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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8-10 12:49
[기타] 중국ㅡ베트남 전쟁 이야기
 글쓴이 : 지누짱
조회 : 1,627  


3. 전쟁의 발발[편집]

중국군의 공세. 국경 전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침공했으나 주공은 라오카이와 란손 방면이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덩샤오핑과 화궈펑은 베트남에 대한 징벌행위로써 무력침공을 비밀리에 모의, 대외적으로는 캄보디아 해방 등을 명분으로 삼아 1979년 2월 17일, 중국군이 국경을 넘어오며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베트남의 국방장관이자 미국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보응우옌잡 대장은 친중파이자 주화파자였기 때문에 사실상 지휘에서 물러났고, 총참모장인 반띠엔중 대장이 총지휘를 했다.[14]

베트남군 주력이 모두 캄보디아 방면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중월전쟁의 사진에는 베트남군 여자 민병이 등장한다. 베트남군의 주력은 당시 1000km가 떨어진 캄보디아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 북부는 거의 공백상태였다. 중국에서는 당장에 하노이까지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전했으나 문제는 당시 베트남이 중국이 쉽게 털 수 있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초강대국 미국도 비록 자신들 스스로 만들어놓은 제한 탓이라고는 해도 8년 만에 GG쳤는데, 중국군이 쉽게 상대할만한 적은 아니었다. 중월전쟁 당시 베트남군의 총병력은 현역만 세계 3위권이었고, 1975년부터 캄보디아에서 철수하는 1980년대 말까지 베트남군 총병력은 100여만 명이 넘었다. 이후 감축해서 최근에는 현역 45만, 예비군 500만으로 현재도 대병력이다. 게다가 저 민병들 중에 병사나 장교들 사이에는 비엣민, 베트콩 출신들이 많았다. 당연히 이들 모두 다 게릴라전이나 시가전 등 실전경험들이 중국군보다 더 풍부할 정도로 많았다. 또한 미군이 남기고 간 무기도 상당했고, 그 덕분에 무기의 양은 적어도 질은 1970년대 말 전쟁 시점.[15] 예를 들어 1980년대 말까지 베트남군은 미제 전투기 F-5와 A-37 및 미제 헬리콥터 다수를 사용했을 지경이었다.

반면 당시 중공군은 열악한 물적 상황에서도 창의력과 오랜 실전에서 다져진 경보병 발로 하는 기동전으로 UN군을 깜짝 놀라게한, 하드웨어는 부실했어도 소프트웨어는 상당히 숙련되었던 30년전 한국전쟁 시절의 중공군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어도 중월전쟁이 터진 79년이면 중일전쟁과 2차대전, 그리고 한국전에서 실전을 쌓은 세대도 퇴역하고 은퇴할 시절이고, 무엇보다 이 시기 중국은 여전히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군부 숙청과 군대 포함한 사회 전반의 전문성 마비가 여전히 생생하던 시절. 애초에 강대국의 정규군 vs 미국하고 싸운거 복구하니마니 하는 (중국에 비하면)[16]소국의 후방 민병대 뻔한 싸움으로 보였던 전쟁이 막상 뚜껑 까보니 이런 내부 조직적 차이가 제대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3.2. 과정[편집]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양국의 공산화 직후인 1976년부터 지속적으로 국경에서 분쟁을 벌이고 있었고 상당한 규모로 확대되고 있었다. 중국-베트남의 틈새에서 캄보디아가 노골적으로 반베트남 정책을 취하자 베트남은 캄보디아의 "레짐 체인지"를 목표로 13개 사단 15~20만의 정예병력을 동원하여 1978년 12월 21일 본격 캄보디아 침공을 시작했다. 1월 7일 베트남군은 프놈펜을 함락시키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수립했는데, 베트남군 및 정부 수뇌부는 2월에 캄보디아 신(괴뢰)정부의 출범을 축하하기 위해 대거 캄보디아를 방문하고 있었다.

베트남군이 3주만에 캄보디아를 석권하는 동안 중국은 우방국 캄보디아에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 결국 2월 중국은 베트남 수뇌부가 캄보디아를 방문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을 철군시키기 위해 1979년 2월 17일에 중국군도 베트남 침공을 시작했다. 중국군은 윈난성과 광시성에서 출발하였으며 베트남 산악지대와 정글을 재빠르게 돌파, 국경 너머 약 30km 정도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특히 이번 전쟁은 베트남에 대한 경고 성격이 짙은 만큼,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 뒤에는 바로 철군할 생각이었으므로 전투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의 지형은 산악지대 너머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고, 만약 산악지대가 뚫린다면 수도 하노이까지는 일사천리인 상황이었다.

중국군은 정글지대를 돌파하기 위해 인해전술에 가까운 밀어붙이기식 돌파 전략을 구사했다. 베트남군은 이를 간파하고 산 능선을 따라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진지에는 베트콩 출신들을 배치하고 각종 부비트랩들을 설치했으며 또한 정글을 이용한 게릴라전을 펼쳤다.

원래 중국 침공군의 총지휘는 인민해방군 내에서 가장 지장으로 알려진 쑤위(1955년 대장)가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쑤위가 건강이 안좋았기 때문에 광저우 군구 사령관이던 쉬스유(1955년 상장)가 맡았다. 쉬스유는 1920년대부터 국공내전과 항일전쟁을 겪어온 군인이었고, 광저우-난징 군구 사령관으로 오래 재직해 왔다. 침공군의 참모장은 부수상 덩샤오핑이 직접 맡았는데, 총참모장을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쉬스유나 덩샤오핑은 1940년대 말의 국공내전에서는 엄청난 활약을 해서 장제스군을 패퇴시키는데 한몫했지만, 당시에는 두명 모두 70대에 접어들었고 모두 실전을 겪은지 30년이 지난지라 군인으로서는 흘러간 인물이었다(여기에 덩샤오핑은 국공내전 이후 군문을 떠나 정치가로 전직했다). 이에 반해 베트남측의 지휘관인 반띠엔중은 1940년대부터 계속 일본-프랑스-미국-캄보디아와 전쟁을 치뤄왔기 때문에 중월 양국은 지휘관부터 능력 차이가 확연했다.

중국군은 1950년대의 혼란과 빈곤 및 60~70년대의 문화대혁명으로 한국전쟁 이래 통신 장비나 전술이 지난 25년간 크게 발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 베트남군은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베트남의 지형에 맞추어 교리를 발전시킨 상태였으며, 마오쩌둥의 국공내전 당시의 전술을 익혔기 때문에 중국군의 전술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21] 베트남군은 미군에게서 노획한 M113 같은 장갑차나 미군의 군용 수송기, 헬리콥터를 이용해서 보병을 빠르게 수송, 재배치하였으며 거점을 뺏기기 전에 중국군의 위협으로부터 재빠르게 빠져나가 새로운 방어선에 투입하는 기동 전술을 사용했다. 전투 병력을 최대한 보전한 것이다.

베트남군은 소련제 대전차 미사일을 활용하여 개전초 24시간 동안에 중국의 63식 경전차를 13대나 격파했다. 또한 초기에 15대나 되는 중국군 항공기를 격추시켰다.

중국군은 진격이 지체되는 것에 초조함을 느끼고, 예비부대 10만의 병력을 추가로 동원하여 총 20만의 병력을 규합해 대공세를 펼쳤다. 결국 베트남군의 방어선은 뚫리기 시작하였고 돈단과 몽카이가 중국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러나 중국군은 2,000여 명의 병력을 손실했고, 40여 대의 기갑장비가 파괴되었다. 그에 비해 베트남군은 840여 명의 병력을 잃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베트남군은 역공을 시작하여 2월 28일에는 돈단을 다시 탈환하였다. 중국군 수뇌부는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3월 1일부터 한국전쟁에 투입되었던 정예부대인 325사단과 338사단을 주축으로 란손을 공략한다. 중국군의 공격으로 많은 베트남군의 방어진지가 격파당했고 베트남군은 중과부적으로 밀리긴 했지만 전략적인 철수로 중국군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입혔다. 결국 중국군 6만명의 집중공격으로 란손은 함락당했고, 중국군은 란손을 조직적으로 파괴한 뒤 바로 철수했다. 3월 2일에는 중국군이 국경 인근의 라오카이도 공격하여 파괴하였다. 중국은 전략적 목표가 달성되었지만 예상보다 병력 손실이 많아 더 이상의 전쟁 지속이 무리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어차피 완벽하게 승리하여 베트남을 굴복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대국인 중국이 전쟁을 벌인 이유는 캄보디아를 무단점거한 베트남군의 철군이었다. 중국은 앞서 언급된 지역에 대한 순간적인 점거는 가능했지만, 베트남의 주력군이 캄보디아에 있었다는 점과 인민해방군의 상대였던 베트남군은 대다수가 민병(예비군)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의 철수는 중월전쟁을 통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중국의 실패와 별 다를 바 없다.

4. 종결[편집]


침공이 시작된지 3주가 조금 안된 3월 5일 중국측은 "중국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철수한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일방적으로 병력을 철군시키기 시작했다. 중국군은 원래 목표였던 베트남의 캄보디아 공격을 중단시키기는 실패했고, 그저 국경도시를 파괴하고 베트남에 지속 팽창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경고만 보낸 뒤 물러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원래부터 중국군의 목표는 베트남의 점령이 아니라 국경에서 다발적 분쟁을 이끌어 베트남 주력을 북부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직후로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기간 전쟁을 치를만한 역량도 없었다.[22]

철군하는 중국군을 베트남군이 가만 놔두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군의 철군 도중에도 계속 전투가 벌어졌다. 중국군은 중국 경내로 철군하면서 베트남군이 이용할 수 있는 교량 및 도로를 모두 파괴했다. 결국 침공한지 한달이 지난 3월 16일이 되어서야 총성은 일단 멎었다.

양측 공식발표는 서로 만 단위 이상을 사살했다고 하나, 실제론 중국군 5,000여명이 사망하고 베트남군 4,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집계된다. 다만 공산국가의 특성상 중국측과 베트남측 모두 서로의 피해를 축소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중국군 사망자는 많게는 2만 6천명까지 추산, 베트남군은 민간인까지 합해서 3만명으로 추정치가 올라간다. 대체로 베트남군의 피해가 중국군보다 약간 많거나 거의 비슷한 걸로 나오는데, 요새 지대로 돌격하는 입장이고, 중국군이 형편없었다는 걸 생각해도 경무장한 민병 상대로 중무장한 정규군이 사실상 비슷한 피해를 본 것이다. 이후 중국은 현대화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경제력이 향상되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군 현대화에 착수하게 된다.

중월 양국은 일단 휴전하고 종전협상을 벌이게 되었다. 중국군이 잡은 베트남군의 포로는 1636명, 베트남군이 잡은 중국군 포로는 238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여름에 교환되었다. 하지만 12월에 협상이 결렬되면서 양국은 이후 10년간 국경부근에서 고지전을 계속하게 된다.

양측은 당시 모두 승리를 주장했으나, 현재로 봐서는 전쟁 목표를 달성시킨 베트남군의 승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전술적으로 봐서는 베트남군의 방어선을 뚫고 어느 정도 내륙까지 진입한 중국군의 승리지만 전략적, 즉 전쟁목표의 달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캄보디아 주둔군을 철수시키지 않고 엄청난 피해까지는 입지 않은 상태로 적인 중국군의 철수를 이끌어낸 베트남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중국군이 최대로 진출했을 때조차 베트남의 전쟁 수행 역량에 큰 타격을 주지 못했으며 실제로 캄보디아에 있던 주둔군은 아예 빼지도 않았다.

게다가 베트남의 경우 주력이 민병(예비군)으로 구성돼 있었고 주력군은 캄보디아에 있었다는 점과 중국군은 정규군이었다는 점에서 중국에 대한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는 낮아지게 되었다. 중국군 돌아가는 상황이야 국제사회에 잘 알려져 있었지만 민병을 밀어버리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당시의 중국군이 이전의 다른 전쟁들에 비해 졸전을 펼친 이유는 1960년대 이래로 정치 문제 때문에 전력 증강이 거의 멈추었고 문화대혁명 때문에 고급 지휘관 상당수가 숙청[23]되었으며, 군 훈련도 전투보다는 정치 교육에 더 매진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국전쟁이나 중인분쟁에서의 경이롭기까지 했던 인상적인 작전능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전쟁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므로 패전이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다.

다만 베트남은 자국이 전장터가 된데다가, 중국측이 도시나 도로, 교량을 계획적으로 파괴하고 떠났기 때문에 이런 물적 피해는 중국측에 비해 훨씬 더 컸고, 아래 설명할 몇몇 요충지는 중국군이 철수하지 않고 계속 점령하면서 국경지역의 영토를 잃었다. 즉 중국군은 중월국경에서 국경선이 불명확했거나 혹은 전략적으로 유리한 요충지 몇몇은 자국군을 주둔시켜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런 곳은 227제곱킬로미터 정도이되었으며(서울 면적의 절반 정도), 이런 곳들은 아래 설명할 고지전의 전장이 된다. 결국 1992년 평화조약 때, 이곳을 반반씩 나누어 중국측이 114제곱킬로미터, 베트남측이 113제곱킬로미터를 차지하는 것으로 확정했다. 굳이 중국측이 얻은게 있다면 이렇게 얻은 영토일 것이다.

베트남은 프랑스, 미국, 중국을 몰아낸 국가로서 한동안 동남아 지역의 패자로 군림한다. 민족주의적인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캄보디아, 라오스 뿐만 아니라 태국, 버마까지 아우르는 동남아 공산국의 맹주를 꿈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세계 열강에게 정복당하기만 한 것처럼 알려지기 쉽지만, 베트남 자체도 엄청난 소중화 노릇을 하며 주위의 소수 민족을 동화시키려고 한 건 사실상 마찬가지다. 당장 사이공을 비롯한 남베트남 일대는 19세기 프랑스 식민화 직전까지만 해도 역사적으로 참파나 캄보디아 땅이었던 걸 베트남이 수세기에 걸친 남진 정책으로 뺏어먹고 식민화한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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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누짱 21-08-10 12:56
   
오래전부터 베트남 반중의식→친중 크메르루즈의 학살과 반베트남정책→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중국의 베트남 침공→베트남 캄보디아철군 이런 순서로 마무리된 국경전쟁이었네요. 중국의 인해전술과 베트남의 오랜 전쟁경험이 맞붙어 결국 베트남의 사실상 승리로 귀결.
땡말벌11 21-08-10 13:55
   
중공군 60만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름없는자 21-08-10 18:11
   
이게 중국이 베트남에 털리고 개망신 당한 때. 베트남전이 끝나고 오래되지 않아 베트남군이 전투경험 많아서 훨씬 수가 많은 중국군을 몰아붙임. 결국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국이 물러남.
승리만세 21-08-10 20:59
   
전쟁은 베트남이 이겼는데 중국군이 베트남을 초토화 작전을 통해 안그래도 가난한데 인프라들과 농경지와 거주지들을 작살내고, 국경지대 영토까지 상실함
중국군을 격퇴했다는 대전제 에서 승리는 했지만 이후 베트남을 나락가게 만든 전쟁임
반면 중국은 큰 충격을 받고 개혁개방과 군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