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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1-30 18:15
[기타] 대만군이 87년에 베트남 민간인 학살한 사건 번역
 글쓴이 : 노닉
조회 : 3,159  


아직 대만에 계엄령이 시퍼렇게 살아있었던 1984년, 중국 본토에서 젋은 부부가 진먼현 부속섬인 다단섬으로 헤엄쳐서 망명해 옴. 당시 다단섬 방위대장은 부부를 사령부로 안전하게 인계했지만 정작 방위대장은 '분쟁 지역에서 어떠한 형태의 항복도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상부 지시를 어겼단 이유로 포스타가 명령해서 즉시 직위해제당함.


저 사건 후 진먼섬 473여단 중령이 모든 병사들을 불러 '섬에 상륙한 사람은 그 누구든 반드시 사살해야 한다. 예외는 없다'는 연설을 했고 저 연설후 그는 472여단장으로 승진함. 즉위해제시킨 포스타는 1985년에 타이베이로 돌아와서 국가안보국장으로 승진함


1987년 2월 28일, 정오에 본토 중국 어선이 진먼섬 근처를 지나가다가 다단섬에서 쏜 포격을 맞고 배에 불이 붙음. 어부들이 흰 천을 흔들며 쏘지 말라고 했지만 대만군은 그걸 개무시하고 전차포를 쏴 어선을 침몰시켜버림. 생존자는 단 1명뿐이었음.


그리고 어선이 전차포 맞고 침몰한 지 일주일 지난 1987년 3월 7일, 진먼섬에서 대만군 최대 흑역사 중 하나인 3월 7일 대학살 사건이 일어나게 됨.


3월 7일 아침, 베트남에서 출발한, 정치적 망명을 희망하는 베트남 난민들을 태운 보트가 홍콩에 입항하려다 거부당하자 진먼섬으로 방향을 돌림. 진먼섬 방위 사령관은 망명 요청을 거부하고 순찰선에게 보트가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딴 데로 견인시키라고 명령함. 하지만 불분명한 이유로 망명 보트 피플에 대한 정보가 전방 해안 방어부대에게 전달되지 않았음.


짙은 바다 안개가 오후가 되면서 꺼져서 오후 16시 37분에 진먼섬 보병 초소에서 베트남 보트를 목격했단 보고가 들어왔고 지역대대 소령 중령 대령들이 병력들 끌고 현장으로 몰려 옴. 대만군 보병 100여명이 M14랑 M16으로 경고사격을 해댐.


사건이 일어난 지점



결국 보트는 남서쪽 모래사장에 좌초됨. 하필 좌초당한 곳이 M40 무반동포랑 M30 박격포 진지 앞이었음. 진지 양쪽에서 십자포화를 보트한테 쐈고 그것도 모자라서 M72 LAW 2발도 보트에 갈김. 로켓탄이 보트 목재를 관통했을 뿐 터지지 않았으나 이후 일어난 일을 감안하면 그때터져서 즉사하는 게 망명자들에겐 편안한 죽음이었을 거임.


비무장 베트남 남성 3명이 배에서 뛰어내려 손 들고 쏘지 말라고 중국어로 애원했지만 3명 다 즉시 총맞고 즉사함.


배를 수색하려고 대만군이 접근했고, 수류탄 2발을 배 안으로 깐 후 들어갔는데 모든 승객이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베트남 민간인들임을 확인함. 승객들은 선박이 고장나서 표류하느라 좌초되었다고 말함. 생존자들과 사망자들은 응급처치 없이 무분별하게 배에서 꺼내져 해변에 놓여짐.


1987年3月7日越南難民船漂流至金門烈嶼東崗遭中華民國守軍屠殺– 台灣回憶探險團

사건이 일어난 해변. 그 당시엔 피묻은 시체 수십구가 나란히 놓여져 있었음.



현장 병력들은 사단 분부와 긴밀한 통신을 주고 받았고, 현장 지휘관들은 생존자들을 제거하라는 사령관의 직접 명령을 받음. 부상자들은 해변에서 생매장당하거나, 군용삽으로 살해됨. 베트남인들이 울면서 빌어도 예외없이 살해당했음. 증거물이었던 보트는 불태우고 즉시 묻어 인멸함. 배 밑창에 숨어있던 최후의 생존자였던 어린 소년도 발견되어 즉결 처형당함. 최소 19구 이상의 시체가 그렇게 인멸됨.


일부 양심있는 의무병들이 처형 명령을 거부하자 다른 부대 병력들이 와서 작업을 마무리함. 당일 밤 늦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토 중국에서 온 어선이 해안으로 접근했으나 그 배 역시 대만군한테 총격을 당하고 선원 4명 전부 사망하고 배는 침몰함.


베트남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현지 가게 주인이 가오슝에 있는 국회의원한테 전화를 걸었으나 진먼섬 방위 사령부가 통화를 차단시킴.


증거인멸하려고 묻힌 시신들이 충분히 깊게 묻히지 않아서 해수와 고온의 영향으로 부패하기 시작했고 들개들이 매립지를 파해서 시신들이 드러나자 대만군은 시체들을 꺼내서 고분에 재매장함. 매장 작업은 대만군 전투/체육 대회에서 우승하고 막 복귀한 우수 인력들이 수행함.


희생당한 혼령들이 떠돈다는 소문이 퍼져서 진먼섬 주민들은 종교 의식을 벌였고 대만군은 해변에 작은 사당도 지었음.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사당



흔적을 필사적으로 지우려던 대만군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학살에 대한 소문은 퍼졌고, 87년 5월, 홍콩의 영국 신문이 난민선이 대만 진먼섬 근처로 향하다 실종되었단 기사를 씀.


냄새를 맡은 대만 정부 고위 관료들이 무슨 일이나고 진먼섬 방위 사령부에 질문했지만 답변은 얻지 못함. 사령부는 인원 및 통신 제한을 강화하고 정보 누출을 막기 위해 해안 방어 대대를 다른 예비 대대로 긴급 교체하고 부대 지정 코드도 바꿈.


입막음용으로 전방 간부들에게 2배 추가 보너스도 수여함.


돈으로 간부들 입은 막을 수 있었지만 징집병들의 입은 막을 수 없었음, 징집 끝나고 사회로 복귀한, 진먼섬에 배치되었었던 예비역들이 여당인 국민당은 안 찾아가고 당시 막 창당된 새로운 야당이던 민주진보당을 찾아가서 3월 7일 있었던 일에 대해 입을 염. 비로소 그날에 대한 정보가 대만에 퍼지기 시작함.


학살 후 10주가 지나서 당시 대만 총통이었던 장징궈가 진먼섬 방위사령부 은폐 행위를 조사함. 장징궈는 국제 앰내스티로부터 읜도주의적 우려를 표명하는 편지를 받음. 대만 국방 장관이 진먼섬이 직접 나가서 민간인 사체를 발굴하는 현장 조사를 실시함.


5월 28일, 헌병대가 대만군 장교 수십여명을 구금해서 군법 회의로 끌고감.


사령관은 조사 과정에서 몰래 침투하던 공산군 몇 명이 총에 맞았을 뿐이라고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밈. 사령관은 시체들을 섬 외딴 곳으로 옮겨서 파묻고 그 외에 시멘트를 붓고 훈련용 벽을 쌓으라 지시해서 향후 조사를 어렵게하는 치밀함을 보임.


공포의 그 벽



여담이지만 학살 사건 핵심 증인이었던 중령과 부사관이 있었는데 그 둘은 증인으로 활동하다가 갑자기 의문의 실종을 당함. 그 두명의 시체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음.


1987년 6월 5일이 되어서야 학살 사건이 대만 신문에 최초 보도됨. 국회 총회에서 이 사건 가지고 질의응답을 했지만 군대변인은 모든 질문에 '군의 명예를 실추시킨다. 경고를 무시하고 접근한 중국 어선을 침몰시킨 것 뿐이다' 라고만 응답함.


다음 날 6월 6일에 모든 대만 내 언론은 대만군의 오리발-보도자료를 인용하라는 정부 지시를 받았음.


저 꼬라지를 본 미국 하원은 6월 17일에 계엄령을 해제, 정당 금지 헤제,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내용의 대만 민주주의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12월에 미국 상원이 같은 결의안을 통과시킴.


하지만 대만군은 좆.까라는 자세로 일관하며 학살 사건을 20년 간 군사기밀로 분류시키고 더 이상 이사건가지고 떠들면 검찰로 넘기겠다고 협박함. 언론 보도들은 검열당했고 국민당 정부는 출판을 금지시킴. 학살 사건을 다룬 주간지를 털어버리려고 했는데 그 주간지 편집장은 항의하기 위해 자기 몸에 불붙이고 죽음


3월 7일 학살 사건은 국민당과 대만군의 지랄때문에 묻히나 싶었지만 2000년에 겨우 풀리긴 함. 그러나 대만 정부는 그 이후로 이 사건을 언급하는 걸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음. 사과나 유감 표명 하나도 안 함. 배상도 안 해줌.


87년 7월에 38년 간의 계엄령을 끝내는 역사적 결정이 내려졌는데 아마 이 사건이 큰 영향을 끼쳤을거임.


관련 장교 45명에 불명예 전역이나 행정적 제재를 받았지만 충분하지도 않았고 결정적이지도 않았음. 사건을 일으킨 진먼섬 여단장은 살인 방조 혐의로 1년 10개월, 대대장은 살인 공범으로 1년 10개월, 직접 죽이고 파묻은 대위들은 연쇄살인 혐의로 1년 8개월을 선고 받았지만 모든 형벌은 집행유예 3년으로 감형 받음. 유죄 판결을 받은 현장 지휘관 중 그 누구도 형을 집행받지 않았음.


장총통이 88년 1월 사망한 후, 지휘관들은 공식적인 형벌을 받지 않고 정상적인 군생활을 함. 군인 연금도 멀쩡하게 받아감. 특히 영관급 이상들은 쭉쭉 승진해서 중장도 되고 국방대학교 교장도 되고 다 잘나감.


특히 진먼섬 사령부 여단장 이새끼가 학살 씹악질 총책임자인데도 불구하고 대만군 총참모부 부참모장까지 승진하고 중화민국 총통 전략보좌관까지 되더니 퇴역 후엔 국민당에 들어가 의원까지 됨. 2016년에 사망했을 때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뤄졌고 최고위급 장성들 총출동해서 국기가 올려진 관에 경례도 해주고 부총통이 장례식 참석해서 표창도 함.


총통 마잉주는 지난 50년의 그의 군경력은 충성, 성실, 인내, 근면 등으로 점철되었다면서 '그의 덕과 행실이 후대의 모범이 될 것'이라고 칭찬함.


https://en.wikipedia.org/wiki/1987_Lieyu_massacre#cite_note-15


번역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2193655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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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킨트 22-01-30 18:49
   
박정희나 전두환이 계속 집권했으면 우리도 다를게 없었을듯
     
토미 22-01-30 19:17
   
이버리지쉐이는.ㅋ
          
행복찾기 22-01-30 19:34
   
저 당시 대만군은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지만,,
전두환은 대한민국 국민을 수백명 이상을 광주에서 학살했죠...
박정희는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 간첩단 사건을 조작해서 무고한 시민을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고요...

전두환, 박정희의 악행을 옹호하는 자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마가 아닐까요?
          
테킨트 22-01-30 20:10
   
두화니 욕하니까 발끈하는
현지처 애미 뒤지고 본토왜구 애비도 뒤진 토왜토미 색기
이번엔 누가 뒤졌니 왜구조빨러색기야
     
이름귀찮아 22-01-30 19:30
   
저때가 얼추 전두환이 대통령 해먹던 시절
zaku 22-01-30 23:57
   
오바마 때 일본 정치권에서 조선반도전쟁 시즌 2 되면 대박이라고

몰려드는 조선인 피난민들에게 사격해야 한다는 둥

아주 지랄났던....

정말 전쟁 났으면 저 비슷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을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