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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8-10 12:39
[기타] 중소 국경분쟁 이야기
 글쓴이 : 지누짱
조회 : 1,052  

ㅊㅊ 나무위키

3. 전개과정[편집]
3.1. 극동에서의 충돌[편집]
3.1.1. 문제의 전바오 섬[편집]
소련에서 다만스키 섬이라 불리는 전바오섬(珍寶島, 珍宝岛)은 우수리강 하류의 중소 국경지대에 위치한, 길이 2킬로미터, 폭 800미터의 작은 섬으로 중국어로 보물섬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보물섬이라는 이름과는 별개로 전바오섬에는 약간의 자작나무와 사슴 약간이 서식할 뿐이었다. 1962년 10월, 흐루쇼프는 중국과의 국경회담 계획을 파기하였으나 새로운 국경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 제국 시절의 경계를 대체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소 양국은 국제법상의 관례에 따를 것을 동의하였는데 관례에 따르면 전바오섬이 우수리강 본류에서 서쪽에서 위치하기 때문에 중국에 속하였다. 하지만 흐루쇼프의 회담 거부로 인하여 소련이 전바오 섬의 중국 귀속에 합의된 바가 없었으나 중국 측에서는 소련이 국제법상 관례에 따르겠다고 동의한 점을 들어 전바오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후 전바오 섬은 양국 국경수비대의 싸움터가 되었다. 처음에는 양측 장병들끼리 만나서 악수도 하고 담배도 교환할 정도로 원만한 관계였었으나, 이내 전바오/다만스키 섬이 어느 쪽 영토냐는 문제로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양국 수비대는 갈고리 장대, 곰 사냥용 창, 못을 박은 몽둥이 등을 들고 가서 충돌했고 군용 트럭이 수백 명씩 병력을 수송하여 확성기로 군악을 틀고 서로를 도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중화기가 동원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충돌이 심각해진 적은 없었다.

3.1.2. 전바오 충돌[편집

중국군 병사들은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소련군 병사들을 향해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고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결국 전바오 섬에서 양국 수비대의 신경전은 육탄전으로 번졌다. 패싸움으로까지 발전된 이 난투극에서 승자는 소련측이었다. 상대적으로 체격이 더 컸던 소련측이 맨몸 육탄전에서 이기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이렇게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중국군들은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마주친 소련군과 계속해서 패싸움을 벌였다. 그러던 중 일련의 패싸움에서 중국군 사병 일부가 사망하기도 했다.

체면이 구겨질대로 구겨진 중국군은 일반보병인 경비대원들을 최정예 특수부대원들로 모두 교체했다. 교체된 병력은 동북지역을 관장하는 제49야전군에 배속된 특수부대원들이었으며, 난투극을 촬영하기 위해 파견된 기자 역시 특수부대 소속 교관요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무술 유단자들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소련군은 마주친 중국 경비대원들을 놀려대기 시작하면서 양측간에 다시 패싸움이 일어났다. 물론 소련의 일반 보병들은 실전경험으로나 피지컬로나 차원이 다른 중국의 특수부대와 상대가 되지 못했고, 패배한 소련군은 부상자들을 데리고 서둘러 퇴각했다. 갑작스런 패배에 당혹한 소련군 경비대장은 퇴각한 부하들로부터 정황을 보고받았다. 격투술 솜씨 등을 검토해본 결과 새로 교체된 중국군이 일반 보병이 아닌 특수부대원들이라는 결론을 얻게 됐다. 이를 상부에 보고하면서 소련군경비대장은 자신의 휘하에도 특수부대원들을 배속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그 후 소련군에서 '절뚝발이 중위'라는 별명을 가진 복싱 선수 출신의 장교가 파견되었고, 중국군을 상대로 다시 승세를 가져오는 등 난투극이 이어졌다.

더 이상 국경 군사들 간의 패싸움으로 취급할 수 없었다. 상부에서는 자국군의 자존심이 높아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산둥성 출신의 '산둥꼬마'(小山东)라는 별명을 가진 특수부대 소속 초급장교까지 데려와 소련군을 상대했다. '산둥꼬마'는 산둥성에서 자라서 무예를 타고났기 때문에[3] 지휘부에서는 단지 소련군의 중위를 이기기 위해서 애먼 장교를 데려와 젠바오섬 경비대로 전출시켰다.

3.1.3. 3월 2일 전투[편집]
'산둥꼬마'의 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수십명의 중국군은 3월 2일, 얼어붙은 우수리 강을 건너 전바오 섬을 점령했다. 중국군은 이후 이루어진 패싸움에 항상 목봉을 들고 임했으며, 소련군 중위가 나섰음에도 무기를 소유한 중국군과의 패싸움에서 패배했다. 이후 소련군 또한 몽둥이를 들고와 항전했으나 전문적으로 봉술을 익힌 중국군의 상대는 되지 못하였다.[4]

상황이 불리한 중위는 순간적으로 권총을 꺼내들고 '산둥꼬마'를 향해 발사했다. 장교가 총에 맞고 쓰러지자 중국군이 소련군과 강을 사이에 두고 결국 총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국군은 소련군 국경초소를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고 박격포가 가세하면서 싸움은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몇시간 뒤에 소련 증원군이 도착해 역시 중화기로 맞서기 시작하고 나서야 교전은 중단되었는데 산둥꼬마는 7발이나 총을 맞고도 당시 치고 받던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출처#1 출처#2 중국 측은, 장갑차를 비롯하여 4대의 차량에 나눠탄 소련군 70명이 선제공격을 해왔다고 주장했고 소련 측은 중국군의 기습으로 소련군 30명이 전사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상술했듯이 중국과 소련의 봉에 대한 인식 차이도 크게 작용했다. 당시 소련군의 격투술은 맨손만을 사용하는 복싱이었고[5], 중국군의 격투술은 봉술이었다. 그래서 중국군은 몽둥이를 무기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소련군은 무기로 생각했다. [6]

소식은 곧바로 소련 인민들에게도 전해졌고 분노에 찬 모스크바 시민들은 중국 대사관을 향해 잉크를 던지며 시위했다고 한다.

3.1.4. 3월 15일 전투[편집]

4분 36초 부터. 소련군은 BTR 장갑차의 엄호 아래에 기계화보병이 진격하는 충실한 제병합동 전술을 활용하고 있다.

양측의 충돌이 일어난 후 반응이 격렬했던 곳은 소련이었다. 인민해방군이 소련을 침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련 지도부는 공황 상태에 빠질 정도로 흥분했고 국방장관 안드레이 그레치코가 즉각 중국의 공업 중심지에 핵공격을 감행하여 보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강경파들도 핵기지를 상대로 한 정교한 핵공격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극동의 소련군 장성들은 정말로 중국 측에서 비무장 민간인 수백만 명을 마구 국경에 밀어넣는 식으로 소련측 방비를 무력화하여 극동을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브레즈네프는 중국에 대한 핵공격을 고려했었다고 1973년 5월에 회고했으나, 결국 핵공격 대신에 다연장 로켓포를 동원한 포격을 허락하였다.


한편 마오쩌둥은 국경분쟁에서의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소련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3월 12일, 전열을 가다듬은 24보병연대 예하 5000 명이 국경에 밀집했고 소련군은 탱크, 장갑차 등을 대기시켜 강경하게 맞섰다. 결국 3월 15일, 중국군 보병부대가 소련군을 향해 돌격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여졌다.

오전 11시 30분, 중국군 보병부대가 다만스키 섬을 점령하는 것이 포착되었고 일부는 우회하여 다만스키 섬에 주둔중인 소련군 국경수비대에 대한 포위를 시도했다. 그러나 소련군 야신 중령이 이끄는 차량화 소총 부대의 8대의 BTR-60 장갑차들에 의해 격퇴당한다. 소련군의 경우 중국군의 배합 전술로[7] 인해 피해가 누적되어 소련군 BTR 4대가 격파되었다. 그러나 수적 우위에 의한 배합 전술도 중국군에게 승리를 가져다주기는 커녕 패퇴를 가져다 주었다.

오후 2시, 중국군 박격포가 준비 포격을 가하고 중국군 1개 대대가 공세를 가했다. 중국군은 다만스키 섬 주둔 소련군 대비 자그마치 15배의 수적 우위를 지니고 있었고 야신 중령은 일시적으로 철수해 부대를 재편성한 뒤 재돌입한다.소련군 BTR 2대가 추가로 격파당하자 레오노프 대령이 지휘하는 T-62 전차 4대로 이루어진 전차 소대가 반격을 가했고 그 과정에서 선두의 레오노프 전차가 중국군 RPG-2 대전차화기에 격파당했다. 레오노프 대령은 탈출하던 중 중국군 저격수에 사살당한다. 해당 T-62 전차는 이후 중국군에 노획되었다.

오후 4시, 탄약이 고갈된 야신 중령의 부대가 다만스키 섬을 떠나야 했고 135 차량화 소총 사단 예하 BM-21 다연장 로켓포가 중국군에 보복 포격을 가했다. 그 결과 중국군 24보병연대 지휘소와 야전기지와 포병 기지들을 타격해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가 발생되었다. 소련군의 122mm 곡사포와 152mm 곡사포도 포격에 동참했다. 소련군을 포격하던 중국군 박격포 부대와 포병 부대는 금방 발견되어 소련군의 포병 부대에 의해 박살나버렸다. 오후 5시 10분, 후방에서 대기 중이던 소련군 199 차량화 소총 사단 예하 대대 병력이 반격을 가해 다만스키 섬을 점령한 중국군을 격퇴했다. 불과 50분 만에 다만스키 섬의 중국군은 일망타진 당했고 생존한 부대원들은 도주했다. 저녁에도 중국군은 세 차례나 공세를 했지만 모두 소련군의 막강한 기계화 부대의 화력에 밀려 격퇴당했고 더 이상 중국군의 적대행위는 포착되지 않았다.#

종합해보자면 이 때 투입된 중국군은 68사단이었고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 소속으로 참전했던 경력이 있던 만큼 나름 정예 부대였다. 그렇기에 한국전 당시 UN군을 상대할 때 처럼 전선에서 부대가 대규모로 전진하는 구시대적인 전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소련군의 전술은 독소전쟁과 만주 작전을 통해 완벽히 익힌 바로 저런 전술을 격파하기 위해 만든 종심 전투 교리였다. 소련군은 병력은 적었으나 강력한 화력과 중무장한 기계화부대로 계속 중국군을 공격했고, 중국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측의 피해규모는 양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중국 측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군은 13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소련군은 27대의 장갑차량(전차 포함), 1대의 지휘차량, 다수의 트럭을 손실했다. 반면에 소련 측의 주장에 따르면 소련군은 150여 명의 사상사가 발생하고 전차 1대를 손실했고, 중국군은 800여 명이 전사했다. 현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 측의 피해는 최대 800명 규모에 달한다. 심지어 당대 일부 일본 전문가들은 최대 3000여 명의 중국군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다.

소련 극동 군관구 1부사령관인 파벨 플로트니코프 중장은 압도적으로 많은 중국군을 격퇴한 공로를 인정받아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미 1968년 10월부터 소련과의 국경출동을 상정하여 경계령을 내린 상태였던 중국 지도부는 경서빈관에서 상황을 지휘했다. 3월 15일의 궤멸적인 패배가 있자 마오쩌둥은 더 이상 싸우지 말 것을 지시했다. 마오쩌둥의 입장에서 이미 얻을 것을 다 얻은 후였다. 하지만 2주일 후에 있을 9차 전국대표대회를 위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선전부는 "전쟁을 대비하라!"라는 선전 문구를 걸고 호전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마오쩌둥은 대전투와 속전은 물론 핵전쟁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전국을 겁주었다. 하지만 사실 중국 지도부는 전바오 섬의 충돌을 별것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이 더 이상 커질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3.2. 고조되는 긴장[편집]
3.2.1. 중국 공산당 9차 전국대표대회[편집]
대략 2주 후, 1969년 4월 1일부터 4월 24일까지 중국 공산당 9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베이징에 도착한 대의원들은 소련과의 긴장을 이유로 대회에 관련해서 어떠한 얘기도 주고받아서는 안된다는 주의를 받았다. 개막식에서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이 교시했다.
"나는 우리 대회가 충분히 잘 진행되어 단결의 대회가 되고 승리의 대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현재까지의 경과는 비교적 명확하다. 정치노선이나 조직노선, 사상 방면에서 모두 뚜렷하다. 이로 인해 우리는 이 제1차 대회를 충분히 단결하는 대회로 이룰 수 있다. 이런 단결의 기초 위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겠는가? 이 대회를 승리의 대회로 이끌 수 있겠는가? 대회 이후 전국에서 더욱더 큰 승리를 이룰 수 있겠는가?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단결의 대회와 승리의 대회를 열 수 있고, 대회 이후 전국에서 더욱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마오가 말하는 '단결'이란 문혁의 기반이었던 '무산계급 독재 아래의 계속혁명'의 마오이즘을 중국 공산당의 지도 이념으로 자리매기자는 얘기였다. 이어 린뱌오가 제8차 중아우이원회를 대표,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이 작성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준비,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과정, 성실한 투쟁과 비판, 개혁을 잘 수행하는 문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에 관한 정책, 중국 혁명에 관한 최후 승리, 당의 정돈과 건설, 중국과 외국의 관계, 전당과 전국 인민이 단결해 더욱더 큰 승리 쟁취 등 총 8개 부문의 정치 현안 보고서를 낭독하였다. 4월 2일의 분조회의에서 장칭과 저우언라이는 린뱌오를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로 지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전바오 섬 전투에 참전하였던 29세의 지휘관 쑨위궈가 초대되었다.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황융성이 그를 직접 소개하였으며 마오쩌둥은 그를 크게 환영하였다.

4월 14일, 9차 전국대표대회 2차 회의가 개최되자 마오쩌둥은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의 주역인 왕훙원을 발언자에 포함시켜주었다. 결국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며 마오쩌둥 사상이 다시 당장에 삽입되었다. 4월 24일, 새로운 중앙위원회 선출을 마지막으로 9전대회는 폐막하였다. 4월 28일, 9기 1중전회가 소집되어 정치국 위원을 선출하였다. 마오쩌둥은 여기서도 문혁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나의 말은 항상 하는 말이다. 모두들 알고 있는, 새로운 말이 아니다. 단결이다. 단결의 목적은 더욱 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승리는 무산계급 지도를 보증하면서 전국의 광대한 군중이 단결해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 혁명은 끝나지 않았으며 현재 예를 들면 투쟁과 비판, 개혁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 (...) 보건대,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기초는 공고하지 않다.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상당히 큰 다수 공장의 우두머리, 지도권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있지 않다. 노동자 군중의 수중에 있지 않다. 무산계급 독재를 공고히 해 공장, 농촌, 기관, 학교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단결해야 한다."

여기에 마오쩌둥은 전바오 섬 사건을 언급하면서 전쟁 준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군사위원회가 조직, 마오쩌둥이 군사위원회 주석에 선출되었고 국방비를 34% 증액하자고 제안했다. 마오쩌둥의 목적은 달성된 듯 했다. 1969년 5월 24일, 중국 정부는 성명을 발표하여 전바오 섬이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토였다고 주장하였으며 평화적 담판에 의해 중소 국경 문제를 해결하길 원한다고 발표했다. 5월 31일, 마오쩌둥은 가벼운 마음으로 우한으로 지방순시를 떠날 정도로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소련이 얼마나 열받았는지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3.2.2. 신장성 충돌과 핵전쟁의 위기[편집]
중국이 낙관하는 사이, 국경에선 계속 충돌이 벌어졌다. 4월부터 6월에 이르는 기간, 극동과 신장에서 계속 충돌이 벌어졌다. 5월 경, 우즈베키스탄의 덜라티 마을을 두고 중국과 소련 양측의 무력충돌이 또 발생했다. 이 때 중국군은 무단으로 국경을 수정하려 시도했고 양측의 병력이 대치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1969년 7월 8일, 흑룡강성 고르진스키 섬에서도 충돌이 벌어졌다. 가장 규모가 컸던 사건은 1969년 8월 13일, 신강성 유민현 사건이었다. 중국군은 이전부터 카자흐스탄 국경지대의 잘란스콜 호수를 자주 침범했고 소련군은 참호를 구축하고 BTR 장갑차 두 대를 전진배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긴장이 고조될 때 중국군이 기관총을 발사했고 소련군은 곧바로 맞보복을 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곧 이어서 소대 규모의 수십명의 중국군이 대전차화기로 무장한 채로 공세를 취했고 언덕 하나를 점령했다. 그러자 소련군 차량화소총부대가 반격을 가했고 언덕은 탈환되었다. 중국군은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채 패퇴해야 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한 반면 중국군은 2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생포되고 40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중국군의 TT 권총 4정, SKS 소총 9정, RPD 기관총 4정, 대전차 수류탄 4기, 수류탄 27개, 영화 카메라 2개, 카메라 1기 등이 노획되었다.[8]

이 사건 이후 소련은 핵공격을 언급하는 강경한 노선을 취했다. 프라우다는 중국이 위험한 나라로 변했다고 비난했으며 소련군 기관지 <붉은 별>은 '현대의 모험가'들에게 압도적인 핵공격을 안겨주겠다고 선언했고 소련이 중국을 핵으로 공격하기 위해 동유럽의 지지를 호소한다는 소문도 흘러나왔다. 워싱턴의 소련 대사관은 백악관에 소련이 중국 핵시설을 공격할 경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에 대해 비밀리에 타진했고 미국 정부는 대답을 회피했다. 가을 들어서는 소련이 신장의 중국군 핵무기 실험장에 핵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외신과 소식통을 등해 들려오는 핵전쟁의 위험에 마오쩌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중국은 핵무기와 미사일은 보유하고 있었으나, 대륙간 탄도 미사일은 없고, 사정거리 2,000km 정도의 DF-2 준중거리 탄도 미사일 정도만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모스크바를 타격하기에는 무리였다. 반면, 소련군은 극동에 R-12/R-14 중거리 탄도 미사일들을 충분히 배치하고 있었고 중-소 간 핵전쟁이 벌여진다면 소련은 동부의 도시 일부를 내주는 대가로 중국을 절멸시키는 것이 가능했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군의 기계화 빈도는 1966년, 마오쩌둥이 군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뤄루이칭, 양상쿤 등을 펑더화이 파벌로 몰아 숙청해버린 탓에 건국 이후 거의 진행되지 않아 공군이나 기갑부대는 1950년대 수준에 머물고 있었으며[9] 공군의 경우 야간 전투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도 문화대혁명의 직격타로 수많은 고급 장교들이 박해를 받아 인민해방군은 정규전을 치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소련에 망명해 있던 왕밍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들에게 중국에 대한 무력개입을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중국의 현재 정세는 사회주의 진영과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1956년 헝가리 사건보다 더 위험하다.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 우리는 그들에게 정치적 지원은 물론이고 무력을 통한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고, 가능하다면 중앙아시아와 몽골인민공화국의 민족들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해야만 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소련군이 극동과 신장은 물론,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한 몽골 국경에까지 군대를 배치하자 8월 27일, 마오쩌둥의 제의로 저우언라이가 전국인민방공지도기구를 설립, 전국적으로 방공공사를 세우게 했다. 8월 28일,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는 몽골과 소련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모든 성에 군사 동원령을 하달하고 전국에 적색경보를 발령하여 군민, 군정 단합을 강화하고 파벌의식을 타파하며 반침략전쟁을 빈틈없이 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각 성, 직할시, 자치구에서 선전대회가 열렸으며 저우언라이의 지도 아래에 대대적인 베이징 소개 작업이 이루어졌다. 마오쩌둥은 건국 20주년 기념식에 쓰일 원고에 "전 세계 인민들은 단합하여 모든 제국주의, 사회제국주의가 발동하는 침략전쟁을 반대하며 특히 원자탄을 무기로 한 침략전쟁을 반대하자!"라는 문구를 추가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유럽에 신경 쓰기도 바빴던 브레즈네프는 중국 역시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역시 만약 소련이 중국에 핵공격을 가할 경우 미국이 우호적인 중립을 취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사를 전달해왔다. 닉슨과 키신저는 소련이 중국에 핵공격을 가할 경우 130개의 소련 도시에 핵공격을 가할 계획을 수립했고 '행동'에 옮긴다면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주미 소련 대사관에 경고했다.#그렇지만 마오쩌둥 지도부를 매우 혐오하고 불신했던 브레즈네프는 마오쩌둥과 만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코시긴 수상에게 중국과 협상할 것을 지시했다. 7월 26일, 소련 외교부는 중국 국무원에 서신을 보내 중소고위급 회담을 열어 긴장관계를 완화시키자고 제안했으나 8월 13일의 신장성 유민현 공격이 있자 중국은 격노하여 어떠한 형태의 대화도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는 한편 소련에 대한 외교 공세에 나섰다.

3.3. 진정[편집]
3.3.1. 베이징 공항 회담[편집]

그러던 중 1969년,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사망했다. 9월 8일, 저우언라이는 조문단을 이끌고 하노이에서 열릴 호찌민의 장례식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소련 대표단과 접촉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9월 4일 기습적으로 조문을 하고 당일치기로 중국으로 돌아가버렸다. 9월 8일, 하노이에 도착한 코시긴은 저우언라이가 하노이에 체류하고 있을 것이라 여기고 주월 중국 대사에게 저우언라이를 만나고 싶다고 타진했다. 이는 베이징으로 전달되었고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에게 코시긴을 만나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코시긴과 만나겠다고 동의하였으나 소련의 위협에 대한 불쾌감을 표출하기 위하여 회담 장소를 베이징 공항으로 잡았다.

9월 11일, 알렉세이 코시긴과 저우언라이 사이에 3시간 동안 회담이 열렸다. 저우언라이는 회의 시작에 앞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우리는 현재 국내 일을 처리하기도 바쁘다. 왜 전쟁을 하려 하겠는가? (...) 당신들이 중국의 핵 기지를 선제공격 수단을 없애버리겠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전쟁, 침략으로 선포하고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소련측은 이를 중국 측이 소련의 핵위협에 겁을 먹었으며 자신들이 소련과 전쟁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고 시인한 걸로 인식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코시긴에게 3가지 사항을 제시했다.
1. 중소변계 협상은 어떠한 위협도 받지 않는 상황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2. 이를 위해 변계의 현상태를 유지하며 무력충돌을 피한다.
3. 분쟁지역에서 쌍방의 무장력이 접촉하지 않게 한다.

코시긴은 이에 동의하며 쌍방에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변방 부문에서 서로 연계하여 처리하게 하자고 보충했다. 저우언라이는 이에 동의하였고 최종적으로 현재의 국경 상태를 유지하고 각국 지도부 간의 전화 연계를 회복, 양국 간에 서로 대사를 파견하여 무역 회복, 차관급 차원의 국경회담을 열기로 합의하였으며 이를 쌍방의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동의를 얻어 실행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로써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아직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씨가 남아 있었다.

3.3.2. 중국의 전쟁 준비[편집]
최고조에 다다랐던 긴장은 일단 수그러들었지만 마오쩌둥은 여전히 소련의 저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국경에 대규모 소련군이 여전히 배치되어 있던 것은 물론이고 9월 11일 베이징 공항 회담 이후 발송된 소련 측 합의서는 중소 변계분쟁지역 및 쌍방 무장부대가 분쟁지역에서 접촉하지 않을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소련이 변계 협상을 구실로 습격해 올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9월 17일, 천이, 예젠잉, 쉬샹쳰, 녜룽전 등 4명의 원수가 "미국이 중소 간의 모순을 이용하려 하고 소련은 중미 간의 모순을 이용하려 하는데 우리도 마땅히 미소 간의 모순을 의식적으로 인용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하였다. 예젠잉이 삼국지를 인용하며 제갈량이 오나라와 손잡고 위나라에 북벌을 거행한 것을 본받아 미국과 손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별개로 소련의 침공에 대비한 <삼선작업>에 더욱 박차가 가해졌다. 전국 각 지역에 침략을 대비하기 위한 지하도시 건설이 행해졌고 베이징에서만 85제곱킬로미터 규모의 지하도시가 건설되었으나 전문 공학자들을 부르주아로 몰아 숙청해버린 탓에 기술적인 설계 없이 마구잡이로 흙을 파서 공정이 이루어졌고 전국 각지에서 매몰 사고나 지반 함몰 사고가 일어나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또한 지하대피소를 만들기 위한 벽돌 기증하기 운동이 벌어져 전국 각지에서 대약진 운동 시절의 토법고로를 되살려 벽돌 굽기가 대유행하였다. 당연하지만 급조한 가마에서 제대로 된 벽돌이 나올 리가 없었으므로 멀쩡한 집을 마구 부수어 벽돌을 조달해야 했다. 가마 역시 위험천만하긴 마찬가지라서 폭발, 붕괴 사건으로 상당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한편 인민해방군도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공군에 최고 수준의 경계령이 하달되었고 린뱌오가 10월 1일 국경절 행사를 틈타 소련이 베이징을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베이징의 저수지에서 모두 을을 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저우언라이의 저지로 중단되었다. 마오쩌둥은 모든 공산당 간부들에게 지방으로 대피하라는 비밀 지령을 하달했고 숙청당한 간부들도 모두 지방으로 보내졌다. 천이는 스자좡, 녜룽전은 한단, 류사오치와 쉬샹쳰은 카이펑, 예젠잉은 창사, 류보청은 항저우, 덩샤오핑과 천윈은 난창, 주더와 리푸춘은 광동성 충화현으로 피신했는데 이는 군부 내부에서 자신에 반대하는 원수들을 지방에 보내려는 린뱌오의 의도가 일부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에서 예젠잉은 천보다 조사 임무 때문에 돌아왔다. 정부 기구 역시 최대한으로 축소되어 각 부처와 기구가 중국 각지로 분산되었고 베이징과 각 도시 시민들도 집과 소지품을 처분하고 시골로 대규모 피난을 떠나야 했다. 잔류한 시민들은 정부의 명령에 따라 전쟁시 대피요령, 응급처치 요령, 화재진압 요령, 소련과 미국 항공기 식별법 등을 공부하며 전쟁을 대비했다. 마오쩌둥 역시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한에 머물렀다. 오직 저우언라이만이 수도에 남아 작전 참모들과 지하 작전 상황실에서 상황을 지휘했다.

10월 17일, 쑤저우에서 휴양 중이던 린뱌오는 지하벙커로 들어가서 인민해방군에게 비상경계를 발동하고 도시에서 피신하라는 제1호 명령을 전군에 하달했다. 린뱌오의 보고를 받은 우한의 마오쩌둥은 1호 명령을 승인했고 2시간 후에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황융성이 전국 각지에 1호 명령을 하달했다. 100만명에 달하는 병력과 4000대의 전투기, 600대의 전함이 소련의 기습에 맞서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로 이동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총격전 조금 일어난 것 가지고 전쟁이 일어나겠냐면서 혼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생필품 품귀 현상이 일어났고 농민들은 곧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얼마 남지 않은 가축들을 도살하여 먹어치우기도 했다. 심지어 지하활동 중이던 반정부 조직들이 미국과 소련과 힘을 합쳐 마오쩌둥을 타도해야 한다는 민주화 운동을 하기도 했다.

3.3.3. 중소국경회담[편집]
하지만 운명의 10월 20일에는 중국의 우려와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련 대표단은 평화적으로 도착하였고 저우언라이는 11월, 전국에 내려진 긴급상황을 취소하였다. 하지만 협상은 난황을 겪었다. 중국 측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전개했다.
1. 지금의 국경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불평등조약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2. 이들 조약을 기초로 현재상황을 고려하여 국경문제를 정하여야 하나 중국은 러시아와 체결하여 빼앗긴 영토를 요구하지는 않겠다.
3. 이 조약을 위반하고 침략 점거한 영토는 원칙상 상대방에게 귀환시켜야 하나 쌍방은 평등협상에 의하여 서로 양보한다는 원칙 아래 당지 거주민들의 이익을 고려하여 필요한 조정을 실시환다.
4. 중소평등신약을 체결하여 중러불평등구약을 대체하고 국경을 정한다.
5. 중소국경 문제는 평화적 담판에 의하여 전면적 해결을 하며 현상유지를 통하여 무력충돌을 피하고, 국경 분쟁지역에서는 스스로 철군하거나 들어가지 않는다.

허나 소련은 중소국경에 분쟁지역이 있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중국이 제시한 쟁의지구의 개념은 소련에 대해 영토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맞섰다. 따라서 쟁의지역의 영토를 소련 영토로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소련이 베이징 공항 회담에서 합의된 사항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고 1969년 12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진주하자 이를 이유로 협상을 중단하였다. 어쨌거나 세계를 3차 세계 대전으로 몰아넣을 뻔 했던 중소간의 분쟁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허나 마오쩌둥이 사망하던 순간까지 중국은 소련을 주적으로 설정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중국과 소련의 국경선은 평화가 온 뒤에도 불확실하다가 결국 소련이 해체된 뒤에야 국경 분쟁을 완전히 마무리지었다. 분쟁의 불씨가 되었던 전바오/다만스키 섬은 1991년, 고르바초프의 합의로 국경협정이 체결되어 중국에 귀속될... 뻔 했으나 그 직후 소련이 붕괴되는 바람에 승인되지 못하고 한참을 표류하였고 당사국이 소련 한 나라에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신생국들로 늘어나면서 매우 복잡해졌다.

결국 1996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장쩌민 주석이 고르바초프의 중러 동부국경협정을 준수하기로 합의하면서 겨우 협상이 재개되었고 2004년에야 최종적으로 국경협상이 완료되어 2005년에 중국 전인대와 러시아 국가두마에서 비준됨으로 최종적으로 국경이 확정되었다. 다만스키 섬은 넘겨받았지만, 중국측이 다른 곳에서 크게 양보해서 경상북도만한 영토가 러시아측으로 넘어갔다고 하는데, 두 국가의 국경선이 워낙 넓어서 눈에 띄지도 않는다. 이 지역은 인구밀도가 낮고, 강의 퇴적지대와 사막 같은 땅들로 이뤄져 있어 쓸모있는 용도로 사용될 여지도 적다. 그런데도 여전히 중국-러시아 국경은 워낙 길고 땅이 얼었다 풀리는 환절기에 국경이 불명확해지는 일이 계속 발생해서 양국 간에는 매년 국경 재획정을 위한 협의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러시아 지도를 매년 구입해서 보면 매년 어딘가 미세하게 조금씩 바뀌는 국경선을 볼 수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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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누짱 21-08-10 12:40
   
최근 중인 국경분쟁에서 나온 몽둥이싸움이 이때 시작된거로군요. 무술유단자끼리 싸웠다니 골때리네요
이름없는자 21-08-10 17:22
   
이거  MBC 서프라이즈 프로에서 이 사건을 다룬 에피소드가 재미있었죠. 그 에피소드에 무한도전의 유재석이 산동꼬마로 박명수가 마오쩌뚱으로 등장해 재미를 주었죠.  https://blog.daum.net/lifestory21c/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