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등장하였으며, 완전한 수레 실물 유물은 현존하지 않으나 경주 계림로 수레모양 토기 등의 수레모양 토기나 실제 수레의 부품 유물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있는 고대 도로 유적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충북 옥천군에서는 신라 서라벌과 옥천을 잇는 도로 유적이 2018년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다 조선시대에는 큰 강과 연안 항로를 이용한 수운이 국가 물류운송의 중핵이었고 수레는 부차적인 역할에 머물렀는데 이를 감안하지 않은 실학자들의 호도하고 신분제하에서 고하를 나타내는 수레와 운송수단으로서의 수레를 구분하지 못해 조선 정부가 의도적으로 수레의 사용과 보급을 막았다는 낭설을 퍼뜨리는 경우가 많다.
좁은 땅에 산과 하천이 너무 많아 전근대 조선의 비포장도로에선 수레는 운송량은 수운에 훨씬 못미치면서 귀한 소와 말을 집단 폐사시킬 위험성이 높은 비효율적인 도구였다.
그리고 조선 지배층 일각에서 제기된 수레 보급 제한 움직임은 신분제 질서하에서 고위 관료들이 권위를 나타내는 용도로 탑승하던 이동용 수레를 아래 신분들이 타고다니지 못하게 하자는 논의였지 운송수단으로서의 수레를 제한하자는 주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일부 학술논문들조차 이를 구분하지 못해 오류를 퍼뜨리는데 한몫 하고 있다.
게다가 농민들이 흔히 쓰던 소달구지나 당상관들이 종2품 이상 당상관들이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타고다녔던 초헌 등이 모두 수레의 한 종류인데 수레 사용으로 조선을 비난하는 의견들은 대체 어떤 수레를 말하는 것인지 범주도 제대로 좁히지 않은채 무작정 수레를 안썼다며 맹목적인 비난을 하고 있다.
만주와 한반도가 말이 귀하게 된 건 후대에 이르러 나타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적어도 고려까지만 해도... 말은 꽤나 많은 곳에서 사육이 되었고요...
기병을 양성하거나 물자를 날라야 하니까요...
조선초에 명나라의 견제로 말의 사육은 제주도를 제외하고 크게 위축된 것으로 보입니다..
태종때 사신으로 온 명나라 환관이 매년 조공품으로 말을 보내라고 한 걸 보면...
기병의 양성을 매우 견제했던 걸로 보입니다...
소도 몽골처럼 사람 인구만큼 키우지는 못했겠지만...
즉, 상대적으로 적을 수는 있어도 숫적으로 귀한 건 아니었습니다...
거의 대부분 농우로 쓰였고.. 농민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본이었기 때문이지 숫자가 적진 않았죠..
1942년 조선총독부 기록을 보면 당시 전국의 소 사육두수는 1,740만두였습니다...
연간 도축수는 318,000두였고요...
조선시대로 거슬러 추정해도 1천만두 근처는 있었을 거란 얘기죠...
고려시대 부터 이미 수로와 강을 이용하여 배로 물류를 수송하는것이 널리 쓰이기 시작해서
조선도 다를바 없다고 알고 있어요.
환경이 사회와 사람을 바꾼다고 지형적으로 굳이 수로로 이미 물류를 옛부터 이용했었는데.
여러 토착 세력의 반대를 무릎쓰면서 예산 까지 무리하게 사용하면서 가도를 개척 했을까 싶네요.
도로이야기하고 공군기지이야기는 다른 상황일꺼라 생각되지만 님비라는 단어가 나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도 그렇지만 여러분들 사시는 지역 근방에 공군기지가 들어선다면 어떻게 하실까.
자신의 집이고 거주지가 아파트라면 더더욱 반대할수있는 입장일것 같음.
저라도 긍정적인 입장이라고는 말못하겠씀. 쉽지않은..
그래서인지 국내 어느지역이던 공군기지가 들어서는 건 상당히 쉽지않은 문제라더군요. 엄청난 건설비용은 둘째치고 정치적인 문제가 심하다고 함.
여야와 상관없이 중공처럼 공산국가나 독재국가라면 상관없지만 투표로 정치인들을 선출하는 민주주의 국가입장에서는 쉽지않은 문제.
고대문명에서 문명의 발달과 확장이 일어날 때 가장 중요한 기물이 바퀴입니다..
수레뿐만 아니라 도르래, 물레방아 등 다 바퀴의 파생품이죠...
수레는 물류의 이동에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누르고 가장 먼저 북방의 패자로 자리잡는데 있어서 숨은 공신이 바로 수레입니다..
고구려의 귀족이나 유력가문들은 부경이라는 창고를 소유하고 있었죠...
마치 초기의 로마처럼 고구려도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란과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은 근본적으로 사농공상이라 해서 상업을 천시했는데... 이는 유교적 이념이라기 보다는
전조의 고려에서 상업세력이 권신들과 결탁하거나 권신들이 직접 상단을 운영하기도 했죠...
그렇게 축적한 부와 사병을 양성해서 국정을 농단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수레를 이용한 대규모 상행은 자체호위가 필요한데... 내륙의 물류가 발달하면 사병을 혁파하기가 어렵죠...
고려조의 수많은 민란과 반란을 경험한 사대부들은 이를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상업세력을 억압하고 상업을 천시하게 되니 대규모 상행 또한 어렵고 그에 대한 고육책으로 물류를 대체하게 된 것
이 바로 수운입니다...
도로이야기에 님비는 좀 너무 현대적인 해석이신 것 같고요...
고래로 북방민족의 대규모 침입(몽골, 거란, 여진, 후금 등)시에 호되게 당했던 기억때문인지...
군사적인 이유를 들어 도로의 정비를 꺼려했습니다...
근세까지도 기병의 존재는 어느 나라에나 두려운 전력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이면에 국고를 투자할 생각도 없었을 뿐더러 도로의 정비는 또한 상업을 천시하는 정책에 반하기도
합니다..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최근에 와서 좀 반론이 생기기도 하죠...
정도전의 고민 중 가장 큰 화두는 권력의 분산과 견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 군권의 단일화와 토지소유권의 일원화였습니다..
고려의 대토지겸병은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당시로는 이걸 억제한 것만 해도 엄청난 개혁이었죠...
물론, 왕토사상은 허울이었을 뿐 토지의 사유는 실제로 만연해 있었습니다...
모든 게 다 연결됩니다..
토지소유관계와 상업의 억제, 사병의 혁파, 문치주의 등등
제가 생각하는 가장 아쉬운 점은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인데...
표면적으로는 완성형인 듯 보이나...(물론 국초에는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정착함..)
유향소제도나 향리들에 의한 실무 장악은 파견된 지방관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거나
같이 부패하는 폐단을 낳게 합니다...
차라리 중국처럼 번이나 제후로 분권을 허용했으면 어땟을까 생각해 보지만...
이것도 왕조가 오래 유지되는 데에는 회의적이기도 하지요...
성리학이 문제가 아니라... 성리학을 공부한 사대부들이 이상향으로 삼은게
주나라입니다.. 주나라의 국정운영체계와 전 전설같은 요순시대를 흠모하는 게 문제였죠...
플라톤의 철인정치론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후대에 실학자들에 의해 현실을 타파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국가를 너무 관념적으로만 운영하려는 경향이 문제였던 거로 저는 봅니다..
도로는 군사적인 문제가 제일 크죠.. 왜구가 나타나도 단시간에 한양까지 올라올수 있다고 해서 반대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예산 문제도 많았다고 합니다.
조선은 진짜 세금 적게 걷는 나라였습니다.
대신 몸으로 때우는 부역을 실시 했는데.
농번기에 부역을 실시하기도 힘들고.. 부역 동원 될때 먹을 걸 동원되는 사람이 가져와야 한다고 할 정도였죠.. 이러니 부역 동원 하는 것도 백성들 한테 부담이 커 하기 힘들 었죠.
부역을 하자니 백성들 부담이 크고 임금주고 일꾼 구하자니 예산이 없고.. 이런식.
참고로 조선 후기 백성들이 세금으로 힘들었다는 기록이 많은데.
이건 세금이 많아서가 아니라 도둑놈이 많아서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