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니-퐁넛 양민학살 사건( ):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중부의 꽝남 성의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의 비무장 양민 79명이 대한민국 해병대에게 대량학살당한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해 79명의 베트남 여성과 아이들이 해병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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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미국군.)
2월 12일, 대한민국 해병대 소속 제 2해병여단(일명 청룡여단) 제 1대대 1중대는 퐁니 마을과 인접 마을인 퐁넛 마을에 진입하고 있었다. 근데 어디선가 총알이 하나가 날아와서 중대원 한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베트남 양민 79명을 학살했다. 희생된 사람들은 '비무장' 양민들이었다 월남인 입에서 한국인 개되끼란 말이 욕이 나온다 일부 생존한 부상자들은 학살이 벌어진 당일 마을에 도착한 미군 해병대와 남베트남 국군에 의해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국군이 이 두 마을에서 저지른 학살은 '인간이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다'는 증명을 남겼다. 어떤 어머니는 막내에게 젖을 물리다가 죽음을 당했고, 어떤 젊은 처녀는 두 쪽 가슴이 잘리고 그 이외에도 엄청난 자상(칼로 베인 상처)을 입은 채 다음 날 어머니와 아버지를 불러가며(어머니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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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태워진 희생자의 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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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아이의 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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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처녀의 시신. 두 쪽 가슴이 잘려나갔다. 참고로 아직 살아있는 상태에서 찍은 사진이다.)
1970년 1월 10일, 미군 대령 로버트 모어헤드 쿡은 학살이 대한민국 해병대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이라고 보고했다.
타이빈 양민 학살 사건(): 1966년 대한민국 국군 소속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일명 맹호부대)가 베트남 중부 타이빈에서 저지른 대량 학살().
(빈딘 성.)
베트남 남동부 빈딘 성의 타이손 구역 타이 빈 마을에서 벌어진 2월 12일~3월 17일에 걸친 대량학살로 인해 약 1,200여 명에 달하는 비무장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퐁니-퐁넛 양민 학살은 규모에 비하면 여기에는 쨉도 안된다.
군사 작전 기간 동안, 맹호부대는 15개의 작은 마을에 침입했다. 피의 잔치가 벌어졌는데, 어느 마을은 71명 중 68명의 민간인이 몰살되었으며, 3명만이 살아남았다.
이 학살 사건 중 가장 규모가 큰 학살은 2월 26일, 고다이 마을에서 벌어졌다. 대한민국 국군은 베트남의 민간인들을 칼로 찌르거나 총으로 쏘는 등 각종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했다. 한 시간 만에 380명의 베트남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 이 학살 이후 베트남에서는 해당 마을에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거기에는 희생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빈 타이 학살 사건(): 1966년 10월 9일 한국군이 베트남 남부 송베 성() 소속 푸옥 빈() 구역의 빈 타이 마을에서 일으킨 학살.
이 학살 사건으로 인해 68명의 베트남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 당시 청룡여단 7중대 사령관이었던 김기태 대령은, 10월 9일 한국군이 빈 타이 마을의 집들을 불태우고, 불타는 집에서 달아나는 베트남 민간인들을 총으로 쏘아 학살했다고 시인했다.
빈 호아 학살 사건(): 1966년 12월 6일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 성()의 빈 호아 마을에서 한국군이 일으킨 학살. 당시 학살 희생자의 대부분은 어린이나 노인, 여자, 임산부들이었다.
422~430명의 베트남 양민들이 학살되었고, 이 가운데는 21명의 임산부가 있었다. 이들을 죽이면서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생명도 같이 학살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수백여 마리의 버펄로와 소들을 죽였으며, 마을의 모든 건물을 불태웠다.
생존한 일부는, 자신들의 가족을 죽이고, 자신들의 재산을 불태우고, 자신의 소들을 죽인 한국군에 대한 만행을 잊지 않았고, 그 분노를 총칼을 듬으로써 표시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베트남 민족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베트콩에 가담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미군에 총을 겨누었다.
한국군에도 총을 겨누었다. 한국군은 애꿎은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하면서 자신들의 적만 생산해낸 꼴이 되었다.
디엔 니엔-푸옥 빈 학살 사건(): 1966년 10월 9일과 10월 10일에 걸쳐 한국군이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 성의 틴 손 마을()에서 베트남 비무장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
디엔 니엔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은 디엔 니엔의 사원에서 벌어진 것이다. 또 다른 학살 사건은 푸옥 빈의 학교 마당에서 발생했다. 희생자들 중 대다수가 여성, 노인, 어린이들이었다. 베트남 에 따르면 180명 정도가 학살되었지만, 꽝응아이 성의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280명 정도가 학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1966년은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이 유난히 많이 발생한 해였다.
하 미 학살 사건(): 1968년 2월 25일 베트남 중부의 꽝남 성 하 미 마을에서 일으킨 학살 사건.
(꽝남 성.)
학살로 인해 30가구의 135명의 여성, 노인 어린이들이 학살되었다. 학살 이후 한국군은 희생자들의 작고 얄팍한 묘지를 불도저로 '정리'했으며, 그 시신들을 그냥 대량으로 묻어버렸다. 2000년 12월에 135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
한국의 일부 시민들은, 베트남 파병이 인간적으로는 잘못 되었다고는 하나 그것이 한국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므로 정당하다고 자신들을 자기 합리화로 이끄는 사람들이 있다. 국사 교과서에도 '베트남 전쟁이 한국 경제에 도움을 주었다'고 당당히 기술되어 있고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같은 내용은 들어가 있지를 않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예를 들어, 옆집 강도가 자신의 집에 침입하여 자신의 가족을 죽이고 물건을 강탈했다고 생각해 보라. 피해자들의 분노가 씻기기나 하겠는가? 똑같은 이치다.
10억 달러에 이르는 한국의 경제적 이익은 분명 한국에게 있어 큰 '성과'였다.
불과 수십여 명의 기술진을 파견하고 20억 달러를 벌어들인 타이완이나, '메콩 강에 발 한 번 적시지 않은' 일본이 이른바 '베트남 특수'를 통해 벌어들인 100억 달러에 비교하면 이게 큰 성과인지는 의문이 간다.
한국의 인명 손실도 만만치 않았다. 5천여 명이 전사하고 11,000여 명이 부상, 수만여 명이 고엽제 관련 병에 시달려 고생했다. 물론 지하에서 아직도 울부짖고 있는 베트남의 원혼들,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수백만의 베트남 고엽제 후유증 환자들에 비하면 그 고통은 새발의 피지만.
베트남 전쟁 사망자 중 8%만이 군인이었고 92%는 민간인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과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양심에게 큰 상처를 준, 20세기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였다.
(1968년 밀라이 학살 직전의 베트남 여성과 어린아이들. 모두 공포에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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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베트남 여성.)
제가 주장하는것은 전쟁으로 인한 실수라 할지라도 우리가 책임질부분이 있으면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해서 베트남과의 관계를 재 정립하자는 이야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