非依存的) 국방이라는 기치를 걸고 군 편제의 합리화, 장비의 과학화, 방위산업의 고도화 및 전략의 내재화(외교, 전작권 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에 많이 고무되고 있다.
매우 딱딱한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곁다리 : 中國이란 말을 사용하면, 그 주변국인 한국은 변국(邊/辺/边-변두리)이 됩니다. 그 국호의 오만함이 내겐 거북합니다. 그들은 조그만 나라가 왜 대한이냐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기준으로 편안하게 좌국 우국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국명을 사용해야 할 때에는 차이나를 썼습니다. 이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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