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밀리터리 게시판
 
작성일 : 21-01-29 14:37
[사진] 남베트남 최후의 결사항전자 레민다오 소장
 글쓴이 : 노닉
조회 : 3,412  

( 군복을 벗어던지고 도망가 도로에 널브러진 남베트남군 군복들 )

( 남베트남 대통령궁으로 진입하는 월맹군 전차 )

(로마숫자로 3이라고 써져있는 군복을 입은사람이 레민다오 소장.

마지막 명령을 내리면서 울고있는 모습이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후, 남베트남군은 미국에서 공여 받은 수많은 최신 무기들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졸전을 계속하였다.


전방에서 "최정예"라고 목에 힘을 주고 다니던 1군단과 2군단은 몇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하룻밤 사이에 사단급 병력이 무기를 버리고 탈영하는 사건이 벌어질 정도로 순식간에 와해 되었고


남베트남군에 유의미하게 남은 병력은 후방의 부실한 3군단과 4군단 만이 남아 있었다.

(이 때 이미 남베트남 대통령과 정부 고위 관료들은 남베트남에서 탈출했다.)


그나마도 3군단은 최약체로 평가 받던 레민다오 소장의 18사단과 잔존 남베트남 레인저 여단만이 남아 있어 도저히 "군단"이라고 불러줄 수 없을 정도의 규모였고


4군단은 민병대와 경찰 병력만으로 이루어져 군대조차 아니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3군단은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으로 향하는 길목인 "쑤안록"에 배치되었고


이윽고 공산군의 4개 사단이 공격해옴으로써 사이공과 남베트남이 끝장나나 싶었으나


레민다오 소장의 18사단은 공산군 4개 사단의 공세를 저지시키고 심지어 반격을 가해 쑤안록 근처의 고지들을 재점령하는 쾌거를 올린다.


이 과정에서 무려 5일 동안이나 쑤안록과 사이공을 방어해냈는데


이 5일 동안 수많은 남베트남 민간인과 미국, 동맹국 인원들이 피난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낸 것이다.


그러나 공산군은 곧 기갑 여단과 10개 사단을 추가로 투입했고


결국 레민다오 소장과 18사단, 레인저 여단은 사이공으로 후퇴해서 최후의 방어를 준비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 후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사이공 전선은 붕괴되었고 수도가 공산군에게 함락되며 베트남 공화국은 적화통일 되어 멸망하고 만다.


1975년 4월 30일에 남베트남이 항복한 이후에 레민다오 소장은 체포되어 17년 동안 북베트남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1993년에 석방된 이후에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660041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로딩중에러 21-01-29 14:44
   
베트남 끝 무렵에 이미 승산 없죠. 북베트남 정규군과 싸운것도 아닌 게릴라와 싸움에서도 졌는데...
번외로 미국계 남베트남 출신들이 우리 한국계와 사이가 괜찮다고 하던데
베트남전때문인가 싶기도 하네요.
     
도나201 21-01-29 14:57
   
대부분 한국 민간학살 행위는 남베트남 레인저 부대의 행위가 90% 이상임.
아직도 증언을 보면 한국군복이라고 하지만,
특히 청룡부대.....

둘다 군복이 비슷해서 확실한 부대명을 못됨.
그냥 얼룩무늬 군복임.

실상 모든 훈련이나 총기사용 군대 규율등등 많이 교육시켰다고 함.
booms 21-01-29 14:55
   
남베트남이나 장제스의 국민당이나 도통 왜 그렇게 정신, 사기, 교육, 훈련 이런게 북베트남과 공산당에 밀렸는지 이해를 못하겠음.

우리가 이상했던건가...
     
도나201 21-01-29 15:00
   
* 비밀글 입니다.
     
다른생각 21-01-29 21:27
   
* 비밀글 입니다.
태강즉절 21-01-29 15:17
   
* 비밀글 입니다.
일빵빵 21-01-29 15:30
   
전쟁에 패한 나라의 장군으로 정치범 수용소에 20년이나 있었으면 그동안 전향을 안했나보네 ...
먼바다로 21-01-29 15:34
   
월남이 패망하고 호치민이 통일하는게 너무나도 상식적인 사고가 아닌가요. 사진과 설명에서 공산군 함락 적화통일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이건 미국 중심의  시각인 것이지요 호치민은 자신의 조국을 프랑스와 외세로부터 독립시킨 민족영웅입니다. 발제의 내용처럼 공산당과 적화통일이란 표현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통일이후 중국과의 전쟁이 나올 수 없습니다. 호치민은 공산주의자 이전에 민족주의자 입니다.
     
태강즉절 21-01-29 15:45
   
ㄴ...전쟁 끝나고 월맹군 장군이 회고하길..
산 정상으로 대포를 영차영차 밀어올리는데..그거이 굴렀다합디다..
그런데 동원된 남쪽 민간인들이 스스로 포바퀴에 자기 몸통을 끼워서리 정지시켰고... 다시 끌고..
그때 확신햇다고.."이 전쟁 우리가 이긴다!" 라고..
민심이 천심인데..이미 민심이 월맹편에 ..
공산주의고 나발이고 ...일단 민족주의 감성을 때려주니..야그는 애시당초 끝난거겠죠.
대팔이 21-01-29 16:04
   
월맹보다 많은 군대...
전원 M16무장...
수많은 헬기보유...
압도적인 공군지원...
도저히 질수 없는 전쟁에서 졌음...
과부 21-01-29 16:26
   
몽골도 유일하게 패배하고 도망간 곳이 여기인데 프랑스가 어떻게 여기를 식민지 삼았는지 그게 더 신기하네요.
우리꼴 난거 아닌지....싸워보지도 못하고 식민지된....
     
헤헤헤헤헷 21-01-29 19:59
   
싸운 대상이 자기 전력으로 베트남과 싸운 적이 없습니다.
상대가 차포 떼지 않고 덤볐으면 게릴라전이고 뭐고 버티지 못했겠죠.
중공하고 싸운 것만 베트남도 전력으로 싸우지 않았죠. ^^
점퍼 21-01-29 16:31
   
민심은 천심이다...
바람노래방 21-01-30 00:51
   
남베트남의 패망을 이야기하면 단골 레파토리가 부정부패 때문이라는둥 원인을 자꾸 남베트남으로의 무능으로만 한정하는데
남베트남이 진건 북베트남이 전쟁을 잘했기 때문에 진겁니다.
북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등 전쟁터를 크게 크게 활용하며
적(남베트남 + 미군연합군) 잘 분산 시켰고, 내부적으로 게릴라전도 잘 했고
라오스와 캄보이다에서 이런 저런 정치적 수단도 잘 활용해서 제2,제3,제4열 등을 만드는등 능력이 좋았기 때문이죠.
hell로 21-01-30 05:46
   
[ 역사는 항상 승자의 편에서 쓰여 진다. 사이공이 함락되고 전쟁이 끝난 후, 우리는 월남(남베트남)에는 나라가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 속에서 희망이나 긍지를 가진 지도층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도 끝까지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군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미(美)대사관 옥상에서 나만 살겠다고 아우성치며 조국을 탈출하려는 대열에 끼어드는 대신, 지구상에서 영원히 없어질 조국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라이케이에 주둔 중이던 보병 제5사단장 레웬비 장군은 젊은 사관생도들이 사이공을 지키겠다고 결사항전(決死抗戰)의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사이공에 남아있는 패잔 병력과 합류하기 위해 5천명의 사단 병력을 이끌고 월맹 1군단 병력이 포위하고 있는 사이공 외곽 포위망을 뚫기 위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부대가 궤멸되자, 그는 4월 30일 사이공의 함락과 함께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했다.

1972년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월맹과 xxxx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사이공에서 9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캄보디아 인접 도시 안록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바로 그 공격에서 안록을 지켜낸 영웅이 리반흥 장군이다.
리반흥 장군은 안록 전투를 끝낸 후 제4전선의 칸토로 부임했다. 칸토는 사이공 남부에 있는 농산물 집산지로 메콩 델타의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그는 부임 후 지역을 평정하고 효과적으로 방어해서, 월맹군과 xxxx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의 용맹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군내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해 4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의 부대원들은 마지막 한 방의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겠다는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4월 30일에 대통령은 항복선언을 했다.
리반흥 장군은 4지구 전선사령관 웬코어남 대장으로부터 항복명령을 직접 전화로 전달받은 후, 그동안 군인정신을 지키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과 패망한 나라의 운명을 슬퍼하면서 부하들과 처자식에게 안녕을 고하고 벨트에 차고 있던 45구경 권총으로 자결했다.

  4지구 전선사령관 웬코아남 대장은 부하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온 군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4월30일 밤 11시 30분쯤 리반흥 장군과 전화 통화를 했다. "리장군, 덩반민 대통령에게서 항복 명령을 받았네. 이제 우리는 나라를 잃었어."
리반흥 장군과 통화를 끝내고 난 후, 그의 방에서는 한 방의 총성이 들렸다. 그 소리는 명예로운 그의 생을 마감하는 서글픈 소리였다.

 사이공 남쪽에 위치한 수도를 지키는 보병 7사단장 탄반하이 장군은 호탕하고 솔직하며 청렴결백한 군인으로 군내부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7사단장이 되기 전 그는 특수부대장으로 상업지구 초론에 침투한 적을 소탕했고, 국가경찰국장 재직시에는 청렴한 성품으로 많은 사람들의 신임을 받았다. 그도 사단장실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공수부대 출신인 2지구 전선사령관 판반푸 대장은 주월한국군이 철수한 지역을 지휘하던 총사령 관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던 캄보디아 국경 근처 풀레이크 전선이 붕괴한 후 사이공으로 후퇴했다.
주월미국대사관에서는 그에게 사이공 탈출을 도와주겠다고 연락해 왔다. 하지만 그는 “패전지장(敗戰之將)으로 나라를 잃게 했는데, 더 이상 살아야 할 의미가 없다”면서 미대사관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도 4월 30일 사이공 함락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호옥칸 대령은 패망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군인들과 동렬에 놓이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수색정찰대 소속 장교로 군에 첫발을 디딘 그는 1974년 베트남 남쪽 깊숙한 추옹티엔성 성장으로 임명됐다. 성장으로 임명된 지 1년 후,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고 대통령은 항복을 선언한 상태에서 그는 항복을 거부하고 마지막 총탄이 떨어질 때까지 기관총을 들고 부대원들과 성청을 지켰다. 전투가 끝난 후 월맹군의 포로가 된 그는 월맹군의 속칭 캉가루 군사법정에서 갖은 모욕을 감수하면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처형을 앞두고 노란 바탕에 세 줄의 적색 선이 그려진 조국의 깃발에 마지막 경례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 조국이여...."
당시빈 소령은 덩반민 대통령이 항복선언을 한 지 2시간 후, 가족들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에 집안에 있는 부처님을 모시는 작은 사당에서 7명의 자녀와 아내를 차례로 사살하고 스스로 목숨도 끊었다. 그의 시신 곁에서는 현재 가치로 미화 500달러에 상당하는 월남돈과 함께 유서가 발견됐다.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존경하는 이웃이여,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와 저의 가족은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살지 못함을 알고 있기에 여기서 생을 마감합니다.
저희가 이렇게 떠나서 여러분에게 불편을 끼쳐 드리는 군요. 끝으로 적지만 제가 가진 전 재산을 남겨 놓고 떠나오니 저희를 매장하는 비용으로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당시빈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