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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1-25 23:51
[잡담] 내가 군생활 했을 때의 군기.
 글쓴이 : 야구아제
조회 : 1,658  

저는 2000년대 초반에 군복무를 했고, 끌려 가기보다는 내가 간다는 의미로 해병대에 지원해서 군대 복무를 마쳤습니다.

훈련은 포항에서 받았고, 자대는 해병 6여단 백령도였습니다. 당시 해병대에는 '오도'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어원은 알 수 없으나 군대 용어가 대부분 일본어에서 온 것이라는 것은 대충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좋은 뜻은 아닌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른바 짬이라는 것이 호봉 별로, 원래 호봉이라는 말은 1년을 말하는데 해병대에서는 매 달을 한 호봉으로 봤습니다.

이병은 보는 앞에서 물을 마실 수 없고, 병장들 수발을 들어야 했고, 세탁기가 있어도 손빨래를 해야 하는 등 말도 안 되는 '법칙'들이 있었습니다.

폭력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는데(제가 덜 맞아서 그렇게 느꼈을지도) 분위기는 상당히 폭압적인 부분이 컸습니다.

당시 저는 참는 것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선임들이 때린다고 해도 그 이유를 저에게서 찾으려 애 썼습니다. 

사실 저는 정말 군생활 할 때 안 맞았습니다. 이병 때 아주 잠깐 이유 없이 맞은 것 말고는 상병까지 거의 맞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대하고 동기들 말을 들어 보니 실제로 그렇게 폭력이 없진 않았다고 하더군요.

여하튼 후임들이 배신을 해도 후임들의 잘못을 탓하지 않았고, 선임들의 부당함에도 속으로만 생각하고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병장이 돼서는 제가 생각했을 때 부당했던 것은 다 풀어 줬습니다. 이른바 해병 병장이 되면 오도를 만들 수도 풀 수도 있었습니다.

병장에 오를 때까지 온갖 부조리를 다 겪고, 심지어 꺾기기 위해서 삶은 계란을 매일 한 판씩 강제로 먹거나 물 5 리터를 원샸하기도 했습니다만 병장 되고 나서 다 풀어 줬습니다.

그랬더니 상병선에서 반발하더군요. 그래서 우리 소대에 한정에서 풀어줬습니다.

가장 반대가 심했던 동기들은 바로 이병 때 가장 군생활 못 한다며 늘 혼나고 맞았던 친구들이었죠.

어이가 없어서 굳이 그렇게 해야겠냐고 물었더니 당한 만큼 갚아 줘야 한다고 하더군요.

오도에 따르면 병장은 훈련 나갈 때 군장에 아무 것도 넣지 않고 신문지로 모양만 잡아야 했고, 이병은 병장들 군장까지 군장에 넣어야 했고, 물도 방독면 주머니에 두 패트병씩 넣어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 때는 분위기가 풀어 줄 것은 풀어 주고 병장이나 고참이 모범을 보이자였습니다. 그래서 병장 때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후임은 후임다워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선임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만 지키면 평등하다고 여겼습니다.

해병은 병이라며 병이 주도해서 열심히 훈련과 근무에 임하는 것이 가장 모범적인 군대라고 그 때는 생각했었습니다.

저 때는 그랬습니다.

어느 시대가 되든 군대는 국민을 위해 가족을 위해 나라를 지키며 임전무퇴의 마음으로 나라를 지키며 맡은 바 임무에 대해 전문성과 적극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지켜진다면 어떤 변화도 상관 없다고 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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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케불프 21-01-26 00:13
   
라때와 비슷하군요

세월이 꽤 많이 흘렀는데도...

저는 81년 의정부101 보충대 군번입니다.
     
야구아제 21-01-26 00:17
   
해병대가 병 문화 변화가 좀 더뎌서 2000년대에도 저랬네요.^^;
booms 21-01-26 00:19
   
해병대는 군기가 엄한걸로 유명하니 자부심이 없었다면 더 견디기 힘들었을겁니다.

제가 있던 부대는 군기가 엄하진 않았는데 그래도 부조리같은건 있었고 그걸 전통인양 당연시했었고 받아들였습니다. 고참되서야 이게 뭔 꼬장 짓거린가 싶어 다 없애버렸습니다. 그건 후임들에게 선임으로써 일종의 배려이고 고수하고자하는 동기들을 설득한 노력의 결과물인데 악습과 부조리의 철폐에 대한 소중함을 후임들이 전혀 인식을 못하고 별거 아닌양 말할땐 좀 열불이 나기도 했었습니다.

경직된 모습에서 그래도 좀 풀려서 그런지 개념없는 소리도 곧 잘하고 편하게 지냈는데 가끔 지나칠때 보는 타부대 동기(군기가 엄하기로 유명한부대)의 악습과 부조리를 보니 없앤게 났다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야구아제 21-01-26 00:22
   
저 딴에는 참 많이 개방적이었다고 생각하고 군생활 열심히 했다고도 생각했는데 막상 제대해서 복학하니 또 다르더군요.

후배가 인사를 안 하면 열 받고, 예의 없어 보이고 그렇더라고요.

여자 후배들은 제가 눈빛이 너무 무섭다고 꺼리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저희 분위기가 해병대 쪽과는 너무 달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
          
booms 21-01-26 00:28
   
그런 애들을 볼때마다 생각나는게

전역후 올만에 만난 친우들 중 몇명이 분위기가 너무 다크해서 물어보니 난사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녀석들이 있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일종의 PTSD를 겪고 있었던것같고 그만큼 희생하는 친구들이 많은 걸 좀 여성들과 미필자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군복무하고있는 장정들과 전역한 선배들 모두 존경과 존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록선장 21-01-26 02:53
   
94년도에는 많이 맞았고 얼차례도 많이 받았어요. 연병장에서 머리박고 전진, 깍지끼고 전진, 툭하면 화장실 끌려가서 맞고... 뭐 조금 잘못하면 핵꿀밤 싸대기는 뭐 일상... 이등병때 훈련 복귀후 정신 없이 정리하는 와중에 내무실에서 내 철모가 사라졌는데 막사 뒤로 끌려가서 고참 5명 정도에게 구타 당하는데 그 때 일부러 데굴데굴 굴렀어요. 뭐 고참들이 날 아예 죽일 생각은 아니었고 다들 축구를 잘 못해서인지 빗맞더라고요. 나중에 병장때 알게된게 그 사라진 철모는 같은 내무실 다른 분대가 훔친거더라고요 여유분 쟁여놓는다고.. 그것도 동기가... 그래서 그거 알자마자 달려들어서 그 새끼한테 야삽 던졌었죠 어떻게 동기가... 쩝...다 까마득히 지난 일... 그렇게 군기 쎈거 같아도 밤에 은근 하극상 많았어요. 밤에 보초 나가다가 중간에 근처 초소에서 순진한 수송부 고참 양아치 같은 후임(나한테는 고참)한테 맞는거 보고 충격 받았던 기억... 다음 날 아무일 없이 일상이 되버리고...그 양아치 못된 놈 갚아주고 싶었는데 몇 번 붙어 봤는데 끝을 못 봤네요. 그 외에도 참 많지만...ㅋ 긴 넋두리 읽느라 고생 많았어요
 ㅋㅋ 갑자기 추억이 소환되서;;
     
도나201 21-01-26 13:41
   
솔직히 말해서 군대군기라는 것 가혹행위는
몇몇놈 인성 ㅈ 같은 놈들이 만들어낸것임.

그놈들 나가고 난뒤 한동안은 괜잖음.
근데 인성 ㅈ 같은 놈들이 또 그렇게 만듬.

지금도 마찬가지임.

가혹행위가 없어져야 하는 이유는  간부들이 그걸 용인함.
그게 편하니까.

없애야하고 처벌대상이어야 하는데.
쉽지 않음.
          
하록선장 21-01-26 19:29
   
맞아요. 꼭 몇명이 문제죠. 전 얼차례랑 구타에 질려서 후임들은 손하나 건드리지 않았어요. 제대 전날까지 아침에 청소도 같이하고. 작업도 같이하고. 중간에 PX추진해주고...말년휴가 가기 전에 대대야종이었나 훈련준비도 도와주고. ㅎㅎ
흑수선 21-01-26 05:20
   
군대얘기 하기 있기없기....!
v포도 21-01-26 15:35
   
96년부터 군생활 신철원에서 했음...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는 희안한 부조리 있었음. 글쓴이와 비슷한것도 있었는데 풀어보자면...
1. 내무반에서 컵을 사용하여 물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일병부터임. 이병은 세면대에 입대고 마심
2. 전투화 끈 묶는 장소도 계급별로 다름.
  이병-막사밖에 나가서 서서 허리숙여 묶음
  일병-내무반안에서 서서 허리숙여 묶음
  상병-내무반 침상에 앉아서 허리숙여 묶음
  병장-내부반 침상에 다리 올리고 묶음
3. px는 상병때부터 자유시간에 출입가능
 그 아래 계급은 허락이 있거나 심부름으로 갈 수 있음.
4. 병장진급 전날 밤에 같은 중대 병장들이 반합에 물을 주면 그걸 마셨음
  (병장1인 1반합, 맘좋은 병장은 물을 조금만 담아주고 못된 병장은 물을 가득담고
    어떤 놈은 담배꽁초도 넣음... 당연히 최소 15명이 넘으므로 물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고...담날 되면 눈에 실핏줄터짐
  아마 술은 금지되어있으니 대신 물로 축하하는 관습이 악습이 된듯...)
  다행히 내 앞에서 대대장이 금지시킴...사실 훈련보다 그게 더 무서움.
5. 신병에게 px에서 마음껏 배터지게 먹임(나중에 뉴스보고 이게 식고문이구나 알았음, 내동기는 토했고, 나는 체해서 고참이 손가락을 바늘로 따줬음.. 이렇게 까지 꾸역꾸역 먹으니까 깡이 있다고 고참들이 약간 인정해줌)
6. 신병 군장이 제일 무거움.. A형 텐트 1동, 야삽, 전투화 등을 FM으로 넣고(사실 FM은 A텐트 1/2인데..
  1동을 넣다니) 병장은 모포와 옷위주로 넣는 문화가 있었음.. 나중에 불시 군장사열에서 얼차려 받는
  고참도 나왔던거 같음.
  더 많은데 이런거 갈수록 없어지게 되어서 참 다행으로 생각함.
  이런거 많다고 강한 군대는 아님...
  요즘 KCTC 훈련 한번 해보고 싶네요... 맨날 훈련하던거라 잘 할 수 있을거 같아요.
광주코봉이 21-01-26 15:41
   
이런글 주제는 오랫만이네요~

"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오랫만에 로긴해서 댓글다네요

1994년 3월 강원도에서 군생활하는 친구넘 면회갔다 손등이 가뭄 논바닥처럼 갈라지듯 피가 질질 나오는 친구넘들 보면서 102보로 가는건 100퍼 강원도다 싶어 잔꾀를 내어 의경으로 지원입대 했는데

자대배치 받은게 전라도 광주의 방법순찰대로 배치 받아 날아갈듯 기뻐했었는데~^^;;;;;

말이 방범순찰대이지 백골단 청사복 데모진압부대로 배치받고 고난?의 군생활을 했었네요

김일성이 죽고 이념적 이슈로 인해 하루가 멀다하고 데모진압의 최일선에서 쇠파이프 싸움하는 해골마크입은 청사복 특공 진압대에서 만기전역 했네요

기본 구타는 일상이라 안맞고 넘어간 날은 괜히 불안했었고 얼차례는 머리박는것도 특화해서 병투껑,경찰봉,치약뚜껑~ 그냥 맨바닥에서 머리박음 한,두시간은 기본였던(그땐 어커했나 몰라^^;;;)

암기사항이 어마무시 했는데 경찰무전용 음어부터~차기수가 내가 암기사항 다 왜울때까지 거즘 1주일을 쪽잠잦던 기억이 나네요

무엇보다도 군기가 모든게 각이 생명이었음 관물대45도 각도로 정자세로 앉아 눈도 못돌리길 3개월 tv는 물론 전화도 3개월때까지는 고참이 지켜보는데서 했었고~

무엇보다 힘들었던건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고참들이 다그랬던건 아니지만 인간이 아닌 고참들이 많았어요 시위대와 직접 칼싸움을 해대다보니 피를 많이 봐서인지 인성들이 개차반였고 부당한 구타나 얼차례도 심했지만 군생활하며 악마들을 봤었네요  다행이 아주아주 기수가 잘풀려서 자대배치 1년만에 견장을 달았고 거지같은 병폐들을 많이 고쳤는데 제대후에도 구타 사망사고와 xx사건으로 방송까지 나왔더라구요

제대후 의경으로 군생활 했던것을 제대후에 말도 못하겠더라구요
의경? 완전 개편했것다 이러니
아침마다 8km 방독면 쓰고 구보하고(민간인들 민원이 많아서) 훈련이 실전 진압 지속적인 훈련이 정말 빡세게 했는데 그래받자 해병대 특공대 나온분들 같이 어따 말을 못하겠더군요ㅋ

갑자기 군기이야기 나와 몇자 끄적여 봤습니다
     
v포도 21-01-26 16:04
   
그 시기에 전경으로 가다니 호랑이 아가리 안으로 들어가셨군요..고생하셨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