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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6-21 20:20
[잡담] 수레
 글쓴이 : 아그립파
조회 : 1,730  


180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땅에 수레가 다닐 도로가 많이 없었다는군요.

지주인 양반들이 도로를 만들면 자기들 농지가 그만큼 줄어드니까 극렬반대했나봐요.

한심한 생각이 들다가도,
아까 공군기지 얘기하면서 님비 얘기 읽다보니..

만약 저도 제 집 근처에 공군기지 생긴다면 머리띠 두르는 건 현실이겠구나,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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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wave 21-06-21 20:56
   
한반도는 산악지형이 많아서 수레가 널리 쓰일만한 환경이 아니었다는 점도 문제였습니다.
지금도 서울 시내만 봐도 언덕이 엄청 많습니다.

중국은 평야지대가 많았죠. 특히 북경은 더욱 더 그렇고요.
수레가 널리 쓰여서 오늘날 철도의 선조(?)로 볼 수 있을 정도인 수레용 레일(?)을 깔아놓을 수 있을 정도였고요.

한반도는 현대에 와서야 땅을 평탄하게 만들고 터널을 만들어서 요즘의 기준으로 보면 왜 수레를 안 쓴건가 싶지만요.
     
아그립파 21-06-21 21:12
   
이것도 역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archwave 21-06-21 21:01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등장하였으며, 완전한 수레 실물 유물은 현존하지 않으나 경주 계림로 수레모양 토기 등의 수레모양 토기나 실제 수레의 부품 유물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있는 고대 도로 유적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충북 옥천군에서는 신라 서라벌과 옥천을 잇는 도로 유적이 2018년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다 조선시대에는 큰 강과 연안 항로를 이용한 수운이 국가 물류운송의 중핵이었고 수레는 부차적인 역할에 머물렀는데 이를 감안하지 않은 실학자들의 호도하고 신분제하에서 고하를 나타내는 수레와 운송수단으로서의 수레를 구분하지 못해 조선 정부가 의도적으로 수레의 사용과 보급을 막았다는 낭설을 퍼뜨리는 경우가 많다.

좁은 땅에 산과 하천이 너무 많아 전근대 조선의 비포장도로에선 수레는 운송량은 수운에 훨씬 못미치면서 귀한 소와 말을 집단 폐사시킬 위험성이 높은 비효율적인 도구였다.

그리고 조선 지배층 일각에서 제기된 수레 보급 제한 움직임은 신분제 질서하에서 고위 관료들이 권위를 나타내는 용도로 탑승하던 이동용 수레를 아래 신분들이 타고다니지 못하게 하자는 논의였지 운송수단으로서의 수레를 제한하자는 주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일부 학술논문들조차 이를 구분하지 못해 오류를 퍼뜨리는데 한몫 하고 있다.

게다가 농민들이 흔히 쓰던 소달구지나 당상관들이 종2품 이상 당상관들이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타고다녔던 초헌 등이 모두 수레의 한 종류인데 수레 사용으로 조선을 비난하는 의견들은 대체 어떤 수레를 말하는 것인지 범주도 제대로 좁히지 않은채 무작정 수레를 안썼다며 맹목적인 비난을 하고 있다.
떡국 21-06-21 21:06
   
조선시대에 터널 굴착기술이 있었으면...
전국으로 사통팔달 도로망이 쫙 깔렸겠죠. ㅋ
문경세재 힘들게 넘어가지 말고 지하로 터널이 빵 뚫렸으면 평평한 도로로 한 방에 수레로 갔을테니까요.
     
아그립파 21-06-21 21:14
   
이탈리아에 가서 보았던 아피아가도나 그밖에 수도시설들 보니 이게 과연 2천년 전 기술인가 싶더군요.

우리도 참 재주많은 민족이지만, 당시 로마인들은 우리 상상을 뛰어넘는 인간들이었던듯ㅋ
          
국산아몬드 21-06-21 21:38
   
땅파면 물이 나오는 한반도라 산위에서 수km까지 물을 끌어들이는 수도교 같은것은 필요 없었죠
          
안알려줌 21-06-21 22:15
   
이탈리아

자연적 환경 건조기후에 돌도 가공이 쉽다고

과학적 토대가 콘크리트와 수학등 여러가지 혜택이

위치적 사회적 환경이 전쟁으로 무역으로 큰 국가다운


그런 로마인들도 이집트 건축에 놀랐다고
               
아그립파 21-06-21 22:36
   
이집트는 너무 훼손이 많이 되서;;
archwave 21-06-21 21:13
   
그 전에도 그렇지만, 조선시대는 연안과 강을 이용한 물류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괜히 한선(평저선) 형태로 고착된 것이 아님. 오죽하면 거북선 판옥선 같은 전투용 함선들도 모조리 평저선이었죠.

수도인 한양은 한강을 이용한 물류에 절대적으로 의지했고요.
     
아그립파 21-06-21 21:16
   
평저선하니 또 거북선 떠오르고 거북선하니 영화'명량'  떠오르네요ㅋㅋ
우린 왜이렇게 중세전쟁물 영화 찍는건 젬병일까요
지누짱 21-06-21 21:15
   
한반돈 말이나 소가 귀한 곳이었지요
그래서 말이나 소대신 사람이 짊어져지요
왜냐면 당시 말이나 소를 먹일 초지가 부족해서요
     
아그립파 21-06-21 21:17
   
게다가 꼭 끓인 풀만 먹었다는 사료가 있는걸 보면 입맛도 보통 까다로운 것들이 아닌듯요ㅋㅋ
          
지누짱 21-06-21 21:22
   
맞습니다
          
archwave 21-06-21 21:28
   
양배추가 소화하는데 드는 칼로리가 양배추의 칼로리보다 더 높아서
마이너스 칼로리라는 말을 듣죠.

아무리 소가 초식에 특화된 소화기관을 가졌다 할지라도 풀을 직접 먹어서는 충분한 영양 섭취를 하지 못 합니다.

소가 여물(쇠죽)을 먹으면 훨씬 더 효율적인 영양 섭취를 해서 사람이 풀을 채취해서 여물을 끓여서 바치느라 드는 수고를 상쇄하고 남을 정도로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었죠.

소가 입맛이 까다로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그립파 21-06-21 21:36
   
아하!!!
님의 해박함에 놀라는 소리였습니다~ㅋ
               
archwave 21-06-21 22:23
   
요즘도 한우 키울 때 여물을 주는 경우가 있는 모양입니다.

서양애들이 연구해서 만들어내는 사료보다 여물을 주는 것이 더 나은 육질을 내서 더 비싸게 팔 수 있기에 비용이 더 드는 여물을 주는 것이겠죠.

이게 일종의 복고풍인 것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사실이죠.
                    
아그립파 21-06-21 22:35
   
소 사료는 글래스페드,그레인페드 요렇게 두종류만 알았는데 요즘도 여물 먹이는 곳이 있군요.

마블링은 소중하긴 하죠ㅎㅎ
                    
토막 21-06-22 07:22
   
곡물 사료를 주는것에 대한 문제점 때문도 있죠.

소를 가장 빠르게 키우는 방법은 곡물 사료를 주는거죠 대표적으로 옥수수.
그런데 이렇게 키운소는 대부분 비만소로 사람몸에 그닥 좋지 않습니다.

방목으로 키우면 좋긴한데.. 말씀하신대로 그냥 풀만 먹이면 빨리 크지를 않죠.

풀에서 나오는 칼로리는 섬유질 입니다.
하지만 이 섬유질을 소화하는건 아주 어렵고. 그래서 푹 삶아 주면 소화하기가 좀 편하고.
그래서 조금 빨리 자라죠.

참고로 마블링 많은 고기를 고급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나 고급이죠.. 뭐 일본이 더 좋아 하긴 하지만.

서양애들이 더 나은 육질 이라고 말하는건 마블링 많은 비만 소가 아니라.
방목으로 풀먹고 자란 근육질 소죠.

좀 질기긴 하지만 소고기는 원래 질긴거다 생각해서 별로 상관 하지 않는답니다.

유럽쪽에서 제일 고급으로 생각하는 소는 5-6년 정도 방목으로 키운 소라고 합니다.
너무 어린소는 고기맛이 제대로 안 올라 온다고 합니다.
                         
아그립파 21-06-22 10:15
   
일리있는 얘기네요.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마블링은 확실히 한국이 가장 좋아하죠.
아무래도 나라마다 고기를 굽는 정도의 차이때문에 생기는 선호도 차이인 것 같아요.

우리는 같은 동양권인 일본에 비해서도 확실히 웰던을 좋아하다보니..
지방층이 제대로 녹아서 풍미가 확 사는 맛이 있죠^^

그래서 가난하던 학창시절에 썼던 치트키가 뭐냐면 버터로 고기를 구우면 아무리 지방이 적은 싸구려 고기라도 한우급으로 풍미를 일으킬 수 있었던..ㅎㅎ

요즘은 호주산 와규가 인기인데요.
토막님이 얘기한 것처럼 6년 간 방목해서 키우다가 도축 6개월전부터 곡물사료로 바꾼다는군요.

가장 적정한 수준의 마블링이 생성된다나 뭐라나..

서양애들도 점점 마블링 맛을 알아가는 걸 보니 이젠 고기먹는 입맛도 점차 글로벌해지는듯요ㅋㅋ
     
사커좀비 21-06-22 13:17
   
만주와 한반도가 말이 귀하게 된 건 후대에 이르러 나타난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적어도 고려까지만 해도... 말은 꽤나 많은 곳에서 사육이 되었고요...
기병을 양성하거나 물자를 날라야 하니까요...
조선초에 명나라의 견제로 말의 사육은 제주도를 제외하고 크게 위축된 것으로 보입니다..
태종때 사신으로 온 명나라 환관이 매년 조공품으로 말을 보내라고 한 걸 보면...
기병의 양성을 매우 견제했던 걸로 보입니다...

소도 몽골처럼 사람 인구만큼 키우지는 못했겠지만...
즉, 상대적으로 적을 수는 있어도 숫적으로 귀한 건 아니었습니다...
거의 대부분 농우로 쓰였고.. 농민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본이었기 때문이지 숫자가 적진 않았죠..
1942년 조선총독부 기록을 보면 당시 전국의 소 사육두수는 1,740만두였습니다...
연간 도축수는 318,000두였고요...
조선시대로 거슬러 추정해도 1천만두 근처는 있었을 거란 얘기죠...
     
구름위하늘 21-06-22 15:04
   
한반도에서 말과 소가 귀한 것은 맞지만
그 의미가 비싸다는 것이지 숫자가 적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지금과는 달리 한반도는 녹지가 많은 땅이었습니다.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말과 조선초까지도 말을 탄 기병은 흔한 병종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규모는 줄었지만 기병 세력을 만단위 수준으로는 꾸준히 유지했고요.
전쟁망치 21-06-21 22:46
   
고려시대 부터 이미 수로와 강을 이용하여 배로 물류를 수송하는것이 널리 쓰이기 시작해서
조선도 다를바 없다고 알고 있어요.
환경이 사회와 사람을 바꾼다고 지형적으로 굳이 수로로 이미 물류를 옛부터 이용했었는데.
여러 토착 세력의 반대를 무릎쓰면서 예산 까지 무리하게 사용하면서 가도를 개척 했을까 싶네요.
     
아그립파 21-06-22 10:18
   
학창시절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를 즐겨 읽다보니 이탈리아에 매료되어 유럽 중 가장 많이 다녀온 곳이 이탈리아였는데..
아무래도 비교가 되긴 하더라구요.

국토면적도 비슷하고,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인 것도 비슷한데
얘네는 뭔가 참..풍성하달까?
나그네x 21-06-22 01:34
   
도로이야기하고 공군기지이야기는 다른 상황일꺼라 생각되지만 님비라는 단어가 나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도 그렇지만 여러분들 사시는 지역 근방에 공군기지가 들어선다면 어떻게 하실까.
자신의 집이고 거주지가 아파트라면 더더욱 반대할수있는 입장일것 같음.
저라도 긍정적인 입장이라고는 말못하겠씀. 쉽지않은..

그래서인지 국내 어느지역이던 공군기지가 들어서는 건 상당히 쉽지않은 문제라더군요. 엄청난 건설비용은 둘째치고 정치적인 문제가 심하다고 함.
여야와 상관없이 중공처럼 공산국가나 독재국가라면 상관없지만 투표로 정치인들을 선출하는 민주주의 국가입장에서는 쉽지않은 문제.
     
아그립파 21-06-22 10:19
   
맞아요. 공감합니다.진심..
사커좀비 21-06-22 10:28
   
고대문명에서 문명의 발달과 확장이 일어날 때 가장 중요한 기물이 바퀴입니다..
수레뿐만 아니라 도르래, 물레방아 등 다 바퀴의 파생품이죠...
수레는 물류의 이동에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누르고 가장 먼저 북방의 패자로 자리잡는데 있어서 숨은 공신이 바로 수레입니다..
고구려의 귀족이나 유력가문들은 부경이라는 창고를 소유하고 있었죠...
마치 초기의 로마처럼 고구려도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란과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은 근본적으로 사농공상이라 해서 상업을 천시했는데... 이는 유교적 이념이라기 보다는
전조의 고려에서 상업세력이 권신들과 결탁하거나 권신들이 직접 상단을 운영하기도 했죠...
그렇게 축적한 부와 사병을 양성해서 국정을 농단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수레를 이용한 대규모 상행은 자체호위가 필요한데... 내륙의 물류가 발달하면 사병을 혁파하기가 어렵죠...
고려조의 수많은 민란과 반란을 경험한 사대부들은 이를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상업세력을 억압하고 상업을 천시하게 되니 대규모 상행 또한 어렵고 그에 대한 고육책으로 물류를 대체하게 된 것
이 바로 수운입니다...

도로이야기에 님비는 좀 너무 현대적인 해석이신 것 같고요...
고래로 북방민족의 대규모 침입(몽골, 거란, 여진, 후금 등)시에 호되게 당했던 기억때문인지...
군사적인 이유를 들어 도로의 정비를 꺼려했습니다...
근세까지도 기병의 존재는 어느 나라에나 두려운 전력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이면에 국고를 투자할 생각도 없었을 뿐더러 도로의 정비는 또한 상업을 천시하는 정책에 반하기도
합니다..
     
아그립파 21-06-22 10:32
   
아..근래에 방문했던 실학박물관에서
실학자들의 주장을 대신 전해드렸을 뿐입니다^^

도로와 관련된 역사는 저도 님과 비슷하게 알고 있어요.
조선조로 넘어오면서 상인계급에 대한 치밀한 견제.

많은 드라마에서 미화하지만
저는 정도전이 그리 좋게 보이지만은 않더군요.

우리 민족의 오백년 역사를 갉아먹은 원흉이
성리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요.
          
사커좀비 21-06-22 11:41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최근에 와서 좀 반론이 생기기도 하죠...
정도전의 고민 중 가장 큰 화두는 권력의 분산과 견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 군권의 단일화와 토지소유권의 일원화였습니다..

고려의 대토지겸병은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당시로는 이걸 억제한 것만 해도 엄청난 개혁이었죠...
물론, 왕토사상은 허울이었을 뿐 토지의 사유는 실제로 만연해 있었습니다...
모든 게 다 연결됩니다..
토지소유관계와 상업의 억제, 사병의 혁파, 문치주의 등등

제가 생각하는 가장 아쉬운 점은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인데...
표면적으로는 완성형인 듯 보이나...(물론 국초에는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정착함..)
유향소제도나 향리들에 의한 실무 장악은 파견된 지방관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거나
같이 부패하는 폐단을 낳게 합니다...
차라리 중국처럼 번이나 제후로 분권을 허용했으면 어땟을까 생각해 보지만...
이것도 왕조가 오래 유지되는 데에는 회의적이기도 하지요...

성리학이 문제가 아니라... 성리학을 공부한 사대부들이 이상향으로 삼은게
주나라입니다.. 주나라의 국정운영체계와 전 전설같은 요순시대를 흠모하는 게 문제였죠...
플라톤의 철인정치론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후대에 실학자들에 의해 현실을 타파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국가를 너무 관념적으로만 운영하려는 경향이 문제였던 거로 저는 봅니다..
               
아그립파 21-06-22 11:53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인용하자면,
'주인의식'을 가진 봉건군주가 오히려 선정을 베풀 가능성이 높다고도 설명하죠.

조선의 중앙집권은 너무나도 시기상조였어요.
지방행정직을 임기제 파견직으로 해놓으니 임기동안 뽑아먹지 않는 넘이 병.신 취급받는..기이할 정도로 부정부패가 만연된 사회를 만들어버렸죠.
                    
수염차 21-06-22 20:49
   
조선의 유일한 업적은 세종대왕/충무공을 탄생시켯다는것 외엔 무엇도 생각할수없는 왕조라 생각됩니다

구데타로 건국한 왕조라 구데타를 두려워해 지방군벌을 철저하게 배격한것이
중앙집권으로 귀결되엇을뿐이죠

또한 양반을 제외한 계층끼리는 빈부격차를 두지말라는 허왕된 가치관으로
상공업을 배격햇죠

지방군벌을 배격햇고  강력한 군사력의 원동력인 경제력까지 제한을두어
결국 임진왜란/병자호란.....결국 동학군을 막지못해 외세를 불러들이고
합병까지 당한거라 생각합니다.....
               
토막 21-06-22 15:52
   
세조의 똥입니다.
세조의 반역 공신들 중에 일부는 중앙 정권에 남고 나머지는 지방에 내려갔는데.

그 내려간 지방에서 완전히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후 서원 문제도 이들 때문이죠.

국초엔 안정적으로 보이다가 갈수록 개판이되는게.
세조가 세종대왕께서 만들어 두신 기틀을 완전히 갈아 엎어서 그래요.

세종대왕께서 만든 제도가 너무 복잡하다며 간소화 시킨다고 갈아 엎었는데.
진짜 한치 앞도 못보고 당장만 보면서 만들어서 갈 수록 개판이 된거였죠.
     
토막 21-06-22 10:48
   
도로는 군사적인 문제가 제일 크죠.. 왜구가 나타나도 단시간에 한양까지 올라올수 있다고 해서 반대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예산 문제도 많았다고 합니다.
조선은 진짜 세금 적게 걷는 나라였습니다.
대신 몸으로 때우는 부역을 실시 했는데.
농번기에 부역을 실시하기도 힘들고.. 부역 동원 될때 먹을 걸 동원되는 사람이 가져와야 한다고 할 정도였죠.. 이러니 부역 동원 하는 것도 백성들 한테 부담이 커 하기 힘들 었죠.

부역을 하자니 백성들 부담이 크고 임금주고 일꾼 구하자니 예산이 없고.. 이런식.

참고로 조선 후기 백성들이 세금으로 힘들었다는 기록이 많은데.
이건 세금이 많아서가 아니라 도둑놈이 많아서 였습니다.
          
아그립파 21-06-22 11:05
   
세금도 세금이지만 세원 자체가 같은 시기 일본에 비해 1/3수준이었다는 게 치명적이었죠.

이 세원의 규모는 나중에 일본과 조선의 근대화속도에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냈으니까요.

게다가 은 본위제였던 중세 일본과 중국에 비해 조선은 오히려 미곡을 화폐 대용으로 썼던 것도 뼈 아픕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일본을 갈라파고스로 놀리지만
조선기의 한반도는 반도였음에도 갈라파고스였다는 게 참..
               
토막 21-06-22 15:29
   
그건 별 상관이 없죠.
인구가 많아서 들어오는 돈도 많지만 땅이 커서 쓸곳도 많기 때문에 마찬가지 입니다.

중세 유럽쪽은 나라가 더 작았죠.

게다가 일본은 중앙 집권제가 아니라 성주 중심의 봉건제 였기 때문에 전체 인구 숫자는 도로와는 큰 상관이 없어요.

그리고 가장 큰 원인은 세조죠.
조선에서 있었던 나쁜점은 전부 세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께서 심혈을 기울여 닦아 놓은 기틀을 완전히 갈아 엎은게 세조입니다.
나중에 유교의 폐단 이런것도 세조의 똥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