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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8-10 12:27
[기타] 중공의 티벳 점령 이야기
 글쓴이 : 지누짱
조회 : 1,375  

ㅊㅊ  나무위키
사실과 다른점 있으면 댓글로 지적바람.


2.1. 시작[편집]
중국 황제들은 13세기 이래 티베트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해왔고, 이는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티베트을 침공할 명분이 되고도 남았다. 마오쩌둥 정권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중국 대통일"을 완성함으로써 중국의 티베트 통치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달라이라마를 국가 지도자로 하는 신정 체제하의 티베트는 독립국이기는 했지만 중국에 저항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20세기 초반에 티베트는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에 외교적 접근해서 중국을 견제하고자 했지만[1]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더 이상 영국이 인도 건너편에 있는 티베트에 신경쓸 이유가 없어져버렸고, 신생국가 인도 공화국은 아직 티베트를 도와줄 여력이 부족했다.

1950년 1월 1일에 중국 국제방송(라디오 베이징)은 판첸라마 10세의 요청으로 중국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해방시킬 준비가 되었다고 방송했다.

티베트, 인도, 영국, 중국의 대표단이 협상을 논의했으며 티베트 대표단은 최종적으로 1950년 9월 16일에 델리에서 중국측 대표단을 만났다. 중국측 대표인 위안중센(袁仲賢)은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이다, 중국이 티베트의 국방, 외교, 무역을 담당한다"라고 하면서 이를 받아들이면 평화적인 해방이 될것이며 거부하면 전쟁이 될 것이라 경고했다.


2.2. 중국군의 침공[편집]
1950년 3월에 중국군은 티베트 국경에서 훈련을 마치고 먼저 캄의 다르셋(현재의 캉딩시)으로 진주했다. 이후 덩샤오핑의 서남국 산하의 인민해방군 제 18군이 가을부터 본격적인 침공에 착수했다.

1950년 10월 7일 밤에 중국군은 장궈화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여 라싸의 동쪽 100km 위치까지 침공했다. 중국군의 병력은 약 4만명 남짓으로, 동쪽에서 세 갈래로 동시에 진군했다. 이에 맞서는 티베트군은 의용군을 포함한 약 8천명.


2.3. 승리 선언과 국제사회의 외면[편집]
라싸정부는 어디까지나 중앙 티베트만을 지키며 사태가 중앙 티베트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인도의 매스컴이 티베트 대표단에게 중국의 침공에 대해 묻자 그런 사실이 없다며 부정하고 중국의 태도를 묵인하는듯한 행동을 취했다.

중국군은 환영모습과 항복조인을 하는 모습의 사진을 언론에 내보내며 선전활동에 열을 올렸다. 1950년 10월 25일에 중국 정부는 중국군의 티베트 진주를 선언했다.

1950년 당시 국제사회의 관심은 6.25 전쟁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티베트 문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미국은 소련을 제거하려는 데[2]에만 열중하고 있었고, 20세기 초반에 티베트와 관계를 맺었던 영국은 1950년 1월 인도를 독립시킨 후 더 이상 티베트와 지리적으로 무관해졌기 때문에 이들의 운명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인도와 중국은 당시에는 우호관계였고 파키스탄과의 분쟁으로 제 코가 석자였기 때문에 인도는 굳이 티베트 문제로 중국의 어그로를 끌려고 하지 않았다. UN총회 운영위원회도 <티베트와 중국, 인도에 평화를 위해서도 UN에서 토의하는 것은 걸맞지 않다>라고 하여 심의의 연기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이전의 국민당정부 중화민국와 마찬가지로 중국은 이 지역의 영유권을 선언했고, 한반도에 군대를 파병하기 직전인 1950년 10월 10일 티베트를 침공했다. 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티베트는 중과부적으로 패전한다. 티베트군은 칭하이의 군벌 마부팡군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일개 군벌군보다 강력했던 중화민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중국군을 상대로 티베트 군이 싸워 버틸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했다.


2.4. 중앙 티베트 침공과 합병[편집]
중국은 본격적인 침공 준비에 들어가기 전 티베트 정부와 협상을 계속했다. 중국군이 제압한 동티베트 지역은 12월 15일에 시캉성, 장족자치구, 칭하이성 인민정부가 설치되었다.

인민해방군은 중앙티베트로 지역으로의 군사침공 거점으로 1951년 1월 1일에 참도를 창두로 개칭하고, 인민해방위원회를 설립했다. 1951년에 중국은 신장, 칭하이, 창두의 세 방면에서 인민해방군을 라싸로 진격시켜 그 무력을 배경으로 달라이 라마 정권에 17개조 협정을 강요시켜 조인케했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 정부대표로서 아보 아왕 지그메 등에게 <인민해방군의 창두에서의 철수를 협상하는 권한>을 주어 베이징으로 파견했다. 창두 인민정부의 티베트인 괴뢰였던 아보는 중국이 제시한 17개조 협정에 서명하여 5월 23일에 승인하게 했다.

이 17개조 협약에서 티베트 정부는 지방정부로 규정하고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사실상 귀속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2.5. 17개조 협정 이후[편집]
달라이 라마 14세는 협정체결의 뉴스를 듣고 아보의 행위에 충격을 받았지만 판첸 라마는 5월 30일에 달라이 라마에 대하여 중국 정부의 지도하에 티베트 정부에 협력한다고 표명했다. 한편 아보는 이후 티베트에서 중국 공산당의 충실한 대변자가 되었다. 1951년 7월에 라싸 주둔 중국군 사령관인 장징우 장군이 야톤을 방문해 달라이 라마 14세에게 조약의 유효성을 인정하도록 요구했다.

미국은 달라이 라마 14세에 대해 망명하여 협정의 무효를 외치라고 했지만 많은 승려들이 달라이 라마 14세의 라싸 복귀를 원했기에 결국 라싸로 돌아가 협정에 기초한 개혁에 추진하게 되었다. 9월 6일에 달라이 라마 14세는 9개월만에 라싸로 돌아왔는데, 3일 후 3천명의 중국군이 라싸에 진주했다. 10월 24일에 달라이 라마 14세는 <협정을 승인하며 인민해방군의 진주를 지지한다>라는 편지를 마오쩌둥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는 이후 중국이 티베트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크게 이용되었다.

중국은 다리와 도로, 학교를 건설했지만, 동시에 불교 성직자들의 권위를 깨뜨리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전통 문화와 티베트 엘리트층의 파괴는 물론 엄청난 인권 침해를 수반했다.

1959년 무렵 티베트족들의 분노는 반란으로 이어졌고, 중국은 이를 무력으로 가혹하게 제압했다. 이후 달라이 라마는 인도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한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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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누짱 21-08-10 12:28
   
당시 유엔 상임이사국이었던 중화민국도 티벳이 중국영토라며 유엔의 개입을 거부하였네요.
     
지누짱 21-08-10 12:29
   
미국도 미중외교관계 수립으로 티벳의 독립지원을 끊어버림
냉각수 21-08-10 12:56
   
유럽국가는 티벳을 독립시켜줄 여력도 없고 그럴 필요성도 없음....
다만 티벳을 레버리지로 중국압박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