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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7-06 20:21
[잡담] 우리가 임진왜란을 막지 못한 이유.
 글쓴이 : 야구아제
조회 : 2,671  

1. 풍신수길이 돌아이기 때문이다.

 - 풍신수길이 일본을 통일했다지만 실제로는 그의 주군이었던 자가 다 이룬 것을 그가 갑자기 죽게 되자 정국을 잡아 합하의 자리에 올라 얻은 것으로 혼란기에 정권을 쟁취한 것에 대한 능력은 인정하겠으나 통일이 그의 손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봄.

 - 그는 무인이고 기회주의자였기 때문에 통치 철학이나 이념이 없어 쓸데 없는 '징기즈칸'을 모델로 삼아 전 세계에 선전포고를 함.

 - 실제로 그들이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선전포고를 하는 바람에 진위 여부도 판단하기 어렵게 된 상태였음.

 - 일본 자체 문화가 위에서 말하면 거역하거나 반대 의견을 달기 어려워 일본의 주요 군벌들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미친 한 인물의 발광을 막지 못함.


2. 붕당의 관념적 대립으로 왕이 실제 판단을 내리기 힘든 정치 구조.

 - 조선 사회가 사림이 득세한 이후로 관념적 가치에 빠지게 됐고, 실제로는 이권 대립을 관념으로 풀어 답이 없는 싸움을 계속하게 됨.

 - 백 수 년 만에 일본을 정찰하기 위해 통신사를 보냈으나 정사와 부사가 다른 파벌로 같은 사실에 대해 해석을 달리하여 왕이 판단을 내릴 수 없도록 함.

 - 결국 왕은 두 의견을 절충하는 수준으로 밖에 일 처리를 하지 못하게 됐고, 역대 왜구들의 침탈 행위를 조사하여 대략 1만 여 정도의 발호가 제일 클 것으로 보고 그게 맞게 대비를 함. 


3. 대마도주와 소서행장의 교란

 - 대마도주는 명목상 조선의 신하기도 해서 일본에서 위치가 매우 불안했고, 소서행장도 풍신수길의 눈밖에 났던 인물이다.

 - 이들은 풍신수길의 조선 침략과 항복 요구를 담은 외교 문서를 조작한다. 이는 자신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행동으로 결국 조선이 사태를 파악하기 힘든 상황으로 만들었다.

 - 이로 인해 조선의 붕당들은 의견을 모우지 못했고, 이가 본격적인 대비를 막았다.


4. 조선 입장에서 왜구는 잔당이고, 여진 등의 북방 민족이 주적이었다.

 - 조선은 북쪽 국경에 대한 방비를 최 일선에 두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 침략의 의미는 북방 민족의 침탈이었기 때문이다.

 - 고로 주 전략과 주 전력은 북쪽을 막는 데 집중하였고, 제승방략이 그 전략이었다.

 - 지방이나 해안선에 대한 방호는 상대적으로 부족하야 비상시 향군을 조직하여 막는 방식이었다.

 - 이러한 전략 상황 때문에 왜구를 막는 판옥선이라는 우수한 전선을 개발하였음에도 13만 왜군의 상륙을 막지 못해 임란이 발발한 것이다.

 * 이른바 선조의 졸렬은 임란 전의 그의 행동이 아닌 임란이 진행되면서의 행적을 말한다. 조선이 임란을 막지 못한 것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복합적인 문제였으며, 여러 요인에 의한 것이다.

흔히 당시 파당을 무능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나 일종의 식민사관에 근거함도 무시할 수 없다.


최근 밀게에서 흑색 토론이 짙다.

현재 국어 교과에서는 토론을 사회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대해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의사소통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토론은 찬성과 반대가 주장과 근거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말하기이다.

찬성에도 반대에도 그에 대한 합당한 근거를 든 '입론'이라는 것이 있고,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공정성, 타당성, 신뢰성을 따져 반박하는 '반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토론에서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여러 모순을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인신공격과 비약적 해석, 감정에 대한 호소 등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중국과 일본의 의사와 같으니 너희도 토왜고 짱,개다.'는 것이다.

본인들의 의견에 대한 평가는 공정성, 타당성, 신뢰성에 근거해야 함에도 비약적인 수단으로 유추를 사용하여 감정적으로 상대를 비난하기에 급급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본인의 주장의 공정성, 타당성, 신뢰성도 떨어진다는 것을 함의 한다.

즉, 논리로 승부할 수 없으므로 비약을 통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기세를 꺾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건전한 토론은 사회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효과적인 방법임을 상기해 본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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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립파 21-07-06 20:49
   
야구아제 21-07-05 12:33

호도하지 마시고 혼자 생각하지 마세요. 본인이 뇌피셜이 쩌시는데 지레 짐작하고 말 바꾸시면 대화가 안 돼요.

야구아제 21-07-05 12:43

누가 흥분했는데요? 님이 답도 못 달고 지레 짐작하고 호도하고 계시잖아요.

야구아제 21-07-05 13:12

뭔 소리인지 진짜,

이어도 치면 우리는 전쟁한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수구적 사고인지?

그리고 이어도 공격해서 중국이 얻는게 뭔지요?

앞 뒤 없는 말을 하시면서 무조건 틀렸다고 하시면 그건 아니죠.

부지 없다, 그럼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님이 말하는 그 모든 것, 해군이 말하는 '경항모'로 못 합니다.

ㅡㅡ

어제 하루 것만 잠깐 추려도 이정도예요.
님은 끝도 없는 타인에 대한 비방만 늘어놓기에 앞서 통렬한 자기반성부터 하는게 옳을 겁니다.

적어도 난 내 입 더러운 거 알고 있고 그래도 매너로 토론하는 분께는 매너로 응대합니다.

님은 님이 어떤 인간이라고 생각하길래 뻔뻔하게 이런 성토를 하는거요?^^
가당치도 않아서ㅎㅎ
     
야구아제 21-07-06 20:57
   
왜 본인이 한 말들을 다 삭제하시고 거기에 받은 말만 하시죠?

제가 님에게 들은 말 중에는

개 새끼야, 약쟁이, 토왜, 씨 발놈, 조현증, 정신병자 등이 자주 들어간 말들이었는데요?
          
아그립파 21-07-06 20:58
   
그럼 저처럼 그글들 찾아서 올리세요 공평하게^^
근데 전 님한테 정신병자 소리밖엔 안한거 같은데
누구한테 듣고서 나한테 덮어씌우는건지ㅋㅋ
               
야구아제 21-07-06 20:59
   
그림 캡쳐 댓글 어떻게 다나요?
                    
아그립파 21-07-06 21:00
   
스샷찍어서 파일 올리면 됩니다~^^
아 댓글은 안될걸요?
발제글로 올리셈 저도 지나간 글들 구경좀 히게
                         
야구아제 21-07-06 22:16
   
삭제 방지용
                         
아그립파 21-07-06 22:35
   
얼씨구?ㅋㅋㅋㅋ
대팔이 21-07-06 23:12
   
중국과 일본의 의사와 같으니 너희도 토왜고 짱,개다.'는 것이다....

예전엔 북괴의 의사와 같으니 너희는 종북빨갱이다 이랬는데...

결국 토왜 토짱 프레임 = 종북 빨갱이 프레임...
     
지누짱 21-07-07 00:22
   
헐 자기 인증???
도나201 21-07-07 00:35
   
밀게에 뜬금없는 임진왜란이야기가.......... 

뭐 게시판주제에는 그다지.  끌리지는 않지만,

이제껏 국사책의 오류적인 부분만을 나열해 놓았네요.


1. 토요토미히데요시 는 똘아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당시 토요토미히데요시에 대한 인물적인 평가는 생각보다 상당히 고평가를 지닌 인물로 묘사됩니다.
당시 유교적학문에 미쳐있던 조선시대에서 상대수장의 인물평 특히 왜나라에 대한 인물평 치고는 엄청난 인물로 묘사한 상황입니다.
우선은 일본열도를 통합했다라는 것만으로 조선정세에서 상당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기에
그 통합의 인물을 쉬이 볼리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류성룡의 징비록에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한 것이고,

이이 율곡이이가 먼저 일본의 통합적인 상황을 인지하고서 이미 십만양병설을 주장할 만큼  일본의 정세에 상당한 우려를 하고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2. 붕당의 대립 이 임란 초기의 패퇴의 이유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일본의 군사적규모를 너무 얕보았다고 할까.
고려시대에  왜구들이 한강을 타고서 개성까지 진입한 상황이 있을정도로 왜구의 기세는 대단한 상황이였습니다.
한강 하구까지 200여척을 몰고 왔다라는 기록이 있을정도로

전국각지에 수탈을 목적으로 침입한 사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방비책이 적은 것이였습니다.
즉,  초기  부산성을 버리고서  동래성에 집결한것은
시간벌기였기다라는 것을 잘알려진 상황이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전 왜구의 수탈방어만을 생각한 대응책이였다라는 게 가장 피해가 컷던 이유입니다.
가끔 역사를 이야기할때 왜..  일본의 침략을 초기에 대응을 못했는가 하는 문제는

즉,  한 한두달 뒤에  전부 본국으로 철수할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라는 것입니다.

당시.  두붕당으로 나뉘어서 논란의 거리를 내세운것은 일본이 쳐들어온다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상황이고,
문제는  명을 치러 가니  길을 내어달라는 문구를  허풍을 보는 견해와
실제 조선을 침략하러 대군을 몰고서 침략하겠다라는 견해 로 나뉘였다라는게 가장 정확한 이유입니다.

당시  선조는  왜구가 아무리 통일을 이루고 군세가 좋다고 한들  조선을 한반도를 침략하고서 점령주둔을 하지 못할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들이 보고싶은 것만 보고있었고,  연산군이후에 은본주의를 폐쇄하면서 이뤄진.
경제적빈곤으로 군사체가 무리였다라는 게 정설입니다.

즉,  돈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가..... 된통당했다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식민사관의 붕당정치의 폐해만을 생각하게끔 한  식민역사관중 하나입니다.
\
당시 붕당정치보다는    두파벌 동시에 왜구가 쳐들어온다라는 것을 똑같이 인식하고서..
한쪽은 군사적으로 전란  전면전규모로 상정해서.....방어해야 한다라는 파였고,
한쪽은  왜구는 점령을 하지 못하니 한두달후면 다시 본국으로 철수 할것이라고 생각한 파벌 이였다라는 것이죠.

결국 전면전 과 본국철수 의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는게 선조엿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황이 되게 되었죠.

전면전이라고 상정했으면.  두파벌의 모든 군사체의 역량을 집중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은 바로 후금........청의 등장이였죠.

당시 북쪽의 만주족을 위시로 엄청난 북쪽의 정세가 생각보다는 심각했다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북쪽에 군사력을 더배치하자는 주장이 강했다고 볼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이당시 함경도의 군세는 조선시대의 주력의 7할이 집중배치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나머지 3할은 왜구를 막는데 사용했고,

실제 주력부대는 대부분 북쪽에 있었기에.
당시 이순신을 비롯한 원균 등등 대부분의 명장들은 북쪽에서 군생활을 한 당시였고,

이중 일부분을 다시 남쪽에 배치하면서 기존병력을 증강하도록 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당시 엄청나게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상황이였고,
원균은 기존 병력에 훈련의 강도로 높이면서
왜구 병력  약  수천군세를 상정한 예상병력으로 막기를 한것입니다.

이때 둘의 판단이 갈린것이죠.

그러면서 왜는 전면전을 걸어오면서  모든 병력의 판단이 틀리게 되면서 급속한 퇴각을 결정하게 됩니다.
가끔 .. 미스테리로 나오는 전략중에..
신립의 탄금대전투를 이야기하는데.

이건 개인적을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병력수의 열세를 들어서 지원군과의 합류를 생각한듯이 보여집니다.
무슨 병력이냐면.......
용인전투..... 민관군의  의병집단인 10만병력과 합류하기 위해서 탄금대로 후퇴하다가.
뒤를 잡힌것 아닌가 보여집니다.
이건 뭐 순전히 제생각이지만,

결국 일본의 군세가 너무 빠르게 올라왔다라는게..... 정확한 패전의 원인이겠죠.

용인전투도.... 일본의 병력이 얼마되지 않은 상황에서 7천병력이 10만병력을 기마대로 쳐부셨다라는 것을 봐도,
7천병력의 기마대의 이동속도가 굉장히 빨랏다라는게 ..

결국.  이  지원군과 합류하기 위해서 후퇴한것은 아닌가 보여집니다.


3.  고시시유키나가 ..........대마교주의 이간책.
당시 대마교주의 입장을 잘봐야 하는 상황입니다.

일본열도로 들어가는 길목의 대마교주는 당시 조선과 일본과의 위치를 잘봐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대마교주는  한국도 일본도 아닌  두나라간의 중간적 독립체로 봐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대마도는 두나라 어느곳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적인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일본이 통합되기전에는 대마교주는 두나라사이에서 독립적인 교역 으로 엄청난 이득을 얻고 있었습니다.
특히 쌀, 과 더불어서 도자기  불경 등.  엄청난 이득을 취하는 입장이였는데....

거기다 중앙정부에 세금도 내지 않던 곳이였습니다.
왜구 해적의 소굴지의 항구개방으로 인한 세금까지 받아먹고서.... 살던 곳이 대마도 였습니다.

즉,  일종의 관세지구 같은 경제특구라고 보는게 더정확할겁니다.
그런 대마도에서.......  일본이 통합되고서 .    통합된 해적 영주들을 통합해서 대마도로 가서
위압을 가한것입니다.  그로인해서 대마교주는 세금을 내게 되고
엄청난 세수에.. 감당못할 지경까지 몰린게 대마교주였습니다.

이때 타계책으로 한게 바로 조선과의 교역이였는데.  조선과의 교역마저도 끊기면서
대마교주로서는  바로 일본에 붙게 됩니다.

그리고 대마교주의 잔머리에 이리저리 놀아난것은 조선이였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일본본토의 정보를 얻을수 있는 창구는 대마도뿐이였고,
너무나 제한적인 정보에  오판하게 됩니다.

즉, 대마교주의 배신이라고 보면 됩니다.  뭐 정확히 말하면  배신은 우리가 먼저했을지도 모르지만,
우선적으로 일본과의 교역을 중지한것은 당시 일본정세가 혼난의 시대였기에 아마도 경제적봉쇄책을 쓴것으로 보여집니다만, ..    그후 대마교주는 중간교역자위치에서  개밥의 도토리신세가 된상황에서
토요토미히데요시는 바로 해적영주를 보내서  대마교주의 편입을 강압했죠.

그후 대마교주는 이리저리 세수에 압박을 받다가.  조선과의 교역재개를 목표로 둘사이에서 엄청난 줄타기를 합니다.    서로간에 정보를 주면서 대마교주의 장난질때문에... 결국 조선은 오판을 하게 됩니다.

중간에 조선통신사를 들여오면서 둘간의 이간질은 더욱이 부추긴것은 바로 대마교주였습니다.
결국 주판알 튕기기에.
조선을 침략하는것이 대마교주로서는 오히려 이득이라고 본것입니다.

그리고 조선 선봉장이되어서  너무나 방비책을 왜구 수천명을 생각하면서 방비한 조선으로서
전면전 병력과  수성공략에 익숙한 병력들로 구성된 전면전으로 들어오니. 너무쉽게 함락이 되면서.
대마교주의 마음이 확 바꿔버립니다.
이거 잘하면 조선을 먹을수 있겠다로 바뀌었겠죠.

그이전까지 돈만을 생각하던 고니시 유키나가 가  전쟁으로 이길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가지면서 모든 정황은 확 바꿔버립니다. 

그이전까지  고니시 유키나가 와 긴밀히 접촉하면서 계속해서 정황을 탐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의 세금압박  이 장난아니라는 것도 이미 파악된 상황이였고,

조선으로서는 고시시유카나가를 대마교주로서도 믿지 못하게 된 상황이였죠.
결국 조선의 정보력이 대마도에 한정되면서 벌어진 참사로 밖에 볼수 없습니다.
     
야구아제 21-07-07 02:32
   
1. 풍신수길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는 일개 무장에 지나지 않다, 저는 전두환 같은 인물에 비유하고 싶네요. 막하에서 전쟁이나 전투에서는 유능할지 모르나 한 나라의 지도자로는 능력이 상당히 부족한 인물이라 보며, 그 결과가 조선 침략이라는 결정을 내렸다고 봅니다.

2. 저는 당파의 대립이 임금으로 하여금 한 편의 선택이 아닌 중재안만 선택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 결과 왜구에 대한 대비에 있어 1만 정도의 발호에 그칠 것이라고 결론 짓고 대응했다고 윗글에 있습니다.

다만 선생님은 같은 결론에 대해 붕당의 대립 때문은 아니라고 보신다는 점이 차이겠네요.

3. 이 내용도 결론은 제가 말한 부분과 같지 않나 싶습니다. 조선은 이 두 사람 때문에 정보에 교란이 생겨 제대로 된 풍신수길의 의도를 짚을 수 없었다고 말 했습니다.
     
과부 21-07-07 05:51
   
그나마 발제자의 모자람에 비해 객관적으로 잘 보셨네요.
발제자 글에 대응하지는 마셔요.
보니까 대웅할 가치도 없던데...
대체로 잘 쓰셨지만 수정해야 할 부분도 많은데 글을 길게 쓰는 걸 원치 않지만 몇개만 지적하자면
이율곡 십만양병설은 1583년 병조판서하실때 주장했다고 하는건데 그 당시는 오다 노부나가가 1582년에 죽고 토요토미가 막 정권을 잡을 때라 일본을 겨냥한거라는 님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율곡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정확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율곡전서에도 없는 이런 말이 나오는건  이율곡의 제자 이정구가 스승의 아무런 근거도 없는 說을 행장으로 구성하여 비문에 새겼을 뿐인데 그 당시 정부재정으로는 정규군 만명유지도 어려웠다고 하니 사학자들이 인정을 안하고 있는거구요.
그 외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보낼때 이미 왜군의 침략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조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을 5계급 승진시켜 보내서 전쟁에 대비하게 했다고 하고 한편으로 남쪽에 계속 전쟁에 대비해서 준비를 하도록 독촉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 전쟁준비한건 이순신장군밖에 없었다는게.
결론적으로 조선의 나태함과 왜군을 그저 해적쯤으로 생각하는 정보력 부족이 온 나라를 치욕으로 물든인거로 봅니다.
더 추가할게 많은데 귀쟎아서 그만....
첨언하면 이순신장군 5계급 승진은 현대로 치면 소령에서 별3개 중장으로 갑자기 승진시켜 준건데 이거 하나는 선조의 업적으로.....
https://www.fmkorea.com/3651661628
          
야구아제 21-07-07 06:30
   
"그나마 발제자의 모자람에 비해 객관적으로 잘 보셨네요.
발제자 글에 대응하지는 마셔요.
보니까 대웅할 가치도 없던데..."

좋은 글에 정말 필요 없는 말을 다셨네요, 이왕 그렇게 보셨다면 따박 따박 반박이라도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러셨다면 정말 언행일치 하시는 분이 되셨을 것을요. 사족이 글을 버리네요.
천추옹 21-07-07 06:23
   
원균때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