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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8-07 15:12
[잡담] 일본도의 현실에 대해서
 글쓴이 : yj12
조회 : 2,661  

흔히들 국내에서는 일본도가 쉽게 부러지지 일수였다니 조선 환도보다도 구리다니 이런식의 소문들이 퍼져 있는데 정말 그럴까?

그럼 실제 일본도가 어느 정도 였는지 팩트체크를 해보도록 하자.



호조가 아뢰기를, "향장검(鄕長劍) 16병(柄)과 향단검(鄕短劍) 8병은 정축년(1637)의 예(例)대로 모두 왜도(倭刀)로 바꾸어 지급해 달라고 하기에 여러 칙사의 차비 당상 역관들로 하여금 거듭 설명하게 하였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정칙이 곧바로 응판색리(應辦色吏)를 불러 말을 전하기를, ‘앞으로 예단의 환도는 모두 왜도를 쓰는 것으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고 영원히 등록(謄錄)으로 남기십시오.’라고 하면서 몹시 급히 들여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간의 사세로 볼 때 거절하기 어려울 듯하니, 왜도 가운데 보통의 품질로 가려서 바꾸어 지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승정원 일기)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25_10A_16A_00230





"신들이 인사하고 나온 뒤에 정사(鄭使)가 이형장을 시켜 신들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를, ‘예전에 보낸 환도(環刀)의 견양은 일본에서 제조하기를 도모할 수 없다면 도로 사행 편에 부쳐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에 사은하는 사행을 다시 보내되 그 견양대로 귀국에서 두 자루를 정밀하게 만들고 말을 잘 만들어 보내기를, 「그 견양을 지금까지 머물러 두었던 것은 반드시 어떻게든 왜국에 시도해 보려는 것이었는데, 어찌할 방도가 없어 부득이 본국에서 만들어 보냅니다. 하지만 품제(品制)가 좋지 못하여 매우 황공합니다.」라고 하십시오.’ 하였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이대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승정원일기)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27_01A_23A_00130



한국내에서 일본도 보다 좋고 단단하다고 알려진 환도는 현실은 당시 청나라도 조선이 자기들이 만든 환도 바치자 조선의 구린 환도를 전부다 일본도로 바꾸라고 퇴짜놓고 또 일본에서 만든 일본도를 못 바쳐서 굳이 조선의 구린 환도 바치자 조선측에서 어떻게든 칼을 바치기 위해서 일본과 시도해 볼려고 했는데 그럴 방도가 없어서 어쩔수 없이  품질이 좋지 못한 조선 환도 바치니 죄송하다고 조선 측에서 사과까지 함 .



사실 조선과 중국측에서 일본도가 당시 동아사아에서 최강이라고 호평한 기록들은 이 기록들 말고도 굉장히 많음.



 

의령(宜寧)에 거주하는 선군(船軍) 심을(沈乙)이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서 칼 만드는 법을 배워 칼 한 자루를 만들어 올리니, 일본 칼과 다름이 없으매, 명하여 군역(軍役)을 면제시키고 옷 한 벌과 쌀·콩 아울러 10석을 하사하였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dataId=ITKC_JT_D0_A12_06A_01A_00060
(세종실록의 기록)



"우리 나라 공인(工人)이 제조한 칼은 저들의 잘 단련(鍛鍊)된 것과 같지 못하니, 저들로 하여금 시험적으로 주조(鑄造)하게 하여 만약 보통 기구(器具)보다 특이하게 된다면 작은 관직을 제수하고 그들이 잇달아 왕래하도록 허가하여 우리 공인(工人)들로 하여금 전습(傳習)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또 예조(禮曹)에 물으니, 예조에서 말하기를, "시험하여 만들도록 하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자, 전교(傳敎)하기를, "갑오년의 예(例)에 의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칼을 만들게 하라."

https://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dataId=ITKC_JT_I0_A13_09A_24A_00030
(성종실록의 기록)


"군기시(軍器寺)에 간직한 왜도(倭刀)는 아무리 하품(下品)이더라도 몹시 날카로우니(甚銳利) 진실로 군국(軍國)의 중한 기구인데 가볍게 화매(和賣)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성종실록의 기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dataId=ITKC_JT_I0_A18_05A_15A_00020


신(臣)은 왜의 땅에 와 있은 지 3년 동안 왜놈들이 날마다 군기와 창검을 수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후에 항복해 온 왜인 가운데는 반드시 칼을 알아보고, 칼을 만들고, 칼을 갈 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니, 충신(忠信)으로 대해 주고 녹봉을 후히 주어 날마다 달구어 만들어 내게 하고, 부산에서 만약 전일과 같이 서로 무역하게 될 경우에는 칼을 잘 알아보는 통역을 시켜 귀중한 물품을 많이 싣고 가서 사 들여오게 하여 창졸(倉卒)간의 사용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간양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80A_0010_010_0020 (** 1596년 1월 1일의 바로 앞에 한 장으로 다섯 줄에 걸쳐 적혀 있는 글이다.)


도양장(고흥군 도양면)의 농사일에 부리는 소가 7 마리인데, 보성 림정로(臨廷老) 1 마리, 박사명(朴士明) 1 마리를 바치지 않았다. 정명열(丁鳴悅)은 바로 길다란 서화첩(長帖)을 받아 갔다. 이는 정 경달(丁景達)의 아들이다. 갑사 송한(宋漢). 1월 3일에 배 위에서 이번에는 환도 4 자루, 왜놈칼 2 자루를 만 들었다. 아들 회가 가지고 가던 중에(이 뒤에 분실)

(난중일기)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1258&Lang=%ED%95%9C%EA%B8%80&Page=5&View=Text

왜경(倭京)에 머물렀다. 군기(軍器)로 소용되는 장검(長劍) 1백 자루를 샀다.
일본에는 다른 나라 사람에게 병기(兵器)를 몰래 파는 것에 대한 금령이 있었다.
평조신(平調信)이 생시에 가강에게 아뢰기를, “조선이 조총과 환도(環刀) 등의 물품을 사고자 하니, 허락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하니,
가강이 말하기를, “싸움을 당하면 싸울 것이지, 어찌 병기 없는 나라와 그 승부를 겨뤄서야 되겠느냐? 하물며 이웃 나라가 사고자 한다면 어떻게 금지 하겠는가?”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이번에 사는 병기는 조금도 금지함이 없어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매매하였던 것이다.
(해사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81A_0020_020_0080

청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에 관한 일을 맡은 자가 일찍이 일본의 보검을 구하므로, 민간에서 찾아 얻었더니 매우 좋은 칼이 있었다. 공이 이 칼을 받아 감추고, 낭관들을 시켜 다시 다른 칼을 구하게 하였더니, 다시 칼 한 자루를 구하여 올렸다. 공이 말하기를, "비록 처음 칼만을 못하지만 또한 쓸 만하다." 하고, 그것을 청장에게 주었다. 얼마 뒤에 청국 황제가 그 장수의 칼을 보고 다시 구하였는데, 공이 즉시 감추어 두었던 것을 내어주며 낭관에게 말하기를, "그때 내가 이미 이럴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하니, 듣는 자가 탄복하였다.

(연려실기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00A_0300_010_0020


"일본도(日本刀)는 크고 작고, 길고 짧은 것이 일정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장도(長刀) 하나를 소유하는데 그 칼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칼(小刀)을 꽂아두어 잡무에 쓰기 편하도록 한다. 또 하나 자도(刺刀)로 길이가 한 자인 것을 해수도(解手刀)라 하니 이 세 가지는 몸에 지니고 반드시 쓰는 것이다. 칼이 매우 굳세고 날카로워서(剛利) 중국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대개 도식(刀式)이 견고하고 예리한 것은 왜인들이 으뜸이다. 그러므로 그 도식을 그림으로 갖추어 싣는다.)
(무예도 보통지)

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u_id=CP_THE009&cp_code=cp0303&index_id=cp03030009&content_id=cp030300090001&search_left_menu=1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청사(청나라사신)를 접견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왜검(倭劍)을 사서 보내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소방(小邦)이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 왜인이 병기(兵器) 무역을 전혀 허락하지 않으므로, 지금 10년이 되도록 아직 사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그 말씀대로 돌아가 고하겠습니다." 하였다.
(인조실록 )


https://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dataId=ITKC_JT_P0_A27_01A_20A_00020



옛날 조조(晁錯)가 병법을 논하면서 ‘기계가 예리하지 않으면 자기의 군졸을 적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기계와 관련 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본 검이 좋은 이유는 쇠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쇠를 단련하는 기술이 정교하여서입니다. 우리나라도 남쪽에서 양질의 철이 많이 생산되니 백 번 정도 쇠를 담금질하여 두드려 만들기를 일본의 방법대로 한다면 또한 예리한 검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승정원 일기)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U0_A01_09A_24A_00190

일본 사람은 칼을 만드는데 칼날은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하고 그 끝은 뾰족하게 하였다. 칼날이 무디면 다만 그 비스듬한 한쪽만 갈아도 칼날이 날카로워지는 까닭에 갈기가 쉽고 오래 쓸 수 있다.
그들은 칼을 제조할 때 강한 쇠와 유연한 쇠를 각각 붙여서 만들기 때문에 늘 날카롭고 잘 무디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개 칼이란 칼날이 너무 얇으면 쉽게 닳고, 등이 너무 두꺼우면 무겁기만 하고 또 쇠만 많이 허비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칼은 그 두꺼움과 얇음을 꼭 알맞게 하고 또 칼날도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하였으니, 연구해 만든 것이 아주 묘하게 되었다.

(성호사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8A_0070_010_0640

정작 현실은 당시 조선과 중국에서도 전부다 일본도가 당대 최강이라고 기록해 놓았음.

(물론 서양소드vs일본도 비교해서 일본도가 휘어진다고 일본도를 까는 경우가 있는데  당시 서양은 플레이트 아머같은 강철 갑옷을 입어서 그런 강철 갑옷에도 타격을 주기 위해서 둔기처럼 진짜 강도에만 완전히 몰빵을 해서 만든 것인데 그때당시 그런 강철을 쓰지 않았던 동아시아를 완전히 환경이 서로 다른데도 동일선에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고.  그리고 당시 무사들이 칼을 여러개 차고 다녔던 것도 사실 칼은 종류가 하나마 있는게 아닌 근접전, 기급대응, 쌍검술,투척용, 거디다가 할복용(할복용은 실제 전투에서 쓰는 칼이 아니니 실제 급접전 칼보다 보통 길이가 짧았고) 까지 상황에 따라  여러 용도가 있었기 때문에 상황에 맞추어서 가장 적합한 칼을 쓰기 위해서 여러개 차고 다녔던 것.https://www.youtube.com/watch?v=whSEcvOxEGM&t=687s(���제 이 영상보면 검술마다 서로 쓰는 칼들이 다름)
거기다가 인터넷에서 무슨 일본도가 페트병 콜라 하나 못베는 짤이 있는데 그건 날도 제대로 세우지도 않은 알루미늄으로 만든 모조품이고 실제 실험 영상에서는 잘만 썰고 다님. https://www.youtube.com/watch?v=UddTKZNII68.
즉 일본도가 무슨 쉽게 부러진다니 그때당시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는 무기였다니 이런 루머들이 대중매체에서 너무 일본도가 무엇이든 벨수가 있는 지상최강의 칼처럼 미화가 되어서 나오니 그것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해서 그런게 가장 크다고 생각함. 실제로 애니나 이런데 나오듯이 무엇인든 벨수 있는 그런 지상 최강의 칼은 아니지만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최강의 칼이 맞았던 것임. (거기다가 기록에도 단순히 일본군은 일본도 뿐만이 아니라 검술 실력에서는 당시에 당해낼 자가 없다라고 평가함.)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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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21-08-07 15:40
   
쓸데 없는말 길게도 적어 놨네요.

일본도가 구린이유를 적자면 대표적인게 몇가지 있는데.

사철을 이용한다.. 불순물이 많아서 칼 자체가 약합니다. 같은 모양의 칼을 만들어도 좋은 철광석을 이용하면 훨씬더
좋은칼이 만들어집니다.

두가지 종류의 철을 이용해서 만든다.. 단단한 철과 무른철 두가지를 이용해서 바깥쪽에 강한것 안쪽에 무른것을 쓴다고는 하지만.. 만들다 보면 뒤죽박죽이 되어 아무 의미없는 칼이 나와 버림.. 거의 대부분.
가끔 잘되서 나오는 칼이 있으면 명검이라고 추앙받음... 역시나 좋은 철광석으로 만들면 더 좋음.

날 부분이 지나치게 얇음.
맨살은 잘베어 지지만 갑옷엔 날만 상함.
그래서 전쟁용이 아니라 민간인 학살용 칼.
게다가 휘어진 곡도.
곡도는 베는용이지만.. 전쟁에서 베는건 의미가 없음. 갑옷 때문에.
갑옷에 대해서는 찌르던가.. 둔기처럼 후두려 패는 방법 뿐임.
서양검에 직선검이 많은 이유도 이거.

실제로 전쟁에서 도검이 많이 쓰이지는 않음.
일본역시 전쟁시 주무기는 창임.

우리나라는 보조무기에 불과한 도검을 보조무기에 맞게 짧게 만듬.. 그게 환도.
일본은 전쟁엔 별 쓸모도 없는 도검을 권력자의 상징 같은거로 씀.

문론 도검이 잘 휘는 건 당연한거.
탄소강이 나온건 그리 오래된게 아니고 그전엔 전부 연철임.
그러니 날도 잘나가고 휘기도 잘 휨 이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

그래서 우리나라의 환도는 규격화된 검이죠.. 모두 똑같게 만듭니다. 부서지면 다른거 들고 가서 쓰죠.
일본은 개인 주문제작.
한사람 마다 커스터 마이징을 해주는데.. 하나 뽀사지면 새로 만들라면 한참 걸림.
그래서 전쟁 병기라기 보다 장식용 칼에 가깝죠.
     
yj12 21-08-07 15:55
   
그래서 당시 조선이나 중국은 일본도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견고하고 예리하다고 호평함?
당시 일본이 철이 안좋기 하지만 그 안좋은 철을 커버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장인들을 철을 다루어서 칼을 제련하는 방법들을 연구해서 저런 평가를 받을수가 있었던 것이지.
제대로 된 기록 한줄 없이 주장하기는 ㅉㅉ.
          
토막 21-08-07 16:10
   
얼마전까지도 우리나라가 북한하고 전쟁하면 진다고 하던게 진짜 져서 그러는 거임?
국방비 타내려고 하는거지.

게다가 일본도 좋다고 일본도 방식 채용했다가 써보니 구려서 다시 원래대로 돌린 경우도 있음.
그냥 남의 떡이 커보이는거.

그리고 일본 장인 이란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물건 만들때 물건의 본래 목적은 버린 것들임.
본래 목적보단 과정을 더 중시함.
그러니 칼이 날카롭고 단단하게 만들기 보단. 만드는 방식에 더 집중함.
일본이 지금만 갈라파고스가 아니라 옜날 부터 갈라파고스임.

좋은 철광석으로 만들 수 있으면 어떻게든 철광석 구해서 만들면  더 좋아지는거 알면서도.
사철을 고집하는게 일본 장인이란 것들임.

아직도 일본도는 사철로 만들어야 일본도라는 공식이 남아있음.
그래서 요즘 만들어 지는 일보도 조차 내구도 형편 없음.
심지어 일본 도검류 관리법에 일본도는 도검류에 들어가지도 않음.
그냥 장식품임.
               
yj12 21-08-07 16:18
   
당시 일본도가 제련 기술이 형편없고 장식품이여서 당시 조선이 일본의 철 제련기술이 오히려 더 높고 또한 조선하고 청나라에서 일본도 품질이 뛰어나다고 호평함?
이제는 일본도 까기 위해서 당시 청나라하고 조선도 전부다 일뽕으로 만들어 버리는 수준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그때당시 철은 곧 무기에 직결되기 때문에 파는 쪽에서도 품질이 좋은 철은 함부러 수출할수 없기 때문에 당시 좋은 철을 수입하기가 어디 쉬운줄 아심?
그리고 일본도 칼중에서 식칼같은 건 그냥 현대 기술로 팔고 굳이 옛날 일본도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옛날 일본도는 그냥 옛날 방식으로 만들어 파는 것이지(주로 장식품이나 실험용으로)
하지만 당시에는 조선과 중국조차 호평했던 동아시아 최고의 칼이였고.
                    
자기자신 21-08-07 16:36
   
일본도 20세기와현대에 왔어 과대포장된것지 길이가 기니까 좋은줄 알았겠지 그당시 과학이 없었으니까  조선군이 백병전에서 밀린것도 검술때문에 밀린것지 일본도가 튼튼했어가 아니라
                         
yj12 21-08-07 16:45
   
그럼 기록에 일본도는 단순히 길이만 길뿐 내구성은 좋지 않았다고 적었겠지.
그럼 조선이나 청나라는 그럼 무슨 븽신이여서 설마 칼 테스트도 안해보고 품질이 뛰어나다고 저렇게 호평하고 높이 평가했겠음?
                         
토막 21-08-07 17:09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 일본도가 좋다고 도입한 적도 있었어요.
단지 북방민족하고 전투때 써보니.. 쓰레기.

앞에도 말했지만 일본도는 베기용 칼인데.. 전투에선 베기는 별 쓸모없죠..
                         
자기자신 21-08-07 17:13
   
yi12//내구성 안좋아는데 그리고 애초에 칼이 쉽게 부러지냐 조선의환도나 중국의칼도 쉽게 안부러진다 세계2차대전때 일본군이 일본도로 미군장교머리 내리쳤는데 미군철모도 못베고 오히려 미군이 총으로 쏴죽이고 일본도을 전리품획득 ㅋㅋㅋㅋㅋㅋㅋㅋㅋ
                         
yj12 21-08-07 17:34
   
애초에 그때당시 미군이 만든 철모는 말그대로 적의 총탄도 방어할수 있게 만들어 놓았는 방어구인데.
그리고 당시 미국이 전 세계적인 철광 기술도 전 세계적으로  탑이였고 그러니 그런 것이고.
하지만 그보다 훨씬더 예전인 서양처럼 플레이트 아머 같은 강철이 대중화 되지가 않았던 동아시아에서는 일본도가 기록들을 보아도 최고가 맞았고.
                    
토막 21-08-07 17:06
   
호평한것만 찾으니 호평한게 보이겠죠.
그리고 일본은 나라 취급도 못받은건 아시죠?
그냥 왜구 ..
왜구를 호평한 사람이 있다.. 그럼.. 그때도 일뽕이 있었구나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무슨 청동기에서 갓 철기로 넘어갈때 이야기 합니까?
철이 무기로 직결되게.?

그리고 일본 칼중에 옜날 방식으로 만드는 것도 있어요.. 완전히 옜날 방식은 아니지만.
일본 특기중 하나가 별거도 아닌거 포장 엄청나게 하는게 있죠.
회칼 하나에 몇백만원씩 하는거 있어요.. 전통방식으로 만들었다고.

일본도고 식칼이고 회칼이고.. 전부 일본식 광대포장으로 만들어진 허상일 뿐입니다.
                         
yj12 21-08-07 17:10
   
당시 조선하고 청나라가 전부다  일뽕이여서 조선하고 청나라 정부가 직접 일본도를 호평했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말도 안되는 소리 하기는)
아니 당시 역사적인 기록들을 전부다 무시하고 일본도가 허접하다고 주장하면서  내가 무슨 일본도를 호평한 기록들만 골라서 올렸다고 본인 뇌피셜 해되는데 그럼 최소한 일본도가 품질이 좋지 않았다는 기록 한줄이라도 올리고 그런 식으로 주장한든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작 그런 놈들은 일본 까기 위해서 일본도 허접하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에 대한 기록 한줄도 못올림)
그리고 당시 일본도 에도시대 부터 조선과 통신사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 편지에서 조선 국왕과 쇼군이 서로에게 전하라고 호칭할 정도로 일본과 조선은 사실 동등한 관계였음.
그리고 북한이 국력에서 한국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통 말하고 그런 식으로 알려진 것도 정확히 핵전력 한정임.(나머지 재래식 무기나 그밖에 미사일 경제면에서도 북한이 우위에 있다고 말하는 경우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전체 군사력에서 북한이 남한을 압도한다고 말하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거의 없고.)
                         
자기자신 21-08-07 17:18
   
yj12// 이거나 봐라 임마  https://m.inven.co.kr/board/webzine/2097/821366
                         
yj12 21-08-07 17:36
   
저 글 자체가 제대로 된 기록 한줄도 없이 그저 사진 몇개 가져와서 본인 뇌피셜로만 일본도 까대는 글이더만 .
일단 저글에 대해서 반박을 하자면  칼은 기본적으로 중량 1~2kg에 두께 3~6mm 전후인 얇은 철판이다. 정도 이상의 강한 충격을 받으면 당연히 부러지거나 휘어지며, 제작자나 사용자의 '실수'가 있다면 더 작은 충격에도 그렇게 될 수 있어서 비단 일본도 뿐만 아니라, 다른 장도들도 그렇고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중기병들의 갑주전투에서 사용되던 대갑주 롱소드 에스터크 역시 예외는 아님. 칼날을 붙잡히면 휘어져서 못쓰게 될 위험이 있었서, 기병들은 전투 도중 검이 망가질 때를 대비해야 했음.
또 일본도가 실전이나 베기 시험 도중 쉽게 망가졌다는 증언의 출처는 대부분 중일전쟁 시기 일본육군 군도수리반의 기술자였던 나루세 칸지의 <싸우는 일본도:戦ふ日本刀>와 <실전도론:実戦刀譚>이다. 하지만 나루세 칸지의 저서에서는 같은 전통 일본도라도 고도(古刀)와 신도(新刀), 신신도(新々刀)에 대한 평가가 다르며, '에도시대 망나니의 시참용 검'과 '군진에 필요한 탄력있고 강한 검'을 구분하고 있고, 에도시대 이후부터 내려진 전쟁금지령 때문에 전체적으로 성능이 떨어진다고 평가받은 신도(新刀) 중에도 한 번의 전투에서 휘어져 못쓰게 된 검, 날이 깨졌지만 계속 사용할 수는 있었던 검, 전투에 적합한 일부 좋은 검 등 다양한 사례가 존재한다. 약하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단단하고, 무르더라도 충분히 사용할 수는 있다는 것임. 중일전쟁을 비롯한 근대 전쟁사에 등장한 일본 군도정으로 쪼아서 조각할 수 있을 정도로 검신이 무르다 역시 휘어지고 부러지는 등 성능 자체는 좋지 못했으나 철강 기술의 개편으로 제값을 한 경우가 많고.
또한 정으로 쪼아서 조각할 수 있을 정도로 검신이 무르다는 것도 이는 강도보다는 경도의 문제로, 무게, 가공 등을 고려한 전투용 도검의 이상적인 경도는 HRC 50[51] 전후다. 잘 만든 칼이라도 단단한 못으로 긁고 쪼면 파임..다만 세밀한 조각이 가능하다는 것과 못이나 정으로 찍어 파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물론, 근대 이전의 도검은 거의 대부분 해당사항이 있음. 당장 현대 기술로 제작된 도검만 봐도 스테인리스 재질의 군용 나이프가 HRC 60 정도임.
또한 강도가 떨어져서 일본검술에는 검을 부딪히는 기술이 없었다는 것도 정작 현실은
신도무념류 https://gall.dcinside.com/mini/board/view/?id=budo&no=14
카토리신도류 https://www.youtube.com/watch?v=cQB5Lc1C_a8&t=209s

일본내에서도 검을 부딪히는 기술들은 잘만 있음.
                         
자기자신 21-08-07 18:16
   
12야 문헌자료 가지고와라
                         
yj12 21-08-07 18:19
   
내가 그동안 게시글에 올렸는 당시 조선하고 청나라가 일본도 품질이 뛰어나다고 호평한 기록들 안보이냐?
                         
자기자신 21-08-07 19:14
   
12//검술기록말이야 일본도 품질 말고 ㅋㅋㅋㅋㅋㅋㅋㅋ
                         
yj12 21-08-07 19:45
   
내가 이 게시물 글에 일본도의 현실이라고 올렸는 게시글에 있는 기록들은 전부다 일본도 품질에 관해서인데
기록들 안보임?
                         
자기자신 21-08-07 19:52
   
12// 내글 안읽었냐 검술말이야 품질말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yj12 21-08-07 19:54
   
호조가 아뢰기를, "향장검(鄕長劍) 16병(柄)과 향단검(鄕短劍) 8병은 정축년(1637)의 예(例)대로 모두 왜도(倭刀)로 바꾸어 지급해 달라고 하기에 여러 칙사의 차비 당상 역관들로 하여금 거듭 설명하게 하였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정칙이 곧바로 응판색리(應辦色吏)를 불러 말을 전하기를, ‘앞으로 예단의 환도는 모두 왜도를 쓰는 것으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고 영원히 등록(謄錄)으로 남기십시오.’라고 하면서 몹시 급히 들여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간의 사세로 볼 때 거절하기 어려울 듯하니, 왜도 가운데 보통의 품질로 가려서 바꾸어 지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승정원 일기)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25_10A_16A_00230





"신들이 인사하고 나온 뒤에 정사(鄭使)가 이형장을 시켜 신들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를, ‘예전에 보낸 환도(環刀)의 견양은 일본에서 제조하기를 도모할 수 없다면 도로 사행 편에 부쳐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에 사은하는 사행을 다시 보내되 그 견양대로 귀국에서 두 자루를 정밀하게 만들고 말을 잘 만들어 보내기를, 「그 견양을 지금까지 머물러 두었던 것은 반드시 어떻게든 왜국에 시도해 보려는 것이었는데, 어찌할 방도가 없어 부득이 본국에서 만들어 보냅니다. 하지만 품제(品制)가 좋지 못하여 매우 황공합니다.」라고 하십시오.’ 하였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이대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승정원일기)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P0_A27_01A_23A_00130

의령(宜寧)에 거주하는 선군(船軍) 심을(沈乙)이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서 칼 만드는 법을 배워 칼 한 자루를 만들어 올리니, 일본 칼과 다름이 없으매, 명하여 군역(軍役)을 면제시키고 옷 한 벌과 쌀·콩 아울러 10석을 하사하였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dataId=ITKC_JT_D0_A12_06A_01A_00060
(세종실록의 기록)



"우리 나라 공인(工人)이 제조한 칼은 저들의 잘 단련(鍛鍊)된 것과 같지 못하니, 저들로 하여금 시험적으로 주조(鑄造)하게 하여 만약 보통 기구(器具)보다 특이하게 된다면 작은 관직을 제수하고 그들이 잇달아 왕래하도록 허가하여 우리 공인(工人)들로 하여금 전습(傳習)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또 예조(禮曹)에 물으니, 예조에서 말하기를, "시험하여 만들도록 하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자, 전교(傳敎)하기를, "갑오년의 예(例)에 의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칼을 만들게 하라."

https://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dataId=ITKC_JT_I0_A13_09A_24A_00030
(성종실록의 기록)


"군기시(軍器寺)에 간직한 왜도(倭刀)는 아무리 하품(下品)이더라도 몹시 날카로우니(甚銳利) 진실로 군국(軍國)의 중한 기구인데 가볍게 화매(和賣)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

(성종실록의 기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dataId=ITKC_JT_I0_A18_05A_15A_00020


신(臣)은 왜의 땅에 와 있은 지 3년 동안 왜놈들이 날마다 군기와 창검을 수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후에 항복해 온 왜인 가운데는 반드시 칼을 알아보고, 칼을 만들고, 칼을 갈 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니, 충신(忠信)으로 대해 주고 녹봉을 후히 주어 날마다 달구어 만들어 내게 하고, 부산에서 만약 전일과 같이 서로 무역하게 될 경우에는 칼을 잘 알아보는 통역을 시켜 귀중한 물품을 많이 싣고 가서 사 들여오게 하여 창졸(倉卒)간의 사용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간양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80A_0010_010_0020 (** 1596년 1월 1일의 바로 앞에 한 장으로 다섯 줄에 걸쳐 적혀 있는 글이다.)


도양장(고흥군 도양면)의 농사일에 부리는 소가 7 마리인데, 보성 림정로(臨廷老) 1 마리, 박사명(朴士明) 1 마리를 바치지 않았다. 정명열(丁鳴悅)은 바로 길다란 서화첩(長帖)을 받아 갔다. 이는 정 경달(丁景達)의 아들이다. 갑사 송한(宋漢). 1월 3일에 배 위에서 이번에는 환도 4 자루, 왜놈칼 2 자루를 만 들었다. 아들 회가 가지고 가던 중에(이 뒤에 분실)

(난중일기)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1258&Lang=%ED%95%9C%EA%B8%80&Page=5&View=Text

왜경(倭京)에 머물렀다. 군기(軍器)로 소용되는 장검(長劍) 1백 자루를 샀다.
일본에는 다른 나라 사람에게 병기(兵器)를 몰래 파는 것에 대한 금령이 있었다.
평조신(平調信)이 생시에 가강에게 아뢰기를, “조선이 조총과 환도(環刀) 등의 물품을 사고자 하니, 허락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하니,
가강이 말하기를, “싸움을 당하면 싸울 것이지, 어찌 병기 없는 나라와 그 승부를 겨뤄서야 되겠느냐? 하물며 이웃 나라가 사고자 한다면 어떻게 금지 하겠는가?”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이번에 사는 병기는 조금도 금지함이 없어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매매하였던 것이다.
(해사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81A_0020_020_0080

청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에 관한 일을 맡은 자가 일찍이 일본의 보검을 구하므로, 민간에서 찾아 얻었더니 매우 좋은 칼이 있었다. 공이 이 칼을 받아 감추고, 낭관들을 시켜 다시 다른 칼을 구하게 하였더니, 다시 칼 한 자루를 구하여 올렸다. 공이 말하기를, "비록 처음 칼만을 못하지만 또한 쓸 만하다." 하고, 그것을 청장에게 주었다. 얼마 뒤에 청국 황제가 그 장수의 칼을 보고 다시 구하였는데, 공이 즉시 감추어 두었던 것을 내어주며 낭관에게 말하기를, "그때 내가 이미 이럴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하니, 듣는 자가 탄복하였다.

(연려실기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00A_0300_010_0020


"일본도(日本刀)는 크고 작고, 길고 짧은 것이 일정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장도(長刀) 하나를 소유하는데 그 칼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칼(小刀)을 꽂아두어 잡무에 쓰기 편하도록 한다. 또 하나 자도(刺刀)로 길이가 한 자인 것을 해수도(解手刀)라 하니 이 세 가지는 몸에 지니고 반드시 쓰는 것이다. 칼이 매우 굳세고 날카로워서(剛利) 중국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대개 도식(刀式)이 견고하고 예리한 것은 왜인들이 으뜸이다. 그러므로 그 도식을 그림으로 갖추어 싣는다.)
(무예도 보통지)

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u_id=CP_THE009&cp_code=cp0303&index_id=cp03030009&content_id=cp030300090001&search_left_menu=1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청사(청나라사신)를 접견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왜검(倭劍)을 사서 보내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소방(小邦)이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 왜인이 병기(兵器) 무역을 전혀 허락하지 않으므로, 지금 10년이 되도록 아직 사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그 말씀대로 돌아가 고하겠습니다." 하였다.
(인조실록 )


https://db.itkc.or.kr/dir/item?itemId=JT#/dir/node?dataId=ITKC_JT_P0_A27_01A_20A_00020



옛날 조조(晁錯)가 병법을 논하면서 ‘기계가 예리하지 않으면 자기의 군졸을 적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기계와 관련 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본 검이 좋은 이유는 쇠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쇠를 단련하는 기술이 정교하여서입니다. 우리나라도 남쪽에서 양질의 철이 많이 생산되니 백 번 정도 쇠를 담금질하여 두드려 만들기를 일본의 방법대로 한다면 또한 예리한 검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승정원 일기)
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U0_A01_09A_24A_00190

일본 사람은 칼을 만드는데 칼날은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하고 그 끝은 뾰족하게 하였다. 칼날이 무디면 다만 그 비스듬한 한쪽만 갈아도 칼날이 날카로워지는 까닭에 갈기가 쉽고 오래 쓸 수 있다.
그들은 칼을 제조할 때 강한 쇠와 유연한 쇠를 각각 붙여서 만들기 때문에 늘 날카롭고 잘 무디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개 칼이란 칼날이 너무 얇으면 쉽게 닳고, 등이 너무 두꺼우면 무겁기만 하고 또 쇠만 많이 허비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칼은 그 두꺼움과 얇음을 꼭 알맞게 하고 또 칼날도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하였으니, 연구해 만든 것이 아주 묘하게 되었다.

(성호사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8A_0070_010_0640

내가 게시글에 올렸던 기록들 안보이냐?
                         
자기자신 21-08-07 20:05
   
12//품질기록말고 검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말길 못알아듣네
                         
yj12 21-08-07 20:08
   
내가 올렸는 기록들이 전부다 일본도 품질에 관한 기록인데 난독증이냐?
실록이나 승정원 일기 같은 조선 기록에서도 조선이 만든 칼들은 일본이 만든 것보다 못하고 일본도의 견고함과 예리함은 으뜸이라고 적혀 있는 기록들 안보임?
               
자기자신 21-08-07 20:19
   
12//한글 못읽냐 아니면 난독증이냐 품질에 관한 기록말고 검술기록 보여달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yj12 21-08-07 20:55
   
너나 한글 못읽냐?
내가 올린 성종실록 기록에도 대놓고 우리 나라(조선) 공인(工人)이 제조한 칼은 저들의 잘 단련(鍛鍊)된 것과 같지 못하다고 적혀있고 그 밖에 승정원 일기 기록에도 조선이 청나라에 조선 환도 바치자 퇴짜맞고 청나라측에서 영원히 일본도로만 바치라고 명하고 그밖에 일본도 못 바쳐서 조선도 바칠때는 조선이 품질 안좋은 칼 바쳐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그리고 무예도 보통지에서도 일본도는 견고한고 예리한 것이 으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제는 기록들을 올려도 대놓고 현실 부정 하는것 보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기자신 21-08-07 22:10
   
12//한글 못 읽냐 품질말고 검술기록 보여달라고  멍충아 또 딴소리하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현실부정은 니가 하는것고 임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yj12 21-08-08 00:00
   
이미 그전에 다른 댓글들에서 올렸는데 다시 올림

검술은 유래가 오래되어... 수십 번을 안과 밖을 뛰어넘는 것이 마치 금수(禽獸)와 같으며, 더러 늘 경쟁을 시켜 사심(死心)을 앞다투어 발휘케 하는데 칼을 휘둘러 서로 치며 반드시 죽이기를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칼을 휘두르는 사이에 칼등으로 칼날을 받아쳐서 결국 다치지는 않으니 그 교묘하게 피하는 기술과 능숙하게 부딪치는 기술은 완연히 백원(白猿)의 검법(劍法)이 있습니다. 근기(近技)는 신묘하여 사람마다 검객이 아닌 자가 없고 기계의 정밀함도 다 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들이 믿는 것은 장검(長劍)과 철환(鐵丸)인데 철환은 비가 내리듯이 쏟아지고 칼은 숲이 서 있는 것과 같으나, 총을 쓰는 것은 칼을 쓰는 것에 비해 자못 뒤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칼을 가진 자는 천백이고 총을 가진 자는 수십 명이니, 이는 그들의 전술이 근전(近戰)에는 빠르고 원전(遠戰)에는 느립니다. 이런 까닭으로 육전(陸戰)은 좋아하나 수전(水戰)을 싫어합니다.
정탁 『약포집』 1593년 8월 15일 명나라 유생 호환에게 보낸 편지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184A_0030_010_0010

오랑캐의 근성은 언행이 경박하고 거칠며, 칼과 창을 잘 쓰고 배에 익숙해 있으므로, 육지에 내려오면, 문득 제 생각에,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는데, 우리 군사는 아직 정예롭게 훈련되어 있지 않은 무리이므로 일시에 놀라 무너져 그 능력으로 죽음을 무릅쓰며 항전할 수 있겠습니까?
『난중일기』1593년 9월
https://books.google.co.kr/books?id=5TMQBAAAQBAJ&pg=PT269&lpg=PT269&dq=%EB%82%9C%EC%A4%91%EC%9D%BC%EA%B8%B0+%EA%B3%84%EC%82%AC%EB%85%84+9%EC%9B%94&source=bl&ots=vvOSq68k91&sig=ACfU3U2o1oPvXjfZtZ42J1oz8sPSxXadGA&hl=ko&sa=X&ved=2ahUKEwjFksy33czpAhXQfd4KHdTeC-YQ6AEwA3oECAkQAQ#v=onepage&q=%EB%82%9C%EC%A4%91%EC%9D%BC%EA%B8%B0%20%EA%B3%84%EC%82%AC%EB%85%84%209%EC%9B%94&f=false

비망기로 일렀다. "우리 나라 습속은 남의 나라의 기예를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더러는 도리어 비굴하게 여긴다. 왜인의 검술은 대적할 자가 없다. 전일 항왜(降倭) 다수가 나왔을 때 그 중에 검술이 극히 묘한 자가 많이 있었으므로 적합한 자를 뽑아 장수로 정하여 교습시키도록 별도로 한 대열을 만들라고 전교를 하기도 하고 친교를 하기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끝내 실시하지 않고 그 항왜들을 모두 흩어 보냈다. 원수의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고 있는데 시속의 습관이 이와 같으니 가탄할 일이다. 지금 이판(吏判)이 도감에 있으니 족히 그 일을 할 만하다. 별도로 한 장수를 뽑고 아이들 약간 명을 선택하여 한 대열을 만들어서 왜인의 검술을 익히되 주야로 권장하여 그 묘법을 완전히 터득한다면, 이는 적국의 기예가 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인데, 어찌 유익하지 않겠는가? 훈련 도감에 이르라."
『선조실록』 1594년 12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12027_005

왜적은 실로 상대하기가 어려우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왜적은 철환(鐵丸)을 비 오듯 퍼붓는데 한번 맞기만 하면 곧바로 쓰러지고 근접해서는 칼을 사용하는데 그 검술이 지극히 기이하니 이들은 참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라고 하겠다.
『포저집』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321A_0230_010_0080

오랑캐(후금) 군사는 돌격전을 벌여 마구 덤비는(馳突亂戰) 데만 능할 뿐이고 예리한 검을 활용하는(銳利劍之妙用) 데는 도저히 왜놈만 못하다. 더구나 왜놈의 변사(變詐)와 흉계란 실로 추측할 수 없었지만 그 예리한 장검도 우리의 굳센 화살을 못 당했고 그 변사와 흉계도 우리의 임기응변 앞에는 소용이 없었다. 다만 인심이 해이하여 힘껏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왜놈에게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속잡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33A_0020_000_0060

니가 요구한 검술 기록들. 솔직히 내가 눈이 안좋아서 니 댓글을 잘못 보았음.
그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하지만 당시 조선 기록에서도 일본이 검술 실력이 뛰어났다는건 팩트임.
tuygrea 21-08-07 16:06
   
누가 그런 소릴 했다고 왜 뜬금없이 혼자 발작하지? 일뽕스러운 갑분싸 쉐복질 작작좀
뜨악 21-08-07 16:09
   
일본의 모 쇼프로에서 총알을 칼에다 쐈더니 총알이 반으로 갈라졌다는거 나온뒤로 총알도 가르는 검이니 뭐니 하도 입방정을 떨어서 그 반감에 그런거였죠
아다시피 식칼에다 대놓고 쏴도 총알은 갈라지잖아요
아무리 좋아봤자 전근대 기술로 만들어진 검인데 마치 현대의 기술도 능가하는듯이 설레발쳐서 일본도의 진실이라며 까발린 글들이 많았는데 그 영향인듯 싶네요
     
토막 21-08-07 16:14
   
현대기술엔 말도 안되는 소리고.. 같은 시대 방식으로도 쓰레기 기술이죠.
그냥 철광석 완전히 녹여서 주괴 만들고 그거 두드려서 칼만드는게 훨신 성능이 좋죠.

그냥 철제련 기술이 떨어지고 장인이라 불리는 것들의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만들어진게 일본도죠.
          
yj12 21-08-07 16:26
   
일본이 제련 기술이 떨어졌다는 증거는? 증거를 주장할거면 최소한 나처럼 기록 한줄이라도 제시해야지 그런거 없고 그저 아무런 자기 주장에 대한 제대로 된 근거 한줄 없이 뇌피셜로만 떠들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시 일본이 제련 기술이 형편없었고 일본도 품질이 떨어졌으면 그럼 일본도를 품질이 뛰어나다고 호평한 청나라나 조선은 무슨 븽신임?ㅋㅋㅋㅋㅋㅋㅋ
               
리로이깁스 21-08-07 18:47
   
이 환자 밀게서 찌질거리네
잡게서 ㅂ ㅅ인증 하더니 밀게서도 인증 받고싶나보네
이름귀찮아 21-08-07 16:19
   
"만철도"라고 검색 해보시고

니뽕 애들 검이 그렇게 좋으면

니뽕 사무라이들이 여러 자루를 허리에 차고 다닐 필요가 없음
     
yj12 21-08-07 16:25
   
당시 무사들이 칼을 여러개 차고 다녔던 것도 사실 칼은 종류가 하나마 있는게 아닌 근접전, 기급대응, 쌍검술,투척용, 거디다가 할복용(할복용은 실제 전투에서 쓰는 칼이 아니니 실제 급접전 칼보다 보통 길이가 짧았고) 까지 상황에 따라  여러 용도가 있었기 때문에 상황에 맞추어서 가장 적합한 칼을 쓰기 위해서 여러개 차고 다녔던 것.https://www.youtube.com/watch?v=whSEcvOxEGM&t=687s(��� 이 영상보면 검술마다 서로 쓰는 칼들이 다름)
          
이름귀찮아 21-08-07 16:49
   
그렇게 종류 별로 들고 다니면 무게는 어쩔~

실전에 필요한 가장 많이 사용되는칼 2~3개 정도를 차고 다님

드라마나 영화 보면 칼끼리 부딪치는 장면보고 실제도 그랬을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전에서 그렇게 싸웠다간 날이 부러 지거나 망가짐
               
yj12 21-08-07 16:53
   
그래서 실제로 당시 무사들 사진보면 칼 보통 2개 정도만 차고 다님.
종류별로 다 가지고 있으면 너무 불편하기 때문에.
          
비앤비 21-08-07 16:54
   
그건 왜놈들이 미화시킨것이고요.... 현실은 챙챙몇번에 이가 나가 톱이 되어버리는 극악의  내구성 때문에 스페어로 한개더  챙겨 다녔다는 것이 정설이죠 ㅋ
               
yj12 21-08-07 16:56
   
국수 , 일까들은 그저 기록한줄도 본인들 뇌피셜로만 그저 일본도를 까기 위해서 당시 청나라와 자기 조상들까지도 전부다 일뽕으로 만들어 버리는  수준들 하고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기자신 21-08-07 17:20
   
https://m.inven.co.kr/board/webzine/2097/821366 이거나 보고떠들어라 겉만 보고선 칼길이가 기니까 짱짱 이렇는것지
                         
yj12 21-08-07 17:29
   
저 글 자체가 제대로 된 기록 한줄도 없이 그저 사진 몇개 가져와서 본인 뇌피셜로만 일본도 까대는 글이더만 .
일단 저글에 대해서 반박을 하자면  칼은 기본적으로 중량 1~2kg에 두께 3~6mm 전후인 얇은 철판이다. 정도 이상의 강한 충격을 받으면 당연히 부러지거나 휘어지며, 제작자나 사용자의 '실수'가 있다면 더 작은 충격에도 그렇게 될 수 있어서 비단 일본도 뿐만 아니라, 다른 장도들도 그렇고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중기병들의 갑주전투에서 사용되던 대갑주 롱소드 에스터크 역시 예외는 아님. 칼날을 붙잡히면 휘어져서 못쓰게 될 위험이 있었서, 기병들은 전투 도중 검이 망가질 때를 대비해야 했음.
또 일본도가 실전이나 베기 시험 도중 쉽게 망가졌다는 증언의 출처는 대부분 중일전쟁 시기 일본육군 군도수리반의 기술자였던 나루세 칸지의 <싸우는 일본도:戦ふ日本刀>와 <실전도론:実戦刀譚>이다. 하지만 나루세 칸지의 저서에서는 같은 전통 일본도라도 고도(古刀)와 신도(新刀), 신신도(新々刀)에 대한 평가가 다르며, '에도시대 망나니의 시참용 검'과 '군진에 필요한 탄력있고 강한 검'을 구분하고 있고, 에도시대 이후부터 내려진 전쟁금지령 때문에 전체적으로 성능이 떨어진다고 평가받은 신도(新刀) 중에도 한 번의 전투에서 휘어져 못쓰게 된 검, 날이 깨졌지만 계속 사용할 수는 있었던 검, 전투에 적합한 일부 좋은 검 등 다양한 사례가 존재한다. 약하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단단하고, 무르더라도 충분히 사용할 수는 있다는 것임. 중일전쟁을 비롯한 근대 전쟁사에 등장한 일본 군도정으로 쪼아서 조각할 수 있을 정도로 검신이 무르다 역시 휘어지고 부러지는 등 성능 자체는 좋지 못했으나 철강 기술의 개편으로 제값을 한 경우가 많고.
또한 정으로 쪼아서 조각할 수 있을 정도로 검신이 무르다는 것도 이는 강도보다는 경도의 문제로, 무게, 가공 등을 고려한 전투용 도검의 이상적인 경도는 HRC 50[51] 전후다. 잘 만든 칼이라도 단단한 못으로 긁고 쪼면 파임..다만 세밀한 조각이 가능하다는 것과 못이나 정으로 찍어 파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물론, 근대 이전의 도검은 거의 대부분 해당사항이 있음. 당장 현대 기술로 제작된 도검만 봐도 스테인리스 재질의 군용 나이프가 HRC 60 정도임.
또한 강도가 떨어져서 일본검술에는 검을 부딪히는 기술이 없었다는 것도 정작 현실은
신도무념류 https://gall.dcinside.com/mini/board/view/?id=budo&no=14
카토리신도류 https://www.youtube.com/watch?v=cQB5Lc1C_a8&t=209s

일본내에서도 검을 부딪히는 기술들을 잘만 있음.
                         
자기자신 21-08-07 17:43
   
본인뇌피셜이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제데로 보고 말하니 팩트나오니까 뇌피셜이란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역시기록을 가지고오라고 영상말고 문헌같은것ㅋㅋㅋㅋㅋㅋㅋㅋ현대제철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칼이 강하지 장인으로 만든칼이 강하냐 내가 보기엔 니가 뇌피셜로 하는것로 보인다
                         
자기자신 21-08-07 17:48
   
yj12//외국영상모음집이다 이거보면 일본도가 얼마나 과대포장되었는지 알수있다
https://m.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44278989
                         
yj12 21-08-07 17:50
   
내가 언제 전통 기술로 만든 일본도가 현대 제철 기술로 만든 칼보다 강하다고 했음?
난 당시 동아시아 중에서는 최강이라고 했지.
그리고 저 사이트에 있는 글 자체가 일본도가 허접하다고 깍아내리지만 그것에 대한 제대로된 기록은 단 한줄도 제시 못하고 오히려 내가 올렸는 일본도가 당시 뛰어나다고 평가한 기록들만 넘쳐나니 실제로 일본도가 당시 높은 평가를 받았고 동아시아 최강이였는건 그냥 팩트고.
                         
자기자신 21-08-07 17:50
   
12//다음번에 조선군과조선장수도 백병전에서 일본군상대로 밀리지않았거나 오히려 역으로 개털어버렸다는 기록도 가지고올께  선조실록에서
                         
yj12 21-08-07 17:57
   
그리고 사실 원래 동양은 강철을 일방적으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칼의 강도가 약함.
그래서 실제로 저 정도만 되었어도 당시 동아시아 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고.(당연히 단단한 강철로 칼을 만들었던 서양 칼에게는 안되고.)
당시 일본은 중국과 조선에 비해서 철이 안 좋았는데도 자신들 노력으로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인정받는 칼을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리고 당시 조선의 기록에 단순히 몇몇 장수들 한정이 아니라 조선군 전체가 평균적으로 일본군보다 근접실력이 더 좋았다는 기록 올리기나 하시지?
               
자기자신 21-08-07 18:23
   
12//말바꾸는것보소 누가 조선군이 백병전에서  강하고했니 조선군도 마음만 먹으면 백병전에서 강하다는걸 말하는것데
                    
자기자신 21-08-07 18:24
   
12//
근자에 원래 평양에 있던 적이 모두 서쪽으로 나와 순안현(順安縣)에서 10리 되는 곳까지 핍박해 왔기에 절도사 이빈(李薲)이 극력 차단하여 막았습니다. 또 이달 13일에는 성에 육박하여 혈전(血戰)을 벌여 사살한 적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그래도 시일(時日)을 보전해 가고 있습니다."

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8012_005
                    
yj12 21-08-07 18:26
   
조선군이 애초에 일본하고 백병전에서 싸워서 이긴것도 전부다 유리한 고지나 이런데서 지형끼고 싸워서 이긴 것이지.
실제로 지형빨 없이 그냥 평지에서 싸우면 창술,검술 면에서 그냥 밀리기 일수였고.
애초에 조선은 전쟁 끝날때까지 일본에게 한번도 백병전에서 지형빨없이 우위를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자기자신 21-08-07 18:33
   
일본군도 매복으로 이긴기록도 있다 정면이 아니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리고 전투에서 이길라면  유리한고지도 한몫하는데 그럼 불리한데에서 싸우냐 더구나나 적군이 아주 많은상태라면 당연히  유리한고지나  지형을 이용했어 싸워야지 ㅋㅋㅋㅋㅋ바보니 넌
                         
자기자신 21-08-07 18:42
   
그리고 훈련봉사라는 김호라는 장수가 일본군100여명상대로 돌진했어 일본장수1명을 창를 빼앗아찔러죽이고 또다시 일본군장수3명을 환도로 베었고 일본군병사2명도 죽이고 일본군50명을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수십명에 불과한 조선군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기자신 21-08-07 18:45
   
또 조선군병사 한명이 일본군400명을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명회라는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조선토병이 철곤이라는 둔기로 일본군400명을 죽임 ㅋㅋㅋㅋㅋㅋ
                    
자기자신 21-08-07 18:32
   
경상도 도체찰사(慶尙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신의 종사관 남이공(南以恭)이 이달 19일 술시(戌時)에 성첩(成帖)한 치보 가운데 ‘18일 한산도에서 발선(發船)시켜 저물녘에 장문포(場門浦)에 들어가 자고, 이튿날 일찍 통제사 원균(元均)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대(隊)를 나누어 학익진(鶴翼陣)을 이루어 안골포(安骨浦)의 적의 소굴로 직진하였더니, 적도(賊徒)들이 다 줄지어 서서 혹 해안에 잠복하기도 하고 혹은 암석 사이에 기계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제장(諸將)들이 경예(輕銳)한 군사를 거느리고 북을 울리면서 전진했더니 적들도 배를 타고 싸움을 걸어와 서로 응전하였는데, 포탄과 화살이 함께 쏟아져 해안이 진동하였는데도 군사들은 조금도 물러날 뜻이 없었다. 마침내 적선에 육박하여 많은 숫자를 살상하니, 적은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간신히 해안 위로 도망하기에 인하여 타고 온 배 2척을 빼앗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006029_008

조선수군과 일본수군의 싸움  조선수군병사들이 당당히 일본군병사들과  육박전을 벌였어 조선수군병사들이 수많은일본군을 죽이니 나머진 일본군병사들은 겁먹고 도망갔다는기록 그리고 쫒아가 일본수군배도 2척이나 빼앗다는기록이다
                         
yj12 21-08-07 18:44
   
애초에 조선군의 판옥선이 기본적으로 배도 훨씬 더커서 배라고 해도 조선의 배에 탄 조선군이 숫자도 훨씬 더 많았는 데다가(그리고 숫자빨로도 조선은 백병전에서 무조건 우위를 점하지 못했는데 실제로 원균이 실제로 실수로 일본군의 근접전을 허용해 버리자 조선군 130~140명 정도가 50명도 안되는 일본군에게 근접전으로 다 썰려 버린적도 있고.) 거기다가 유리한 지형끼고 싸워서 이겼다고 해서 조선군이 평균적인 근접 실력이 일본보다 좋았다고 할수 없음..
난 평균적인 실력을 말하는 것임.
그래서 조선 기록에서도 정작 조선군의 평균적인 검술이나,창술 실력이 일본보다 더 좋았다는 기록들이 있음?
실제로 백병전에서는 일반적으로 일본군이 더 뛰어났다는 기록들은 잘만 존재하는데.

오랑캐(후금) 군사는 돌격전을 벌여 마구 덤비는(馳突亂戰) 데만 능할 뿐이고 예리한 검을 활용하는(銳利劍之妙用) 데는 도저히 왜놈만 못하다. 더구나 왜놈의 변사(變詐)와 흉계란 실로 추측할 수 없었지만 그 예리한 장검도 우리의 굳센 화살을 못 당했고 그 변사와 흉계도 우리의 임기응변 앞에는 소용이 없었다. 다만 인심이 해이하여 힘껏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왜놈에게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속잡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33A_0020_000_0060

비망기로 일렀다. "우리 나라 습속은 남의 나라의 기예를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더러는 도리어 비굴하게 여긴다. 왜인의 검술은 대적할 자가 없다. 전일 항왜(降倭) 다수가 나왔을 때 그 중에 검술이 극히 묘한 자가 많이 있었으므로 적합한 자를 뽑아 장수로 정하여 교습시키도록 별도로 한 대열을 만들라고 전교를 하기도 하고 친교를 하기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끝내 실시하지 않고 그 항왜들을 모두 흩어 보냈다. 원수의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고 있는데 시속의 습관이 이와 같으니 가탄할 일이다. 지금 이판(吏判)이 도감에 있으니 족히 그 일을 할 만하다. 별도로 한 장수를 뽑고 아이들 약간 명을 선택하여 한 대열을 만들어서 왜인의 검술을 익히되 주야로 권장하여 그 묘법을 완전히 터득한다면, 이는 적국의 기예가 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인데, 어찌 유익하지 않겠는가? 훈련 도감에 이르라."
『선조실록』 1594년 12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12027_005
                         
자기자신 21-08-07 19:10
   
12//뭔 소리하는것지 당연히 조선군이 일본군보다 병력수에서나 실전경험에서 밀리니까 진것지 그리고 원균의조선수군을 말하는데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훈련도 제데로 안된 오합지졸이였는데 ㅋㅋㅋㅋㅋㅋㅋ
                         
yj12 21-08-07 19:25
   
당시 원균이 무능했던 것과는 별개로 당시 원균 밑에 있었던 조선수군은 전쟁 터지기 전에 이미 이순신 밑에서 꾸준히 훈련해 왔던 나름 조선 최정예군이였음.
그런데도 일본군이 배위에 올라타서 더이상 전술이 필요없는 백병전 벌일때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밀렸던 것.
그리고 사실 한국은 조선 이전에도 고려 말에도 왜구들에게 전 국토가 초토화되고 조선의 대규모 정규군이 털리기도 하는등 훈련이 되어있을때도 일본에게 검술,창술같은 백병전 실력면에서 우위를 점한 적이 없음.
                         
자기자신 21-08-07 19:43
   
12//원균과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부대자체가 다르는데 뭔소리하는것임 이순신장군은 전라도수군이고 원균은 경상도수군임 그리고 지휘관이자 장수가 무능하데 뭐가 별개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장수가 무능하면 그휘하병사들도 당연히 훈련자체가 잘 안되었는데 뭔소리하는것지 임진왜란때 해전도 거의다 이순신장군이 다했다 원균은 들러리고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이라면 얘기는 달라을것다 임마
                         
yj12 21-08-07 19:50
   
나중에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어서 조선 수군 전체를 이끌게 되잖아.
당시 원균의 실수로 인해서 조선군 130~140명이 50명도 안되는 일본군에게 썰렸던 건 그때의 일임.
https://www.youtube.com/watch?v=4oCXkhjUJvk
                         
국산아몬드 21-08-07 19:50
   
y12/조선육군이 단병접전에서 약했다고?

조선육군이 왜군에게 밀린기간은 개전 후 2개월만에 벌어진 용인전투가 마지막이야
그 이후 벌어진 웅치,이치 전투, 진주성 전투, 행주산성 전투 등에서 10대 1의 열세에도 일방적으로 왜군을 썰어버렸다

단병접전에서 우세를 점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리고 고려말 때 단병접전에서 왜구에 밀린다고 했는데
밀렸으면 왜구가 한반도에서 물러났겠니?
그 당시 고려군에게 썰려죽은 왜구들 숫자만 40만명이 넘는데
                         
자기자신 21-08-07 19:58
   
12// 그건 아냐 아무리 병사들이 훈련이 잘되었고 무기가 아무리 좋아도 장수 즉 지휘관이 무능하면 소용없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오죽하면 적보다 더 무서운게 무능한지휘관이라는 말이 왜 나오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가덕도해전 첫번째기록이나 봐라
                         
yj12 21-08-07 20:04
   
국산아몬드  께서 말씀하는 승리한 전투도 전부다 수성에서 싸우거나 아니면 유리한 고지에서 싸우서 승리한 즉 지형빨이나 수성빨을 이용해서 이긴 것이죠.
그냥 지형빨 없이 오직 근접전 실력으로만 평지에서 붙어서 조선이 일본에게 근접전에서 우위를 보인적은 단 한번도 없다는 것이죠.
조선군이 그래서 일본군보다 백병전을 더 잘해서 정작 조선 기록에서도 근접전 실력은 일본이 더 뛰어나다고 기록되어 있겠음?
거기다가 고려말 왜구가 패배했던 것도 사실 그때당시 고려는 방어하는 입장이고 또 왜구들이 가지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첨단 무기인 화포도 보유하고 있었고 무기도 더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이래서 정말 간신히 승리했던 것이지.(사실 고려도 비록 이기긴 했지만 진짜 상처뿐인 승리였고 또 사근내역 전투같은 대규모로 정규군이 털린 적도 있는 데다가 사실 고려군이 털린 전투도 못지않고.(거기다가 당시 고려가 승리할수 있었던게 사실 왜구의 주요 목표가 고려의 땅을 점령하는게 아니라 그냥 대규모 약탈하고 가는 약탈에 중심이였던 점이 있고.)
거기다가 당시 고려군에게 죽은 왜구가 무려 40만이라는 증거는?
실제로 고려군이 왜구와 싸우 최대 규모의 전투에서도 왜구의 최대 규모는 2만 정도였고.
애초에 나중에 일본이 대규모로 조선 침공했을때 규모도 20만이데 그보다 이전인 그 시절 쳐들어온 왜구들 다 합쳐도 40만은 절대 안되는데.
                         
자기자신 21-08-07 20:09
   
12//임진왜란때 평지에서 백병전했다는기록이 없는데 뭔소리  정작 그일본군도 매복과기습으로 공격했는데  ㅋㅋㅋㅋㅋㅋㅋ
                         
yj12 21-08-07 20:10
   
애초에 저런 식으로 일본수군이 올라타서 어쩔수 없이 근접전 가서는 장수의 지희 능력도 다 필요없고 그냥 백병전 대결이여서 그냥 무조건 백병전 잘하면 이기는 건데 조선수군이 압도적인 숫자빨에도 불구하고 발렸다는건 당시 조선군과 일본군과 근접능력 기술이 상당히 차이가 났다는 것이지.
                         
yj12 21-08-07 20:19
   
일본군이 평지에서 싸워서 이겼던게 탄금대 전투나, 벽제관 전투등 여러 전투들이 있음.
(그리고 탄금대 전투도 조선군 병력이 16000명에 달했다는 설이 있고 그중에서 3000명은 기병이였고 또 신립이 한양에서 데리고 온 정예군도 많아서 전력은 사실 고니시의 1군에 비해서 밀리지 않았고.)
그리고 조선 기록에서도 단순히 지형빨 없이 그냥 백병전하면 도저히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상대가 안된다고 적혀 있는데.
                         
자기자신 21-08-07 20:26
   
12// 탄금대전투에서 조선군은 8,000여명이고 그리고 조선군이 졌던 가장큰이유가 조총때문이고 더구나나 탄금대는 진흙밭이였고 정예군? 기마부대만 정예였고 나머진 훈련이 제데로 안된 병사들이다  벽제관전투도 기습으로 이겼는데  그리고 고려말왜구는 정예부대였다 일본정규군이 해적이 된것임
                         
yj12 21-08-07 21:01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25105&cid=49345&categoryId=49345
애초에 8000명이란 것도 신립이 서울을 떠나서 충추에서 모집한 병력만 8000이고 이미 그 이전에 징비록에 나오듯이 신립이 도성에서 모집한 군사 8000까지 더하면 총 16000명(당시 도성에서 모집한 군대는 수도를 지키는 군대여서 조선의 최정예 핵심 병력이였고.) 그리고 당시 탄금대에서 승리한게 신립의 고니시보다 떨어진 지희력과 운도 어느 정도 작용했지만 근접전 실력에서 밀렸던 것도 한몫했음. 애초에 조선 기록들 보아도 조선의 평균적인 백병전 실력이 일본보다 떨어진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리고 고려말 왜구들이 정규군 수준인건 알고 당시 고려군도 정규군이여서 사실상 정규군vs정규군이 붙었는데도 당시 고려군이 굉장히 고전했기 때문에 사실 한국은 검술이나,창술 이런 백병전에서 일본보다 그닥 우위를 점한 적이 없다는 말임.
                         
자기자신 21-08-07 22:16
   
네이버사이트 주소변경되었다고 뜨고 아무것도 없는데 뭘보고 탄금대전투에 동원된 조선군이 160,000명이냐  선조실록에도 8,000명이다 그리고 조선군이 가장큰 패배원인이 조총이야 신립이 기마부대로 제압할렸고 했지만 탄금대가 비가 온뒤로 진흙밭이 되었고 그틈에 일본군이 조총으로 물리친것고 그렇자 조선군이 우왕좌왕하면서 혼란에 빠지자 일본군이 백병전을 시도했어 이긴것데 무슨 닥돌했어 백병전으로 다 이긴것마냥 왜곡하네
                         
자기자신 21-08-07 22:56
   
12//병력수도 틀리네 8,000명에서 또 8,000명이면 총16,000명인데 16만이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기자신 21-08-07 23:03
   
12//일본군이 불과 십여 일 만에 경상도를 장악하고 조령을 넘보게 되자, 조정에서는 북방 야인(野人) 소탕으로 명성을 떨치던 신립을 삼도도순변사로 임명하여 충주로 보냈다. 신립 예하의 군사는 중앙군과 인근 지역의 충청도 관군을 포함하여 총 8,000여 명이었다.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51165&cid=62050&categoryId=62050
국립중앙도서관  네이버사이트다
                         
yj12 21-08-07 23:47
   
160000명이라고 쓴건 순간적으로 실수로 0을 하나 더적은 내 오타였음.
그리고 애초에 탄금대 전투당시 조선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음.
8000은 말그래도 최소 수치임. 신립이 충주로 가서 모집한 군대가 8000이기 때문에 도성에서 받은 정규군 까지 합치면 그것보다는 훨씬 많았을 것이고.(그리고 네이버 주소는 오류나서 다시 올렸음. 가끔씩 이럼.) 그리고 탄금대에서 조선이 패배한게 결정적으로 조총도 아니고 그냥 신립의 전술 부족으로 진것임. 애초에 비가와서 전부다 진흙이 된 상태인데도 기마병으로 무식하게 돌격한게 진짜 신립의 멍청한 자충수였고 그래서 조선의 기마병은 일본 조총한테 휼륭한 과녁거리에 불과해졌고 .거기다가 신립은 당시 고니시가 자기를 양측에서 포위하고 있는 상태인데도 모르고 있었으니. 안 그래도 이미 전술적으로 패배해서 밀리는데 그 상태로 백병전으로 돌입해서  백병전에서 까지 밀리니 그런 압도적인 참패가 났다는 말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25105&cid=49345&categoryId=49345
                         
자기자신 21-08-08 00:20
   
대간이 대신(大臣)을 체찰사(體察使)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검독(檢督)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계청하였다. 이산해(李山海)가 유성룡(柳成龍)을 보낼 것을 청하니 따랐고 김응남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성룡이 신입(申砬)에게 계책을 물으니, 신입이 말하기를,

"이일이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후속 병력이 없다. 체찰사가 내려간다 하더라도 전투하는 장수가 아니니 무장(武將)을 급히 먼저 보내 이일을 지원하도록 하여야 한다."

하였다. 이에 성룡이 김응남과 청대(請對)하여 신입을 먼저 보내기를 청하자, 상이 신입을 불러 하문하니 신입도 사양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았다. 성룡이 즉시 모집한 장사(壯士) 8천 명을 신입에게 소속시켜 떠나게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할 때에 상이 신입을 인견(引見)하고 보검(寶劒)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일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참(斬)하라."

하였다. 당시에 상이 김여물(金汝岉)의 재능과 용맹을 아까와하여 방어해야 할 긴요한 곳에 정배(定配)시켜 공을 세워 보답하도록 명하였다. 여물이 출옥(出獄)하자 성룡이 불러 계책을 의논해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여물을 처음 보고 병사(兵事)를 의논해 보니, 무용(武勇)과 재략(才略)이 남보다 뛰어날 뿐만이 아닙니다. 막중(幕中)에 두고 계책을 세우는 데 자문하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신입이 또 청하기를,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진영을 맡았을 적에 여물을 알았는데 재능과 용맹 뿐만이 아니라 충의(忠義)의 인사였습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가게 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또 따랐다. 신입이 거느린 것은 도성의 무사(武士)·재관(材官)과 외사(外司)의 서류(庶流)·한량인(閑良人)으로 활을 잘 쏘는 자 수천 명이었다. 조관(朝官)으로 하여금 각기 전마(戰馬) 한 필씩 내어 돕도록 하여 떠나 보냈는데, 인근 고을에서 거둔 군사는 겨우 8천 명이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4014_006

선조수정실록임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병력 8,000명이 맞음
                         
yj12 21-08-08 00:32
   
니가 올린 기록에서도 유성룡이 모집해서 신립에게 준 군사가 8000, 그리고 신립이 따로 인근 고을에서 모집한 군사가 8000 , 총 16000명이라고 되어 있는데?
                         
자기자신 21-08-08 00:48
   
12//뭐가 16,000이냐 제데로 읽었니 겨우 8,000명이다 라고 나오는데 만약 니말데로라면 실록에 다합쳐서 16,000명이다 라고 나와야지  겨우 8,000이다 라고 뭘로 설명할래
                         
자기자신 21-08-08 00:55
   
12//국조인물고 신립에 관한 기록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946374&cid=62132&categoryId=62132
여기서도 수천명이라고 나온다  모두 끌어모아놓은 병력이
                         
yj12 21-08-08 00:58
   
니가 올린 기록 안보임?

이에 성룡이 김응남과 청대(請對)하여 신입을 먼저 보내기를 청하자, 상이 신입을 불러 하문하니 신입도 사양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았다. 성룡이 즉시 모집한 장사(壯士) 8천 명을 신입에게 소속시켜 떠나게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할 때에 상이 신입을 인견(引見)하고 보검(寶劒)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일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참(斬)하라."

하였다. 당시에 상이 김여물(金汝岉)의 재능과 용맹을 아까와하여 방어해야 할 긴요한 곳에 정배(定配)시켜 공을 세워 보답하도록 명하였다. 여물이 출옥(出獄)하자 성룡이 불러 계책을 의논해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여물을 처음 보고 병사(兵事)를 의논해 보니, 무용(武勇)과 재략(才略)이 남보다 뛰어날 뿐만이 아닙니다. 막중(幕中)에 두고 계책을 세우는 데 자문하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신입이 또 청하기를,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진영을 맡았을 적에 여물을 알았는데 재능과 용맹 뿐만이 아니라 충의(忠義)의 인사였습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가게 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또 따랐다. 신입이 거느린 것은 도성의 무사(武士)·재관(材官)과 외사(外司)의 서류(庶流)·한량인(閑良人)으로 활을 잘 쏘는 자 수천 명이었다. 조관(朝官)으로 하여금 각기 전마(戰馬) 한 필씩 내어 돕도록 하여 떠나 보냈는데, 인근 고을에서 거둔 군사는 겨우 8천 명이었다.
 이 기록보면 신립이 도성을 떠나기 전에 유성룡이 미리 준 군사가 8000이고 신립이 도성을 떠난후 따로 인근 고을에서 거둔 군사가 8000이라고 나오는데.
즉 유성룡이 준 군사 8000에다가 신립이 도성을  떠난후 인근 고을에서 추가로 모은 병력 8000더하면 총 16000인 것이지.
                         
자기자신 21-08-08 01:13
   
12//뭐래 자세히봐라 8,000명을 소속시킨게 모으라는것잖아 그리고 바로 떠난게 아니라 떠나게하였다 즉 떠날준비하였다 또 도성인근마을이라는것 못들었니 신립이 모아놓은 병사가 수천명 도성인근마을 모아넣은 병사가 총8,000명 니말데로라면 만약 16,000명이였으면  실록에 나와야지  성룡이 모은병사 8,000명에다가 신립이 인근마을에 모은 병사가 8,000명이였다 그렇게 모은병사가 총16,000명이 모였다라고 실록에 나와야지 왜 겨우 8,000명이였다고 왜 나오냐
                         
자기자신 21-08-08 01:28
   
부산에 상륙한 왜군 대병력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4월 20일 신립을 도순변사로 임명하여 이를 막게 하였다. 신립은 도성을 떠나 남하하면서 군사 8,000여명을 모아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25105&cid=49345&categoryId=49345

니말데로라면 네이버역사백과사전에도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이 16,000명이라고 나와야지 왜 8,000명이라고 나오냐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에 네이버사이트에도 8,000명이라고 나온다
                         
자기자신 21-08-08 01:35
   
아 그리고 토전사에 임용한교수도 탄금대전투에 동원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 총병력이 8,000명이라고 나온다
https://dbr.donga.com/article/view/1206/article_no/6701/ac/magazine
                    
yj12 21-08-07 19:05
   
뭐 조선에서도 몇몇 장수들이나 일부 군사들은 일본군보다 백병전에서 뛰어날수 있겠지.
근데 난 그런 몇몇 일부분이 아닌 전체를 비교해서 말하는 것임.
                         
국산아몬드 21-08-07 21:56
   
이것봐요 개전 2개월까지는 열세였다고 인정했어요. 용인 전투 후부터는 놀라운 전투력을 보여줍니다. 웅치, 이치 전투는 거의 평지전투였어요.
병력도 10대 1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겼죠. 충주성 전투에서도 성에서 나온 왜구와 접전해서 이겼고 경주성, 영천성 전투 같은 경우는 공성전투로 성을 탈환한 겁니다

개전 2개월 후부터 전투에서 조선군이 왜군에 밀렸다는 증거가 있어요?
있으면 가져와 보세요

고려말 왜구와 26년간 전쟁을 치렀어요
중요한 전투에서 죽은 왜구가 그 정도 되요
                         
yj12 21-08-07 22:13
   
웅치나 이치는 조선군이 높은 언덕에서 미리 방어시설 펼쳐서 방어진 단단하게 치고 싸웠던 전투고(그것도 웅치같은 경우는 졌고)그리고  개전 2개월 후부터 무슨 조선군이 일본군에 우위였다는 것도 헛소리인게 당시 조선은 2개월 이후부터도 수군은 몰라도 육군같은 경우는 그 이후에도 임진강 전투 3차 평양성 전투같이 육전에서 많이 털렸고 그리고 1593년 명나라에서 대규모 지원군 오기 전까지 평양성 하나 단독으로 탈환하지를 못했는데 무슨.
애초에 조선이 한양을 탈환한 것도 개전 이후 1년이 지나서고.
그리고 고려말 죽은 왜구가 무려 40만에 달했다는 기록이나 올려보셈 그럼.
                         
국산아몬드 21-08-08 12:02
   
겨우 찾아낸게 평양성 3차 전투냐?
공성전투를 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전세가 역전되었다는 뜻이야
그리고 그 전투외에 조선 육군이 밀린 전투가 있냐?
                         
yj12 21-08-08 13:13
   
애초에 조선이 육지에서 단독으로 일본의 주요 핵심 성 하나 점령한 적이 있음?
평양성도 명나나랑 연합에서 간신히 탈환한 수준이고 조선이 육지에서 이긴 전투들도 거의 대부분 수성전같은 방어전 위주라 조선은 명나라에서 대규모 지원군 오기 전까지 계속 제대로 된 공격은 못해보고 방어 위주로 싸우기에도 급급했는데.
거기다가 정유재란때도 단독으로 일본의 주요 핵심성 하나 점령하지 못해서 명나라 대규모 지원군하고 연합해서 간신히 공격했고 그것도 전쟁 끝날때까지 전부다 실패했고.
                         
국산아몬드 21-08-08 14:06
   
너는 그럼 조선군은 수비만 했는데 왜군이 제풀에 지쳐서 물러났단 건가?
말이되냐?

정문부 북관 대첩은 쌈싸먹었니? 권율의 행주산성 전투가 왜 일어났는데?
서울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할려고 북진하다가 벌어진 전투다.
이것도 너는 수비라고 하냐?
경상도가 어떻게 회복되었니? 경주성 전투, 영천성 전투 등 공성으로 성을 탈환한거다

수비든 공격이든 용인전투 후 부터는 왠만하면 다 이겼다
그것도 10배 이상 되는 왜군을 상대로 이겼다

그리고 웅치,이치가 높은 구릉이라고 유리하다고 했냐?
몸을 가릴 수 있는 벽하나 없는데서 10배의 병력과 맞서 싸워 이겼다
너는 이것이 쉬운거라고 생각하니?
                         
yj12 21-08-08 15:08
   
애초에 웅치나 이치는 조선군이 지형에서 유리한 언덕에서 싸웠던 것이고 그것도 웅치는 졌고 그리고 행주야 당시 일본 입장에서야 안그래도 조명연합군이 한양을 공격할 위험이 있는데 당시 행주에 있는 조선군이 후방에서 공격하면 힘들어지니 그걸 배제하기 위해서 먼저 선빵을 때린 것이고 그것도 행주 같은 경우는 조선군이 높은 언덕에서 싸우면서 온갖 신기전,총통들로 도배해서 싸워서 이겼으니 지형빨+무기빨로 싸워서 이겼던 것.
그리고 일본이 결국 전쟁에서 졌던것 일단 수군이 계속 져서 더이상 보급도 안되고 거기다가 명나라까지 대규모 지원군을 보내서 전황이 불리해져서 진것이지.
애초에 일본은 한양을 내주고도 10만이나 되는 대군을 모아서 군사작전에 동원했을 정도인데 언제 조선이 단독으로 그렇게 대규모 대군을 모아서 군사작전에 한번이라도 동원시켜본 적이 있음?
1592년 4월 14일날 소서행장이 부산성 공격했으니까..
2개월이면, 1592년 6월 14일인데.
6월 15일이 소서행장이 평양성 입성하던 날입니다.
명군 본진이 압록강을 도하한게, 1592년 12월이고, 1593년 1월에 조명연합군이 평양성 포위하는데.
1592년 4월에 터진 전쟁,
1592년 그 해 끝까지 선조는 의주에 쳐박혀 명나라에 망명 타진하고 퇴짜맞고
국토 정중앙도 아니고 국토 끝자락에서 개꼬라지였는데..
1592년에 신립이 1차로 망하고, 임진강에서 2차로 망하고, 용인에서 코메디하고..
일부 잘 싸운 의병을 빼고 1만 단위 군대라도 후방에서 왜군과 필드에서 대적한 군대가 있었나요?

일본이 전황을 주도한건 2개월?
나머지 6년간 해안에 갇혀..? 역사를 다시 써야겠네요
                         
국산아몬드 21-08-08 15:29
   
웅치에서 졌다고? 니 말대로라면 전라도는 뚫렸어야지. 말이 되냐?
웅치전투와 연이어 벌어진 전주성 전투에서 이겨서 결국 막아내었단다

너 진짜 역사 날조하고 그럴래?

명나라까지 대규모 지원군을 보내서 전황이 불리해져서 진것이지?????

명나라가 평양성 탈환한거 외에 공적이 뭐 있어? 있다면 한번 증거를 대어보지
임진왜란이 평양성만 탈환하면 끝나는 거냐?
도데체 명나라가 임진왜란 동안에 무슨 전공이 있다고 빨고 있냐?

일부 잘 싸운 의병을 빼고 1만 단위 군대라도 후방에서 왜군과 필드에서 대적한 군대가 있었나요????

서울 수복은 어떻게 했을까?
행주대첩으로 1만명 죽이고 그 직후 벌어진 노원평 전투에서 왜군 1만명 가까이 죽이고
이기고 식량창고 불태우니까 1년만에 수복한거 아냐?

함경도는 어떻게 수복되었을까? 정문부가 북관대첩으로 1만명 이상을 죽여버리니 물러난거 아닌가? 게다가 한양도 수복되고

경상도는 왜 탈환되었을까? 영천성 전투, 경주성 전투 등으로 죄다 회복했으니 물러난거 아닌가?

전라도는 어떻게 막아내었을까
1차 진주성 전투도 훌륭했지만 2차 진주성 전투에서 4만명의 왜군을 죽이면서
막대한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막아낸거 아냐

황해도는 어떻게 막아내었을까?
이정암이 연안성 전투에서 6000명의 왜군을 막아내었단다

이 대부분을 의병이 했니? 명군이 했니?  죄다 조선 육군이 했단다
게다가 대부분 10대 1 정도의 열세에서 이긴 성과다
넌 이래도 왜군이 1년만에 남해안으로 철수한 이유가 평양성 하나 달랑 수복한 명군에 있다고
보는거니? 아니면 행주대첩, 북관대첩, 진주성 대첩, 경주성 탈환등의 전투를 치른
조선 육군에 있다고 보는거니?
누가 더 븅신같은거야? 나냐 너냐?

내가 없는 역사 지어내는 거니?
넌 도데체 무슨 역사를 알고 있는거니?
                         
yj12 21-08-08 15:48
   
웅치전투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0222&cid=46622&categoryId=46622
백과사전에서도 명백히 졌다고 나오는데.
그리고 일본이 전라도 진출에 실패한건 애초에 웅치에서도 이겼지만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치에서도 졌고 거기다가 일본이 전라도를 공격할려고 할때 동시에 고경명이 의병들이 금산성을 치면서 일본군의 후방을 공격했기 때문.
거기다가 일본이 행주와,노원평에서 각각 1만명 죽었다는 기록이라도 한줄 올리시지?
거기다가 한양으로 돌아온 가토군이 2만 2000에서 13000명으로 줄었들었는데 이건 애초에 가토군이 1년동안의 계속된 전투로 인한 손실 거기다가 동상에다가 병사로 인한 사망자까지 다해서 그정도고 1년동안 2만 2000에서 13000으로 줄었들고 다고 해서 무슨 북관전투 한방에 1만이 줄었들었다는건 코메디고.
거기다가 2차 진주성에서도 일본군이 4만이라 죽었다는 기록이라 올리시지? 말로만 하지말고.(그전에도 고려말 죽은 왜구가 무려 40만이라고 기록 한줄 없이 헛소리 해되더만)
거기다가 명군이 이긴 전투는 없었도 명나라 때문에 평양성을 탈환할수가 있었고(명나라 없었으면 조선은 1년 가까이 지나도 평양성 하나 단독으로 탈환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리고 명군이 비록 이긴 전투는 별로 없지만 그래도 명군이 진 울산성, 순천성 이런 전투에서도 일본군 역시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전쟁이 그나마 7년안에 끝날수 있었던것.
애초에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수비하는 쪽의 최소 3배이상에서 많으면 10배까지 필요한데 당시 부족한 조선 군사력에서는 명나라 도움 없이는 일본군의 그런 주요 주요성 하나 단독으로 공격을 못하는 입장이였고 또 명나라 군이 참전을 하니 일본군도 명나라 군하고도 싸워야 하는 입장에라 쉽게 단독으로 조선군을 공격을 못해서 그 사이에 조선군은 병력을 재정비 할수도 있었고.
그리고 조선이 이긴 전투들도 보통 그런 수성같은 지형빨이나 아니면 우수한 화력으로 무기빨  받으면서 싸웠던 전투이고 조선군이 무슨 일본군보다 백병전을 잘해서 이겼던게 아님.
그래서 조선 기록에서도 조선군이 평균적으로 일본군보다 검술이나 창술같은 근접전에서 뛰어나다는 기록은 있음? 오히려 일본이 뛰어나다는 반대의 기록들만 가득한데.
                         
국산아몬드 21-08-08 16:14
   
일본이 전라도 진출에 실패한건 애초에 웅치에서도 이겼지만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치에서도 졌고?????

그건 니가 역알못이라 그런거야
웅치전투는 웅치전투와 그 이어 벌어진 전주성 전투까지 합쳐서 말하는 거야
전주성 전투에서 웅치를 돌파하고 들어온 왜군을 물리쳐서 결국 막아낸거야

그리고 웅치와 이치는 별개인데 이치에서 졌다고 웅치를 뚫은 일본군이 물러가겠니?
너는 진짜 생각이란 걸 모르니?

노원평 전투에 대해서는 행주대첩보다 큰 전투였다는것이 대체 정설이고
황현필 선생 동영상을 참고해 보기 바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70s4YlQHLQQ

명나라 없었으면 조선은 1년 가까이 지나도 평양성 하나 단독으로 탈환하지 못했을 것이고 ???????

너는 평양성이 왜군의 종세 종말점인것을 모르니? 이미 보급이 바닥났는데 어떻게 버텨?
너 진짜 바보 인증이니?

명군이 비록 이긴 전투는 별로 없지만 그래도 명군이 진 울산성, 순천성 이런 전투에서도 일본군 역시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전쟁이 그나마 7년안에 끝날수 있었던것.?????

왜군이 물러난 것은 토요토미가 죽어서이지 명군때문이 아니란다 제발 정신차려
그리고 이긴 전투가 없는데 무슨 공적이 있어?
이놈 진짜로 황당하네

오히려 일본이 뛰어나다는 반대의 기록들만 가득한데????
일본이 뛰어나다는 기록은 임진왜란 초반에만 있었던 것
이후에는 조총의 약점도 파악해서 공세를 이어갈 수 있었지

그리고 10대 1의 열세에서 공성을 하거나 싸울려면 단병접전 능력이 없으면 안됨
충주성 전투 같은 경우 조헌이 5대 1의 열세속에서도 평지에서 왜군을 물리쳤음
활로 했겠니? 의병인데.

그 기간과 횟수도 1350년~1392년까지 42년간 394번이나 침략했다
고려말 40만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큰 전투에서 죽은 숫자만 10만이 넘는데
40년동안 얼마나 죽었겠니?

이성계의 해주 전투(1377년), 지리산 전투(1377년),최영장군의 홍산전투(1376년)은 주요 전투이나 전과를 찾지 못해서 넣지도 않았다

1348년 해남 전투 7,500명(최영),
1350년 부산 전투 6,000명(최영)
1358년 황해도 장연군 전투 18,000명(최영)
1363년, 진해 전투 3000명
1373년, 삼일포 전투 2000명
1376년 홍산대첩 20척 규모 사망자 미상
1377년 해주 전투 사망자 미상 (이성계), 지리산 전투 사망자 미상  (이성계)
1378년 황해도 해풍 30,000명(최영,이성계)
1380년 황산대첩 20,000명(이성계),진포 대첩 500척 20000명(최무선)
1383년 관음포 전투 2000명(정지장군)
1358년 오예포전투 400여 척
                         
yj12 21-08-08 16:24
   
보통 웅치전투는 웅치에서만 벌어진 전투를 말하지 전주성 까지 합쳐서 말하지는 않지.
정주성에서는 제대로 된 전투가 벌어진 적이 없는데.
그리고 님이 아무리 명나라 군을 폄하하고 싶다고 하지만 명나라 군 때문에 죽은 왜군도 상당하고 평양성도 빨리 탈환해서 전쟁을 빨리 끝날수 있게 하고 거기다가 명나라 군때문에 일본도 명군까지 상대해야 해서 명나라 군이 오고 나서는 일본도 더 이상 조선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한 것도 팩트인데.
거기다가 평양성 전투 이전에 조선은 주로 성에서만 틀여박혀서 싸웠지 여전히 주요 핵심 성들은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고.
그리고 니가 죽었다고 하는 전투에서 일본군이나 왜구가 그많큼 죽었다는 기록이나 올리시지?
                         
국산아몬드 21-08-08 16:34
   
보통 웅치전투는 웅치에서만 벌어진 전투를 말하지 정주성 까지 합쳐서 말하지는 않지.????

정주성이 아니라 전주성 전투
웅치, 이치 전투의 최종 목표가 전주성 사수이니 전주성전투까지 포함시켜야 맞는것
https://www.youtube.com/watch?v=Nw8oXa7BNmw

님이 아무리 명나라 군을 폄하하고 싶다고 하지만 명나라 군 때문에 죽은 왜군도 상당하고?
?????

헛소리 하지마라 도데체 얼마나 죽였는데? 증거 있냐?

평양성도 빨리 탈환해서 전쟁을 빨리 끝날수 있게 하고?????

평양성전투는 1593년 2월이다 아직 6년 남았거든
108회 전투중에 겨우 1회 이긴걸로 전쟁 다 한것처럼 구라치냐?

명나라 군이 오고 나서는 일본도 더 이상 조선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한 것도 팩트인데.????

도데체 너는 어느 별에 살고 있는거니?
너는 행주대첩, 진주성 2차 전투, 노원평 전투가 명군 오기전에 발생한 거냐?
총 108회의 전투가 그럼 명군오기전에 발생했니?

평양성 전투 이전에 조선은 주로 성에서만 틀여박혀서 싸웠지 여전히 주요 핵심 성들은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고????

니 주장은 평양성을 빼앗기고 나니 왜군이 자진해서 중요 성들을 일본이 돌려줬다는 거냐?
말이 되는 소리냐 지금?
그런데 왜군이 장악했다는 주요 성이 뭔지나 말해봐라. 도데체 뭐가 있는지
왜군은 점을 점령했을 뿐이지 대부분 영토는 조선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뭘 알고나 지꺼려

니가 죽었다고 하는 전투에서 일본군이나 왜구가 그많큼 죽었다는 기록이나 올리시지?
위에 적었으니까 실컷 봐라

이거 뭐 왜뽕도 정도가 있지. 넌 막 우겨대면 진실이 되냐?
                         
yj12 21-08-08 16:42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도 웅치전투는 보통 웅치에서만 싸운걸 말하는데 전주성 까지 정 포함시키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가.
그리고 애초에 일본이 조선에게 육지에서도 진적은 있었지만 주로 수성같은 조선이 지형빨등을 이용해서 이긴 것이고 일본이 그전까지 자신들의 핵심성은 점령당한 적이 없는데 명나라 군이 대규모로 참가하면서 명군에게 이제는 자신들의 핵심 성까지 점령당하자 일본은 더욱더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또 훈련된 대규모 명군까지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는 적이 더 늘어나서 함부로 쉽게 공격 못한건데.사실 일본 입장에서도 명군이 참여하면서 평양 ,개성 내주고 한양 바로 앞까지 밀리면서 벽제관에서 이겼다고는 하지만 명군은 여전히 쉽게 볼수 있는 상대가 아니였고.
거기다가 비록 조선이 지형의 이점이나 이런걸 이용해서 여러번 이긴적은 있지만 여전히 명군이 와서  평양성에서 밀리기 전까지 일본은 자신들의 점령한 주요 핵심 성들은 전부다 유지하고 있었고.
                         
국산아몬드 21-08-08 16:49
   
일본이 그전까지 자신들의 핵심성은 점령당한 적이 없는데???

도데체 왜군이 점령한 핵심성이 어디 있니? 있으면 증거를 대 보든가

명나라 군이 대규모로 참가하면서 명군에게 이제는 자신들의 핵심 성까지 점령당하자 일본은 더욱더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또 훈련된 대규모 명군까지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는 적이 더 늘어나서 함부로 쉽게 공격 못한건데.??????

감상문 쓰지마라. 왜군이 뭘 함부로 공격 못해?

평양성 탈환 이후 전투가 없었니?
행주대첩, 진주성 2차 전투등은 그 전에 일어났던 거니?

도데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니 헛소리에 더이상 상대할 여력이 없다
수준도 안되는게 나대고 있어
                         
yj12 21-08-08 16:55
   
부산이나, 한양, 평양 같은 당시 이런 유명한 일본군의 점령해서 핵심 거점이 되었는 성들을 말하는 것인데?
언제 그런곳이 명군이 대규모 지원군 오기 전까지 조선이 단독으로 공격해서 점령에 성공한 적이 있었음?
조선이 그전에 이겼었던 전투들도 주로  수성전 위주였는데.(즉 계속 제대로 된 공격은 못해보고 방어에만 치중했다는 말)
그리고 명군이 대규모 지원군 온 이후로는 정유재란 이전까지 일본이 먼저 선빵 날린 전투도 행주나 진주성 이 2개밖에 되지 않았던 것도 현실
                         
국산아몬드 21-08-08 17:02
   
한양 수복은 행주산성 전투, 노원평 전투, 그리고 식량창고 불태워서 왜군이 물러난 것이고

부산은 뜬금없네. 부산까지 점령하면 임진왜란이 끝난 것인데 왜 부산을 들먹거려

한반도에 평양, 서울, 부산만 있니?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선 팔도에는 핵심 성들이 없다는 거야?

제발 괘변 좀 그만 부려
                         
yj12 21-08-08 17:05
   
그래서 조선이 부산 말고도 명군이 대규모 지원군 오기 전까지 일본의 작은 성들 말고 제대로 된 큰성을 단독으로 공격해서 제대로 점령한 적이 있음?
그 전까지 조선군은 방어에만 치중하는데도 급급한 상황이였는데.
니가 아무리 우겨도 당시 조선은 일본의 제대로 된 핵심 거점 하나 단독으로 점령 못해서 명나라 군이 와서야 겨우 탈환한게 팩트인데.
                         
국산아몬드 21-08-08 18:15
   
1592년 7월 26일 영천성 탈환
1592년 9월 7일  경주성 탈환
1592년 9월 6일 충주성 탈환
1593년 1월 29일 길수성 탈환


많은데? 넌 도데체 뭘 보고 없다는 거니?

왜군은 그냥 밀고 들어와서 평양성, 한성 정도만 점령했지 그 외 지역을 점령은 못했단다
그러니까 조선은 위의 성외에는 중요한 성을 빼앗긴 적이 없어

너는 조선군이 수비에만 급급했다면 왜군이 1년만에 남해안까지 밀려난건
누구 덕분이라고 보는거니?
평양성 빼앗겼다고 남해안까지 철수했다고 보는거야?

진짜 개 싸이코네 ㅎㅎㅎ
너같은 싸이코하고 말 섞는게 인생의 낭비다
니 맘대로 해라
                         
yj12 21-08-08 18:26
   
1592년 9월 6일은 충추성이 아니라 청주성이고.
그리고 일본이 평양성,한성만 점령하고 그 외 지역은 점령 못했다는 기록이나 올리시지.
(일본이 점령한 지역이 평양성, 한양 뿐이고 전쟁 내내 계속 적을 압도해서 당시 조선 전체가 초토화가 되고 전쟁이 몇년도록 진행 되었는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초에 가토군만 하더라도 함경도 끝까지 갔고 그때당시 조선은 진주성 전투때까지 진주성 하나만이라도 더 이상 뚫리기라도 하면 곧바로 호남까지 점령당할 위기여서 국가 멸망 직전의 위기였는데.
그리고 당시 일본의 가장 핵심 거점 3개가 부산, 한양, 평양 이 3개인데 조선군이 여러 작은 성들이야 점령해도 이 3개 핵심 거점 성들은 단 한개도 단독으로 점령하지 못했지.
그리고 당시 일본과 전투 목록들을 보아도 육전은 조선군이 방어위주로 싸운 전투들이 훨씬 더 많은게 현실이고.
일본이 졌던 이유는 당시 수군에서 져서 보급이 제대로 안되었고 거기다가 애초에 일본의 전술이 왕만 잡으면 끝난다는 작전이여서 무조건 앞으로만 진격해서 후방에 보급을 상당히 안일하게 했고 거기다가 조선은 주로 수성위주로 싸운데다가 지형적으로도 이점을 많이 알아서 훨씬 유리했고(거기다가 당시 조선은 거의 대부분이 산지였고)또 일본이 생각 못했던 의병들도 있었고 당시 명나라에서도 대규모 지원군까지 오니 일본이 1년만에 결국 남해안으로 후퇴한 것인데.(그것도 일본이 남해안으로 대규모로 퇴각한 것도 전쟁 터지고 1년이 넘게 지나서고)
          
토막 21-08-07 17:10
   
무사들은 칼을 차고 다니고 병사들은 창을 들고 다녔죠.

전투는 창이 하고 칼은 민간인 학살용..
               
yj12 21-08-07 17:15
   
병사들도 창만큼은 아니지만 칼을 차고 다녔음.
당시 조선 기록들을 보아도 일본vs조선 검술 실력을 비교하면  칼을 든 일본군의 검술실력은  도저히 조선군이 대적할수가 없었다고 나오는데.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12027_005
                    
토막 21-08-07 17:46
   
일부 돈있는 애들의 보조 무기죠.
칼은 아무리 잘나봐야 보조무기.

뭐 일본이 검술 실력이 좋을 수 있죠.
온갖 양아치 들이 칼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썰고 다녔으니.

조선시대는 지금과 같이 병기의 개인 소유를 금지 했습니다.
일본처럼 아무나 칼들고 다니면서 사람 썰고 다닌 나라가 아니였다고요.

그런데 참 재미있는게.
일본의 전통 검술이라는거 보면.. 거의 대부분이.
상대가 칼을 뽑기 전에 베는거..
심지어 상대한테 업드려 절을 하다 칼빼서 베는것도 있고.
통수의 민족답게 검술이란 것도 죄다 그런거.

한마디로 전쟁에서 쓰는 검술이 아님.
                         
yj12 21-08-07 18:04
   
일본도 무사라고 해서 당시 아무나 썰고 다니는건 불법이였고. 그리고 일본도 도요토미 히데요가 전국 통일 하고 난 이후에는 더이상 아무나 병기를 개인 소지하는걸 금지했고.(애초에 그때당시 백성들은 다이묘한테 세금내고 노동력에 동원되는 다이묘의 재산이였기 때문에 아무리 사무라이라고 해도 다이묘 밑에 있는 사무라이가 그런 식으로 함부로 다이묘의 재산을 건드릴수가 없었서 주로 그런 범죄들은 일본내 사회에 불만을 품은 실직한 낭인들이 자행했고. 지금의 묻지만 범죄처럼)
거기다가 일본의 검술은 실제로 전쟁에서 쓰기 굉장히 유용한 검술들이 발달되었음.
https://www.ppomppu.co.kr/zboard/view.php?id=freeboard&no=7043185
당시 조선 기록에서는 가장 덩치고 크고  동아시아 최강 군대인 후금(훗날 청나라)의 군대도 일본에게 검술 실력에서는 안되었다고 평가함.

오랑캐(후금) 군사는 돌격전을 벌여 마구 덤비는(馳突亂戰) 데만 능할 뿐이고 예리한 검을 활용하는(銳利劍之妙用) 데는 도저히 왜놈만 못하다. 더구나 왜놈의 변사(變詐)와 흉계란 실로 추측할 수 없었지만 그 예리한 장검도 우리의 굳센 화살을 못 당했고 그 변사와 흉계도 우리의 임기응변 앞에는 소용이 없었다. 다만 인심이 해이하여 힘껏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왜놈에게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속잡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33A_0020_000_0060
                         
yj12 21-08-07 18:35
   
https://www.ppomppu.co.kr/zboard/view.php?id=freeboard&no=7043185
(일본군이 직접 평가한 조선군의 검술과 창술.)

산 위로 올라가 진을 치고 있는 것이 수만 명이 되니, 모든 군사들이 보고는 겁을 냈으나, 이미 칼을 빼들고 접전해 와서 갑자기 헤어날 수가 없었다. 이때 제독이 인솔하던 군사는 모두 북방의 기마병으로 화기가 없고, 짧고 무딘 칼을 가지고 있었다. 적의 보병들은 모두 3, 4척이나 되는 긴 칼을 가졌는데 날카롭기가 비길 데 없었다. 그들과 충돌하여 싸울 적에 좌우로 후려치니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져 그들의 예봉을 감당할 자가 없었다.
(서애집)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224B_0170_010_0010

오랑캐(후금) 군사는 돌격전을 벌여 마구 덤비는(馳突亂戰) 데만 능할 뿐이고 예리한 검을 활용하는(銳利劍之妙用) 데는 도저히 왜놈만 못하다. 더구나 왜놈의 변사(變詐)와 흉계란 실로 추측할 수 없었지만 그 예리한 장검도 우리의 굳센 화살을 못 당했고 그 변사와 흉계도 우리의 임기응변 앞에는 소용이 없었다. 다만 인심이 해이하여 힘껏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왜놈에게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속잡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33A_0020_000_0060

비망기로 일렀다. "우리 나라 습속은 남의 나라의 기예를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고 더러는 도리어 비굴하게 여긴다. 왜인의 검술은 대적할 자가 없다. 전일 항왜(降倭) 다수가 나왔을 때 그 중에 검술이 극히 묘한 자가 많이 있었으므로 적합한 자를 뽑아 장수로 정하여 교습시키도록 별도로 한 대열을 만들라고 전교를 하기도 하고 친교를 하기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끝내 실시하지 않고 그 항왜들을 모두 흩어 보냈다. 원수의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고 있는데 시속의 습관이 이와 같으니 가탄할 일이다. 지금 이판(吏判)이 도감에 있으니 족히 그 일을 할 만하다. 별도로 한 장수를 뽑고 아이들 약간 명을 선택하여 한 대열을 만들어서 왜인의 검술을 익히되 주야로 권장하여 그 묘법을 완전히 터득한다면, 이는 적국의 기예가 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인데, 어찌 유익하지 않겠는가? 훈련 도감에 이르라."
『선조실록』 1594년 12월 27일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12027_005


당시 일본의 실전에서 검술 실력은 사실 동아시아 최강이 맞음.
그리고 일본도 역시 창보다 활용도가 낮았을뿐 실제로는 나름 실전에서 효율적으로 잘만 쓰였고.
                         
국산아몬드 21-08-08 14:27
   
니가 가져온 기록은 벽제관 전투를 말하는 거잖아
그 전투에서도 매복과 기습으로 이겼고 일본도는 그런 매복과 기습전에만 유용했음
가토가 노토 부락에 쳐들어갔을때는 탈탈 털렸음
                         
yj12 21-08-08 15:53
   
사실 그때당시 여진족은 그냥 이전의 여진족 수준이 아닌 누르하치가 거의 부족들을 통일한 상태여서 그 이전에 여진족들과는 차원이 달랐고 거기다가 여진족은 기병이니.
그리고 칼은 공성전을 할때도 꼭 필요한 무기임.
애초에 창이 평지에서 유용하다고 하지만 공성할때는 그 무겁고 긴 창을 들고 사다리를 오를수가 없으니.
                         
국산아몬드 21-08-08 16:14
   
노토부락은 선조가 임진왜란 후에 2만의 군대로 초토화 시킨 부락임
뭐가 차원이 달라
                         
yj12 21-08-08 16:27
   
애초에 그때당시 조선도 대규모 정예 기병으로 상대해서 이긴 것이고.
애초에 일본군 같은 경우는 그냥 보병이였는데 당연히 기병하고 보병이 붙으면 기병이 훨씬 유리하고.
                         
국산아몬드 21-08-08 16:45
   
이래 저래 변명만 하는데 니가 말하고 싶은게 뭐냐?
                         
yj12 21-08-08 16:50
   
그러니깐 내말은 실제로 일본의 검술 실력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이였고 일본도 역시 무슨 쉽게 부러지거나 이런 칼이 아닌 그래도 나름은 쓸만한 칼이였다는 것.
               
자기자신 21-08-07 19:21
   
12//가토 역시 오랑캐 즉 야인여진과의 전투에 패하여 함경도로 퇴각한다. 일본측 문헌에서는 가토가 오랑캐의 도성인 엔탄을 포함하여 13개 지역을 함락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가토가 야인여진 세력에 패하였음을 감추기 위한 근거 박약한 주장일 뿐이다.  https://www.google.co.kr/am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11/2015101101263.html%3foutputType=amp

일본최고의용장이라고 불리우는 가토 기요마사가 여진족진영에 쳐들어갔다가 완패당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가토는 창피했어 자기들이 여진족진영13개를 함락시켰다는 날조
                    
yj12 21-08-07 19:29
   
근데 그때당시 여진족은 더 이상 그 이전에 여진족이 아닌 이미 누르하치에 의해서 부족들이 거의 대부분 통일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부족단위로 흩어 살았던 이전에 여진족들과는 수준이 다르고.
그리고 후금의 군대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강이였던 것도 기병이였기 때문이고 실제 검술 면에서는 자신들 보다 덩치도 작은 일본군에게 상대가 안되었고.
                    
자기자신 21-08-07 19:48
   
12// 뭘 상대가 안되다는것지 ㅋㅋㅋㅋ 여진족이 기마부대중심이고 왜 여진족이 일본군뜻대로 싸우냐  일본군이 아무리 검술뛰어났다고했도 기병한테 상대가 안된다 더구나나 후금기병대가 무작정 달려오는것도 아니다 활 쏘면서 달려오지
                         
yj12 21-08-07 19:56
   
내가 언제 일본군이 후금군대보다 더 강하다고 했냐? 분명히 후금군대는 당시 동아시아 최강이라고 했는데.
단순히 검술이나 이런면에서는 덩치도 더큰 후금군대도 일본군에게 안된다고 했지.
                         
자기자신 21-08-07 20:03
   
민심 해이하여 힘껏 싸우지않았기때문에 왜놈에게 패한것다 이기록 못봐냐 만약 민심이 해이하지않았다면 후금군이 일본군에게 안졌을것다라는 내용이잖아
                         
yj12 21-08-07 20:12
   
민심이 해이해져서 졌다는건 조선을 말하는 거잖아?
조선은  일본보다 검술에서는 떨어지지만 대신 궁술이나, 임기응변에서 더 뛰어나기 때문에 해이해지지 않으면 지지 않았다는 말.
                         
자기자신 21-08-07 20:34
   
아 내실수 ㅋㅋㅋㅋㅋㅋㅋ 1대1에서만 능하다는것지 단체로 싸우면 후금군이 이기는데
이름귀찮아 21-08-07 16:22
   
왜란때 일본도가 상대적으로 우세 했던건

검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어서 그랬던거임

조선은 한동안 전란이 없어서 지속적으로 검의 길이가 줄었고

니뽕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조선의 승병들이 사용하는 쇠를 붙인 봉 무기에 일본 애들이 애를 먹었던거
     
토막 21-08-07 17:17
   
그것도 아니에요.
임진왜란때 일본군 주력 병기는 창입니다. 심지어 우리나라것 보다 더 길었다고 하죠.

일본역시 도검은 궁병의 보조무기 수준이였죠.

임란때 일본무기가 좋다는 말이 나오는건 전부.
패전의 변명일 뿐이죠.

조총도 사실 그리 대단한 무기도 아니였고.
그런데 패전후 무기가 비슷한데도 졌다.. 란 말을 할 수 없으니.
조총 때문에 졌다 일본도 때문에 졌다.. 이런 말이 나오는거죠.

당시 일본이 우세했던건 숫자와 전쟁 경험 뿐입니다.
          
yj12 21-08-07 17:46
   
사실 국내에서도 일본도 때문에 졌다라는 인식은 별로 없는데 조총 때문에 졌다는 인식이 훨씬 더 많음.(옛날 조선왕조 500년 보아도 무슨 조총이 활보다도 사거리가 훨씬 더 길게 나오고 조총이 무슨 최강 신무기인 것처럼 해설하고.)
사실 일본도가 뛰어나다는 기록은 일본과 전쟁 이전에도 있었고 일본뿐 아니라 청나라까지 조선보고 앞으로 영원히 일본도로만 바치라고 평할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그리고 일본도랑 조총도 무슨 만능일정도로 최강의 무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전쟁에서 쓸만한 무기는 맞았음.( 아무리 무기 때문에 졌다는 식으로 변명이라고 하더라도 100년이 지나서까지 저런 기록들이 있고 실제로 정부에서 직접 저들의 무기 만드는 기술들까지 배우자라고 주장할 정도면 그래도 어느 정도의 최소한 실험은 거쳐서 그 효율성을 입증 받아야 하니.)
               
토막 21-08-07 17:54
   
일본도가 옜날부터 인정받은게 있긴 있죠.

이쁘잖아요.
딱 여기까지.

조총의 성능은 각궁에 비해 뛰어날게 별로 없습니다.
딱한가지 근거리 관통력 하나만 좋죠.
사거리 연사속도 면에서 무기로서 그다지 좋은 물건은 아닙니다만...

딱 좋은게... 병사의 훈련시간.
궁병 키우려면 5년정도 걸립니다.
군대에서 총쏴 봤죠? 처음 쏴도 어느정도 맞아요.
조총은 몇달만 훈련시키면 병사로 쓸 수 있습니다.

이 장점 하나만으로 조총은 무조건 도입해야 하는 물건이죠.

그런데.. 일본도는...
이쁘니까...
이쁘면 성능좀 구린게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조선시대 주력은 활이고 그다음 창 그다음 둔기 쭉쭉 아래로 내려가서 가장 마지막이 도검인데.

별 쓰지도 않는거 성능이 무슨 상관. 이쁘면 되죠.
                    
yj12 21-08-07 18:00
   
단순히 디자인이 예쁘다고 해서 무슨 당시 조선이나 청나라가 품질도 가장 좋다고 호평하겠음?(실제로 조선 같은 경우도 청나라에 일본도 대신 환도 바칠때 품질이 좋지 못한 칼 바쳐서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당시 중국이나 조선도 단순히 칼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성능도 어느 정도 중요시했고.)
디자인하고 내구성은 별개인데.
그리고 조선같은 경우도 대모보검같은 디자인에 신경써서 만든 칼은 디자인면에서 일본도 못지 않음.
국산아몬드 21-08-07 18:27
   
https://m.blog.naver.com/dydtkdah/221059568245

전통칼은 철을 불에 달궈서 햄머로 두들겨서 만든다. 무쇠를 담금질하여, 달구어진 쇠를 해머로 두들겨서 만들기 때문에 '단조칼'이라고 말한다.
단조로 칼을 만들게 되면, 도검의 조직이 치밀해 지며, 절삭력이 매우 뛰어난 칼이 된다. 한국에서도 고가의 고급 진검은 모두 단조 방식으로 만든다

검신 중앙은 약한 쇠(일명 뽕쇠) 를 집어 넣고 겉은 강한 쇠(일명 시우쇠) 를 둘러 제작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일본도처럼 철를 접어서 만들지는 않는다(접쇠칼).
그 이유는 한국  철이 좋아 굳이 시간과 재료가 많이드는 접쇠 칼 방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는거다
즉 조선은 철의 품질이 좋아 접쇠식 단조가 필요없고 단순한 무기 일 뿐이어서 원가 절약과 대량생산이 가능한 방식이 쓰인 것이다

따라서 칼날에는 일본도 처럼 접어서 만든 방식의 물결(하몬) 무늬가 없고 혈조도 없다
은은한 멋이 있다 일본도에 비해 휘임각이 크지 않으며 검신은 1/3지점부터 서서히 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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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칼은 철의 품질이 안좋아서 무수한 단조과정이 필요한 품이 많이 드는 접쇠과정을 거쳐서 생산한 칼
반면에 전통칼은 대량생산, 원가절감에 촛점이 맞춰져 있음 게다가 철이 좋아서 접쇠과정이 필요가 없음

장단점이 있을 뿐 어느 방식이 좋다고 할 수 없음

일본도 광고하려고 여기저기 설치고 다니네
user386 21-08-07 18:47
   
일본은 근현대에 와서도 제철 기술이 좋지않아 일본이 자랑하던(?) 통칭 "치하" 라고 부르던
97식 중전차도 말이 중전차지 미군 기관총에 숭숭 뚫리는 바람에 미군도 놀라고 일본군도 놀랐다는
얘기는 아주 유명하죠...ㅋ
     
yj12 21-08-07 18:51
   
근현대에 와서도 제철 기술이 좋지 않았다는 건 서양국가들과 비교해서임.
당시 서양은 중세시대 부터 플레이트 아머같은 그런 철강으로 장비들을 만들어 쓰는게 일방적이였던 당시 전세계에서 철 제련기술은 탑이였던 곳인데.
          
user386 21-08-07 19:12
   
제철기술도 기술이지만 핵심은 일본의 철은 옛날부터 불순물이 많아 질이 좋지 않기로
유명했다는 말 입니다.
               
yj12 21-08-07 19:31
   
사실 일본은 옛날부터 철의 품질이 안좋았긴 하지만 그걸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서 당시 일본의 장인들이 어떻게든 철로 칼을 잘 만드는 기술을 높이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했기 때문에 중국이나 조선에 비해서 철이 안좋았지만 당시 동아시아 전체에서 품질이 좋다고 호평받는 칼을 만들수 있었던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고.
                    
소피아 21-08-07 20:11
   
ㅈㄹ 한다 ㅂㅅ 버러지같은 새끼ㅋㅋㄱㅋㅋ  느그 부모가 감동의 눈물을 흩뿌리겠네ㅋㄱㄲ  쪽본을 위해 일하는 진정한 왜구라고ㅋㄱㅋㄱ ㅋ 그냥 자ㅡ살추천함ㅋㅋㅋㅋ
                         
yj12 21-08-07 20:12
   
일본도를 까기 위해서 이제는 당시 중국이나 자기 조상들마저도 전부다 일뽕으로 만들어 버리는 국수, 일까들 수준 진짜 저급하기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소피아 21-08-07 21:25
   
ㅈㄹ한다ㅋㄱㅋㅋㄱ  쪽본 물고빨아서 지적하니 뭐? 조상들을 일뽕으로 만든다고? 이야아ㅋㅋㅋㅋ 일본도 빨면서 욕 안들어 처먹으려고 조상 불모로 잡는거 보소ㅋㄱㄲ 이러니 느그 부모나 니놈 가정교육을 포기했지ㅋㄱㄲ 아, 아닌가? 그나물에 그밥이니 똑같은 놈들이려나?ㅋㅋㅋㅋ 여윽시 왜구ㅋㅋㅋㅋㅋ
                         
yj12 21-08-07 21:30
   
일본도 호평하면 일뽕이라는 니 논리대로 라면 당시 일본도 좋다고 잘만 호평한 중국이나,조선도 졸지에 일뽕이되는건 사실인데?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현실 부정하고 싶으면 일본도 좋다고 평가한 당시 청나라나 조선을 원망하든가 ㅋㅋㅋㅋㅋㅋㅋ
                    
소피아 21-08-07 21:37
   
ㅋㅋㄱㄱㅋㄱㄱ 일뽕이 정신병이라는게 맞말이네ㅋㄱㅋ 여윽시 지말만 맞는거쥬? 남들이 다 틀렸다는데 지만 맞다고 하는거면 니놈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거라고는 생각을 못하쥬?ㅋㅋㄱㅋㅋ 이러니 정신병이지ㅋㅋㅋㅋㅋ  이야아ㅋㅋㅋ 창나라 조선 다 나오네ㅋㅋㄱㅋ 이러니 느그부모가 욕 처듣는거지ㅋㄱㅋㅋ 하긴 애새끼를 이따구로 교육시켰으니ㅋㅋㄱㅋㄱㅋ ㅈㄴ웃기네ㅋㄱㄲ  이래서 가정환경이 중요하지ㅉㅉ 얼마나 힘들었으면 ㅈ본을 빨면 자위할까ㅋㅋㄱㅋㅋ 부모도 자식도 그나물에 그밥ㅋㅋㄱㅋㄱㅋㅋㅋ 세슘수 마시며 니놈 가족끼리 키득거릴거 생각하니 ㅈㄴ웃기누ㅋㅋㅋㅋ
                         
yj12 21-08-07 21:46
   
애초에 일본도 까는 글들도 전부다 기록 한줄도 없이 그냥 역사적인 기록들도 부정하면서 아무런 기록 한줄 없이 그냥 본인 뇌피셜들 만으로 일본 까는 글들이더만.
이제는 하다못해 일본도 까기 위해서 자기 조상들도 일뽕으로 졸지에 만들면서 자기 조상들 한테까지 패드립 치는 저급한 수준들 하고는 ㅋㅋㅋㅋㅋㅋㅋㅋ
                    
user386 21-08-07 22:03
   
가치는 개뿔... 인터넷 찾아보슈 당시 일본칼이 얼마나 잘 부러졌는지... 혹은 일본도의 명성이
가짜라는 글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일본영화나 과거 일본무사 사진이나 그림보면 칼 여러자루 차고 다니는 이유가 칼이 잘
부러져서 그런건데... 이도류? 삼도류? 웃기고 있어...ㅋ
님은 일뽕소리 들어도 할 말 없겠다...ㅡ.ㅡ
                         
yj12 21-08-08 00:05
   
당시 무사들이 칼을 여러개 차고 다녔던 것도 사실 칼은 종류가 하나마 있는게 아닌 근접전, 기급대응, 쌍검술,투척용, 거디다가 할복용(할복용은 실제 전투에서 쓰는 칼이 아니니 실제 급접전 칼보다 보통 길이가 짧았고) 까지 상황에 따라  여러 용도가 있었기 때문에 상황에 맞추어서 가장 적합한 칼을 쓰기 위해서 여러개 차고 다녔던 것.https://www.youtube.com/watch?v=whSEcvOxEGM&t=687s(��� 이 영상보면 검술마다 서로 쓰는 칼들이 다름)
                         
user386 21-08-08 10:49
   
애쓴다 정말...ㅋ

일본검술도 아니고 병법도, 전장 환경도, 사람도 다른 서양검법을 들이미는... 이거 찾느라
얼마나 또 고생하셨어 그래... 일본도의 실체 등등으로 구글링 해보슈 일본검이 얼마나
잘 부러졌는지 알 수 있을테니...
                         
yj12 21-08-08 13:09
   
일본도도 길이가 짧은 탄토(단도)부터 길이가 긴 노다치 까지 여러 용도의 칼이 있었음.
즉 칼들마다 쓰는 용도가 달라서  여러개를 차고 다닌것.
https://www.inven.co.kr/board/webzine/2097/882861
https://www.youtube.com/watch?v=lAGkXqmzZBY&t=1s
특히 쌍검술 같은 경우는 검도 2개가 필요하고.
켈틱 21-08-07 18:54
   
아직도 일본도 빠는 애들이 있네 ㅋ 그것도 밀게에서...
리로이깁스 21-08-07 18:54
   
잡게서도 한 이야기지만

중국산은 나도 추천은 안한다만

백만 넘어가는 물건중에 쓸만한게 있기는 하다

국내산은 중저가는 백이하 좀 쓸만한건 150정도

쪽본산은 미술도검급 아래로 700에서 1,000만 이면 구입 가능

도검소지허가 발급 절차는

운전면허증은 도검사에 제출 하면 끝

아 아직 어리거나 운전면허증이 없음 병원서 신검받아 제출

ㅇㅋ???

참 쉽죠?

자 이제 뇌일베등에서 도검으로 검색

네가 꼴리는 쪽으로 겨들어가 구매 클릭 결제후

안내에 따라 팩스나 이멜로 면허증 또는 심검서 보냄 끝

도검소지허가증은 보통 일주일내에 발급되

경찰서에서 친히 연락을 줌 찾아가라고

그럼  경찰서 생활질서계를 방문 허가즘을 받아

다시 도검사에 팩스나 이맬로 허가증 카피본을 보냄

도검사에서 확인후 발송

아 해외도검 구매도 같은 방식임 단

구매대행을 안하는 곳도 있으니 참고 하렴

자 이제 구매를 완료 했음

자랑스런 니 미뽕도를 들고 베기를 해보고

감상문을 제출 하면 된단다

베기장은 따로 검색해 봐라

띠바 그거까지 알려주기에는 귀찮고

괜히 베기장 사장님께 똥덩어리 하나 보내는거 같아 찜찜해서

베기장 추천은 안하마 그럼 건투를 빈다
떡국 21-08-07 19:24
   
카타나 일본도 좋은 칼이죠.
사용된 사철의 부족한 품질을 보완하기 위해 구조적으로 잘 설계되어 있고요.
중량, 밸런스, 강성 등등 공학적으로도 훌륭하다고 봅니다.
철의 강도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단면 형태를 오각형으로 설계해서 최대한 두툼하게 만들어서 강도를 확보하는 방식입니다.

카타나 일본도의 전통적인 제작방법은
타타라 라는 사각형의 고대 용광로를 사용하는데
타타라 용광로 구조는 한반도에서는 오래전에 실전된 방식이죠.
물론 백제 용광로 유적지에 타타라 방식의 용광로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백제기술이 그대로 일본에서 이어진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고요.

한반도에서 살아남은 방식은 고로식인데, 단점은 사철 같은 저질 재료를 사용하기는 곤란하고 대신 일정 품질 이상의 철광석을 넣어야 한다는 점.  온도 제어 등이 굉장히 어렵다는 점. 등이고
장점은 단위생산량이 훨씬 많다는 점.  고품질이라는 점이라고 볼 수 있겠죠.

예컨데 타타라 방식에서는 한 번 철을 만들어내면, 기껏해야 칼을 한 두개 정도 만들 분량의 강철밖에 얻을 수 없죠.  타타라 자체의 더 규모를 키울수도 없고요.
하지만 고로식의 경우에는, 제철기술이 쇠퇴했다는 조선시대 유적지만 봐도 용광로 하나 높이만 해도 십몇미터 짜리가 여러개 배치된 용광로 유적지가 나옵니다.

그리고 고대시절로 돌아가 보면...
공학적으로 최고 품질의 철은 고구려 것입니다.

백제는 중국에서 유래된 것을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관강법을 사용했는데
(시기적으로는 중국과 별 시차가 없음)
탄소 함유량이 다른 철을 섞는 방식이라 기본적으로 기존의 백련법(X나 두들기는 거)이랑 큰 차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경우에는 초강법이죠.
완전 용융된 상태까지 온도를 끌어올린 후 탄소를 빼내는 방식.
유럽에서는 18~19세기의 산업혁명시대에 겨우 등장한 바로 그 기술. (베세머법)
고구려 화살촉 유물의 상당수를 보면
현대 강철 기준으로 보면 초경합금 수준의 경도까지 끌어올린 수준이라고 합니다.
고구려 시대 당시 기준으로 보면 정말 외계인 기술 수준이죠.
쉽게 말해 같은 철로 만든 것 같은데, 고구려 화살촉이 중국 것 보다 강도가 10배 더 쎄다면 전쟁에서 같은 조건에서 누가 이겼겠어요.  고구려가 소수의 병력으로 대규모 중국 왕조를 상대한 비결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죠.

물론 일본에서는 이런 기술은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고구려에서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심양 근방 지역에 유명한 노천 석탄광이 있죠.  거기서 나오는 무한정의 석탄으로 강력한 화력을 무제한으로 공급 가능하다는 점. (산에서 나무 땔깜 해가지고는 감당이 안됨)
질좋은 철광석이 공급되는 다수의 광산을 보유했다는 점.
즉 만주가 고구려 것이었고, 고구려 장인들이 그 만주의 자원으로 이런 기술적 성취를 해 낸 것입니다.
     
국산아몬드 21-08-07 20:14
   
https://www.google.com/search?q=%EC%B4%88%EA%B0%95%EB%B2%95&rlz=1C1ZKTG_koKR883KR883&oq=%EC%B4%88%EA%B0%95%EB%B2%95&aqs=chrome..69i57j0i30j0i5i30.2689j0j7&sourceid=chrome&ie=UTF-8

초강법은 석탄으로 만드는게 아니라 탈탄제를 넣어서 만듭니다

초강법은 녹은 상태의 주철에 고운 흙이나 산화철 가루 등 탈탄제(脫炭劑)를 넣고 저어서 주철의 탄소가 철광석 가루와 결합하여 제거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탄소가 제거되면 철의 용융점이 높아져서 곧 굳게 되므로 잘 저어주고 센 불로 계속 가열하여야 한다

조선시대 도검제작에 쓰는 방식입니다
     
yj12 21-08-07 20:15
   
https://www.lgsl.kr/sto/stories/76/IQEX2006100005
이 뉴스보고 말하는 것 같은데 이 뉴스에서도  사실 저런 초강법은 고구려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도 비슷한 시대에 있었다고 말하고 거기다가 저 뉴스에서도 저런 초강법은 대량 생산이 불가능해서 저런 초강법으로 만드는건 일부분이 였다고 말하고 18~19세기 그걸 대량생산 할수 있도록 만든 기술이 바로 유럽에서 만든 베세머법임.
          
국산아몬드 21-08-07 20:17
   
중요한건 일본에게는 초강법 기법이 없었다는 점이죠
               
yj12 21-08-07 21:25
   
사실 몰라서 안했다기 보다는 당시 일본내에서 만든 철이 워낙 품질이 안좋아서 일일히 철을 두드려서 펴는 접쇠 기법을 사용할수 밖에 없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수작업을 다해서 당시 동아시아에서  인정 받는 칼을 만든 것 자체가 대단한것.
                    
국산아몬드 21-08-07 21:47
   
수준낮은 기술로 사람 갈아넣는 노가다로 좋은 칼 만드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기술이 발전을 상징하는 것도 아닌데
                         
yj12 21-08-07 22:07
   
사실 그건 당시 일본내 철품질이 워낙 안좋아서 어쩔수 없었던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당시 철은 곧 무기에 직결되기 때문에 주변국가들도 품질이 괜찮은 철은 쉽사리 팔지 않기 때문에 좋은 철을 수입하기도 힘들고.
                         
국산아몬드 21-08-08 11:53
   
자꾸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우겨대는데
초강법은 철의 품질과 관계없어요
탄소를 제거하는 기법인데 왠 철의 품질 운운하나요?

그냥 일본의 도검 제작기법이 기술력이 낮고 무식했던거에요

그나저나 이사람은 왜놈인가?  왜 뻔한 거짓말과 날조를 이렇게 많이 하지
                         
yj12 21-08-08 14:09
   
                         
국산아몬드 21-08-08 14:21
   
핵심은 탄소 제거 기술이 없었다는 거야
니가 말하는 일본 제철기술은 풀무질이야 . 풀무질 없는데가 있냐?
별 쓸데없는 걸로 변명하고 있어
                         
yj12 21-08-08 16:08
   
정확히 일본의 그런 초강법을 사용하지 못했던게 일단 초강법을 사용할려면 고온의 용광로를 상시적으로 감독을 하고 온도와 바람을 조절해야 하는데 당시 일본은 소규모 도공가문 위주의 칼 제작방식 때문에  초강법에 도입에 필요한 대규모의 방대한 제작환경을 갖추기 힘들어서 상대적으로 개인이 다룰수 있는 접쇠공법에서 넘어가지 못한 것.
                         
국산아몬드 21-08-08 16:16
   
그러니까 기술적으로 형편없었다는 거야
그리고 도검 수요는 일본이 훨씬 많았었는데 소규모 제작방식을 유지했다는게 그 나라가 븅신이라는 거다
유이바람 21-08-07 20:27
   
국까? 일까?ㅋㅋ  말하고싶은게 뭔디 국까 일까 이런 개소리 처쓰심?
점퍼 21-08-08 00:11
   
그냥 케바케임. 당시 제철 기술은 장인마다 품질이 달랐음. 이는 장인의 지식이 공유되는 과학적인 지식이라기 보다는 경험적인 지식이고 이 마져도 도제식으로 엄격히 통제하여 비밀을 감추었음.
따라서 일본의 소수 장인이 만든 칼은 품질이 뛰어남.  조선은 일단 큰전쟁이 거의 없다보니 장인의 숫자도 적고 관청에 고용되어 무기를 만드는 식이 대부분이었음.
언제 칼부림이 일어날지 모르는 환경에 사는  사무라이들은 칼을 항상 상비하고 다녔으므로 수요가 많다보니 실력이 뛰어난 일부 장인들이 만든 것들은 가격도 비싸고 환도보다는 품질이 좋았던 것은 사실임.
하지만 평범한 장인이 만든 칼들은 사철의 한계를 벗지 못하고 환도보다는 품질이 많이 떨어짐. 아마 평균적인 품질을 놓고 보면 좀더 질 좋은 철을 쓰는 환도가 더 좋았을 것임.
더구나 조선은 활쏘기를 더 장려했기 때문에 활의 품질과 성능에 더 신경을 썼음.
조선도 길거리에서 수시로 칼부림을 해야 했다면 환도의 길이가 많이 길어지고 품질도 더 올라갔을 것임. 하지만 그보다는 마상전투에 적합하도록 짧게 만들었고 보조무기에 불과했음.
윰윰 21-08-08 01:00
   
잡소리 지우시고 근대이전 세계 전쟁역사에서 뭘로 젤 많이 죽었는지만 찾아보면 답나옴...
그나마 칼로 많이 죽인 전쟁사는 로마시절 글라우디스 뿐임
대부분은 활이 80%이상 사상자를 냈음
활로 조지고 기마돌격 vs 창병
마지막 정리나 약탈할때나 칼로 싸움
생각을 하면 답이 나오는 문제인데...영화나 만화처럼 실제 전쟁이 그렇게 이루어지는줄 아나...
냉병기 시절에도 활이 젤 많은 사상자를 냈음
키륵키륵 21-08-08 01:22
   
일본도 기록 가지고 백날 떠들어봐야 소용 없음.

왜 그러냐?

당시 저 기록속 인물들이 과학적으로 기술력 평가를 한 게 아니라
그냥 감상이나 남의 의견을 전해 듣고 적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지.

실제 분석은 동시대 환도와 일본도를 놓고 현대 과학기술로 평가를 해봐야하는 것임.

기록 가지고 와서 보여줘봤자 그건 '그때 사람들의 인식'에 대한 증거일 뿐임.
     
yj12 21-08-08 14:16
   
일단 당시 청나라나 조선 조정도 무슨 븽신이 아닌 이상에서야 직접 칼 실험도 해보지 않고 저렇게 호평하지는 않았겠죠.
냥아치 21-08-08 02:48
   
쪽바리들도 쪽본도 내구성 최악인거 인정하는데 먼 개소리야 ㅋㅋㅋㅋㅋㅋ

환도는 딸랑 한자루 들구 다니고 쪽본도는 여러자루 들고 다니는거 이거 하나만 봐도 쪽본도 내구성 구리다는게 확실한데 ㅋㅋㅋㅋㅋ
     
yj12 21-08-08 14:12
   
그리고 당시 무사들이 칼을 여러개 차고 다녔던 것도 사실 칼은 종류가 하나마 있는게 아닌 근접전, 기급대응, 쌍검술,투척용, 거디다가 할복용(할복용은 실제 전투에서 쓰는 칼이 아니니 실제 급접전 칼보다 보통 길이가 짧았고) 까지 상황에 따라  여러 용도가 있었기 때문에 상황에 맞추어서 가장 적합한 칼을 쓰기 위해서 여러개 차고 다녔던 것.https://www.youtube.com/watch?v=whSEcvOxEGM&t=687s(��� 이 영상보면 검술마다 서로 쓰는 칼들이 다름)
즉 일본뿐만 아니라 당시 칼을 쓰던 유럽 기사들도 칼을 여러개 차고 다녔음.
그리고 당시 조선은 원거리 무기인 활을 가장 중요시했고 당시  일본처럼 칼을 별로 쓰지 않았으니 칼은 그냥 지희용이나 장식품이여서 그냥 한개만 차고 다닌것.
          
국산아몬드 21-08-08 14:18
   
투척용 칼도 있나? 표창 말하는 거니? ㅎㅎㅎ
그리고 할복용을 상시로 들고 다녀?
기급 대응은 또 뭐냐?
긴급대응 오타라 치고 근접전과 용도가 다를 이유가 있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yj12 21-08-08 15:13
   
긴급대용은 기습은 주로 상대방이 갑자기 훅 들어오니 비교적 짧은 거리에서 전투가 벌이지니 당연히 검의 길이가 짧아질수 밖에 없고.
https://www.inven.co.kr/board/webzine/2097/882861
거기다가 탄도같이 길이가 짧은 칼은 투척용으로도 이용하기도 했고.
                    
국산아몬드 21-08-08 15:21
   
댓글보면 죄다 부정하던데 무슨 의도로 링크한것이지?
그리고 서양 검하고 왜 자꾸 비교하지?

서양검은 전신갑옷을 입은 기사와 상대해야 하므로 크고 뭉특할수 밖에 없고 베기에 적당하지 않아.
일단 검으로 충격을 줘서 상대를 넘어뜨린뒤 작은 단검같은 것으로 갑옷의 틈사이로 죽여야 하기 때문에 2~3개의 용도가 다른 칼이 필수적이었지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전신갑옷 자체가 없으니 일본도는 베기에 특화되어 있고 그만큼 얇아 부러지기 쉬운 칼이야.
용도가 다른 칼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어
그건 팩트인데 기를 쓰고 부인할려고 하네

그리고 긴급 대응용이라니 황당해서 말이 안나오네
바로 뒤에서 숨어서 덮칠때 쓰냐? 이미 죽은 목숨일텐데 무슨 소용이 있니?
짧은 투창을 허리춤에 끼어넣고 다니냐? 언제 빠질지 모르는데
쌍검술이라고? 진짜 막장이네. 쌍검술울 할 줄 아는 사무라이가 얼마나 있다고 쌍검술 운운하냐?

말도 안되는 헛소리 지꺼리고 있어
너 진짜 병원 갔다 와라
                         
yj12 21-08-08 15:58
   
https://www.inven.co.kr/board/webzine/2097/882861
조선 기록에서도 일본 무사들이 던지기, 할복용 , 그리고 기습전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 싸울때(기습전도 간신히 한번 막아낼 때도 있으니)를 대비한 소도(소도는 장소가 협소할 경우 거리가 가까울때 유리하다고 하면서 ,애초에 소도가 장소가 협소할 경우 유리할수 밖에 없는게 가까이서 싸우는 그런 급한 상황에서는 긴 장도는 휘두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 그 사이에 자기 몸이 먼저 베일수 있기 때문) 등 여러 용도로 칼을 차고 다닌다고 나옴.
그리고 난 일본도가 서양도보다는 뛰어나다고 말한적 없음.
당연히 서양도가 훨씬 강철로 만드니 강도도 강하지.
그런데도 그런 서양도 칼을 여러개 차고 다녔기 때문에 단순히 칼을 여러개 차고 다닌다고 해서 칼이 쉽게 부러져서 그런게 아니라는 말.
                         
국산아몬드 21-08-08 16:21
   
서양에서 여러개의 칼 차고 다닌다면서 일본도 같은 경우라고 니가 말했잖아
서양은 여러개의 칼을 들고 다닐 이유가 있었던 거고 일본 사무라이는 그럴 이유가 없었던 건데 넌 엉뚱하게 서양예를 들면서 합리화 하는거 아냐?
궤변 늘어놓지 마라

그리고 조선 기록에 있다면 가져와 바라
일본 사무라이들이 칼을 여러개 들고 다닌 이유가 어디 있는지
                         
yj12 21-08-08 16:33
   
일본도 서양과 같이 주로 여러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임.

그들의 무기는 칼과 총을 제일로 친다. 칼을 찬 자는 반드시 길고 짧은 두 개의 칼을 차서 긴 것은 치거나 찌를 때 사용하고, 짧은 것은 던져서 남이 뜻하지 않는 사이에 맞히면 당장 죽지 않는 자가 없다.
『해유록』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79A_0030_040_0010

강 위에 왕래하는 자들이 혹 한둘 혹 서넛이 큰 칼을 메고 작은 칼을 끼고 있는데 햇빛이 내리쏘아 빛나는 번개와 같았다. ... 칼날은 매우 예리하고 알몸으로 나가 싸우며 쌍도(雙刀)를 잘 쓴다. 재빠르게 몸을 날려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며 보전(步戰)에 능하고 수전(水戰)에 겁을 먹는다. 칼을 쓰고 총을 쏘는 데는 정밀하나 활과 창을 사용하는 데 서투르며, 진영을 겁박(劫迫)하고 복병을 설치하면 중국인도 그 꾀에 빠진다.
『재조번방지』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35A_0010_000_0010

왜이(倭夷)는 보통 호접진(蝴蝶陣)을 치는데, 전투시에는 부채를 휘두르는 것으로 호령을 삼는다. 한 사람이 부채를 휘두르면 무리들 모두가 칼을 춤추며 일어나 공중으로 칼날을 번뜩이며 재빨리 휘두른다. 우리 병사들이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다가는 한 칼에 베여 버린다.
쌍도(雙刀)는 위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아래를 공격하기 때문에 막기가 어렵다.
표창과 단도는 자루를 드러내지 않고 갑작스럽게 던지는 까닭에 예측할 수 없다.
『주해도편』 왜국사략(倭国事略)
https://i.imgur.com/F173kHe.jpg
                         
국산아몬드 21-08-08 16:44
   
칼을 찬 자는 반드시 길고 짧은 쌍칼을 차서????

짧은 쌍칼이라잖아
너는 사무라이 영화에 나오는 것이 2~3개 칼들이 짧은 쌍칼로 보이냐?
                         
yj12 21-08-08 16:48
   
그건 영화나 애니 같은 대중 매체에서 고증도 모르거나  무시하고 그냥 긴칼 여러개 꺼내서 이도류 펼치고 이런 식으로 무조건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 나온것이고.(일단 니가 어떤 영화를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선 기록에서도 일본 무사들은 장검이나, 단검등 여러 용도로 길이가 다른 칼들을 차고 다녔다고 나오는데.
                         
국산아몬드 21-08-08 16:57
   
칼을 여러개 차고 다니면 멋이 있어 보이니?
말이 안되잖아.

니말대로라면 긴 칼을 여러개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어
작은 칼은 품속이 지니고 있어야 더 활용도가 높지 않겠니.
왜 남들 다 보이게 겉으로 드러내겠니

제발 그만 좀 우겨
                         
yj12 21-08-08 17:03
   
전투에서도 긴칼이 필요할때도 있고 짧은 칼이 필요할때도 있으니 그렇게 여러개 차고 다닌거지.(긴칼은 협소한 장소 때문에 부득이하게 서로간의 거리가 가까울때 말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냥 근접전 할때는 오히려 짧은 칼보다 먼거리에서 벨수 있는 장검이 더 유리하고)
칼은 그냥 단순히 멋으로 차고 다니는게 아님.
당시 기록에서도 나오는걸 기록 보여주어도 아니라고 본인은 기록한줄도 없이 빡빡 우기는 것좀 보소.ㅋㅋㅋㅋㅋㅋㅋㅋ
                         
국산아몬드 21-08-08 18:18
   
말귀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놈이 기록 운운하기는 ㅎㅎㅎ

지한테 불리한 기록을 가지고 와서는 증거라고 내미는 놈이
글을 제대로 이해는 하냐?

작은 칼은 차고 다니는게 아니라 품고 다니는거란다
그러니까 왜놈들이 큰칼을 여러개 차고 다니는 이유는 용도가 달라서가 아니란다
                         
yj12 21-08-08 18:28
   
본인은 단 기록 한줄도 못 올리는 주제에 아무리 내가 증거들 가져와도 끝까지 본인 뇌피셜로 아니라고만 빡빡 우기는 수준 보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 당시 일본도가 형편없었으면 그런 일본도를 높이 평가한 청나라나 조선은 무슨 븅신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본도 까기 위해서 이제는 자기 조상들 마저도 전부다 일뽕으로 만들어 버리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구름위하늘 21-08-08 11:12
   
이 인간 다른 게시판에도 똑같은 내용 올리고,
댓글 다는 태도를 보니 알만한 부류 같습니다. 어그로에게는 무시가 답.

작성자 말고 다른 분에게 내용을 공유합니다.

일본은 무사들도 평시에는 칼을 패용하지만, 전투에서는 칼 대신 창을 들었습니다.
일본도는 전투 중에 창을 손실할 경우에 사용하던 무기입니다.

일본도의 우수성을 언급한 내용들이 사실인지는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다양한 기록에서 언급된 일본도는 전쟁무기가 아니라 테러/암살/지휘/할복 등에 사용된 보조무기일 뿐입니다.
일본도가 좋다고 자랑하는 것은 개인 취향이지만, 전체적으로 일본도는 살상용이기 보다는 감상/치장용으로 변한 것이 사실입니다.
일본도가 가지는 악명의 대부분은 군인과의 전투가 아니라,
힘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얻어진 것 입니다.
일본도에 대한 고평가가 시대적으로 있기는 합니다.
일격필살의 일본검법과 결합된 일본도는 경험이 부족한 한국과 중국의 방진을 여러차례 분쇄했습니다. 이것은 일본도의 우수함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에 대한 낫설음이 원인이죠.
중국은 기효신서로 한국은 무예보통예지로 일본도와 일본검법을 배우면서 대부분 해소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일본도가 좋다고 자랑하는 것은 현대에 와서는
군인이 제식무기인 소총 말고 권총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태도와 같습니다.
권총이 좋으면 전투 이길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일본도 개취의 의미를 공감할 것 입니다.
     
yj12 21-08-08 14:15
   
나도 일본도가 무슨 지상 최강의 무기라고 말한 적 없음.
물론 칼 자체가 창에 비하면 활용도가 낮긴 함.
하지만 당시 무슨 한국내 널리 알려진 것처럼 툭하면 쉽게 부러지는 그런 칼이 아니라 나름 동아시아에서 호평받고 전투에서 쓸만한 칼이였다는 것이지.(특히 공성전 같은 경우는 창을 쓸수가 없으니 대신 칼을 쓸수 밖에 없고.)
yj12 23-09-02 00:28
   
일본도(日本刀)는 크고 작고, 길고 짧은 것이 일정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장도(長刀) 하나를 소유하는데 그 칼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칼(小刀)을 꽂아두어 잡무에 쓰기 편하도록 한다. 또 하나 자도(刺刀)로 길이가 한 자인 것을 해수도(解手刀)라 하니 이 세 가지는 몸에 지니고 반드시 쓰는 것이다. 칼이 매우 굳세고 날카로워서(剛利) 중국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대개 도식(刀式)이 견고하고 예리한 것은 왜인들이 으뜸이다. 그러므로 그 도식을 그림으로 갖추어 싣는다.)
(무예도 보통지)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14_0060_0030_0030_0020&whereS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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