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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11-29 13:52
[기타] (펌) 미얀마와 중국 국민당군의 역사 썰
 글쓴이 : 노닉
조회 :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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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은 1960년대 미얀마에서 훈련받는 국민당군 병사


1950년 초, 중국 국민당군은 중공군에게 한없이 밀려 정부수반은 대만으로 국부천대 하기 직전이였음 

이윽고 10월 14일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이들 본토의 남은 영토는 하이난섬밖에 없는줄 알았음 

하지만 유일하게 마지막으로 남은 영역이 하나더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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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운남에서 저항중이던 리미와 리원환 장군이 이끄는 국민당군 제8군과 제26군이였음 

49년초까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쿤밍을 계속 공격했지만 4개의 야전군을 재편한 인민해방군에 밀려 이들은 서서히 밀려났음

그중 12월말 군단 예하 93사단이 먼저 운남성 국경을 넘어 미얀마 영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바로 미얀마의 국민당군 잔당의 오랜 역사의 시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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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처음 자신들의 가족까지 데리고 2,000명의 인원들로 미얀마 국경을 넘음 처음에는 미얀마에 앉아있을 생각은 없었고 태국과 하이난섬을 통해 대만 본토로 철수할 계획이였음 


하지만 이 패잔병들 앞에는 전갈과 독사가 우글거리는 끝없는 정글에 지역 소수민족 원주민들 전부가 이들을 적대하고 공격했음 
국민당군 패잔병들은 그 원주민들을 하나하나 전멸시키면서 기어코 계속해서 나아갔음 

그렇게 계속 나아가다 미얀마의 한 마을에서 그들과 또다른 국민당군 패잔병 1,600명을 만났는데 이들과 함께 결성해서 탄생한게
 
“중화민국부흥군(中华民国复兴军)”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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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중 가장 많은 병력을 이끌었던 국민당군 8군단 예하 709부대장 리궈후이가 미얀마 몽삿에 지휘부를 설치했음 

위짤은 당시 몽삿 국민당군 제8군 지휘부 건물임 지금은 리궈후이 딸이 박물관으로 관리중이라 캄 
나중에 군붕이들 미얀마 갈일 있으면 함 가보셈 


암튼 이 패잔병들은 대만 본토에 지원요청을 타진했지만 타이베이의 총통부에서 장제스 명의로 온 전문은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라“라는 대답밖에 안왔음

이들 가족을 먹여살리고 병력유지에 대한 조언도 하나도 없었고 결국 본토에 까지 버림받고 거지때로 전락했지만 자신들의 군모를 절대로 벗지 않고 허름한 막사에 걸린 청천백일기도 계속 걸면서 

밤에는 고국을 그리워하며 흐느끼고 고향을 그리는 노래를 부르면서 버텨왔음 


하지만 계속 그런식으로 버틸수 없던 국민당군은 새롭게 생계유지를 할 방법을 탐색하는데 그 중에서 하나가 “아편재배”임 

이들은 현지 소수민족 부락들과 결탁하여 이 양귀비를 생산하고 운반했는데 매일 원주민 추장들과 원로들이 국민당군 본부에서 사령관 리궈후이에게 각종 뇌물과 개인 권총까지 선물받으며 결탁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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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국민당군 잔당이 현지에 설립한 “몽삿반공대학”

패잔병 신세에서 현지에 대학까지 세울정도의 기염을 토했음 
이들은 소수민족인들까지 포함시켜서 병략수가 무려 3만명까지 늘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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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연히 독립한지 2년된 신생국 미얀마는 이를 고깝게 보지 않았음 
당시 미얀마 정부는 국민당군에게 “10일내에 몽삿을 떠나라”라고 통보했지만 

이미 미얀마군은 병력 1만 2천명과 항공기 4대를 동원해서 침공을 개시했음 
하지만 국민당군은 수십년간의 내전과 일제와의 전투로 단련된 짬밥이 어디로 가지 않았는지 미얀마군 항공기 2대를 격추하고 

미얀마군 지휘부까지 기습하여 여단장 한명을 사살하고 한명을 생포함과 동시에 1개여단 전부를 포로로 잡음 

지휘통제가 무너진 미얀마군은 바로 빤스런을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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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패잔병인 중화민국부흥군은 무려 대만 영토의 세 배나 되는 영지를 획득하고 왕처럼 군림함 아무것도 모르던 미얀마 정부나 현지 민족들에게는 하늘에서 수십년간 싸워온 백전노장 전투부대 수만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거나 마찬가지였음

결국 미얀마는 “쌍방포로 석방을 합의하고 당신들의 현지 점거를 허락할테니 조속한 시일내에 떠나주길 희망한다”라는 사실상 항복을 선언함 


앞으로 탄탄대로 일것 같았던 이 중화민국부흥군에게 엄청난 터닝포인트가 갑자기 찾아왔는데 

바로 “미합중국”임 


2편

동남아에 대만 본토 3배의 영토를 넓히고 현지 소수민족을 흡수하며 휘하 병력 3만명 이상으로 불어난 국민당군 잔당들에게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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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 가장 중요한 인물이 리원환인데 국민당군 잔당 제3군을 이끌었던 장군임 

51년 당시 26살 나이에 휘하병사 5백명을 이끌고 미얀마에서 마차 무리를 끌면서 아편, 차를 사고파는 갱단짓을 하다가 국민당군 잔당무리에 합류했음 

나중에 가서 중화민국부흥군의 후신인 “운남반공구국군”의 오야붕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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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이때 당시 국민당군 잔당이 미얀마군을 한창 도륙하고 있던 50년대 초 

그때 동남아는 인도차이나부터 말라야까지 공산주의 물결이 불고 있었음 더군다나 한국전쟁으로 중공과 교전까지 하고 있었음


이를 매우 위협적으로 본 미국의 눈에 띄는게 바로 미얀마에 죽치고 있던 국민당군 잔당이였음 

같은 동맹국 대만, 자유중국의 군대가 동남아 전선 후방과 중공 국경 사이에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후방을 교란시키는 모습에 우리의 만력제이신 트루먼은 바로 무발기 사정을 조짐 

동시에 합참에 바로 이 국민당군 잔당들을 지원하는 안건을 통과 시키고 CIA가 여기에 개입함 

곧바로 CIA 요원 수백명이 미얀마 국경으로 침투하여 이 중화민국 부흥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는데 그 방법이 아주 거시기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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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국민당군 잔당의 주 수입원인 마약을 이용했는데 당시 CIA가 국민당군이 생산한 각종 마약들을 동남아 각지로 후송히키기 시작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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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국적으로 둔갑한 CIA 소속 항공사 에어 아메리카 항공기까지 동원하여 국민당군 마약을 방콕, 치앙마이, 양곤을 넘어서 

당시 태국 정치판 실세였던 시야논다 경찰서장의 묵인하에 인도네시아, 말레이 심지어 미국 본토까지 퍼져나가며 

결국 1950년 미얀마 북부 연간 아편 생산량이 30톤에 불과했지만 1950년대 중반 국민당 잔당이 몸집이 커진이후 연간 최대 600톤 가까이 생산을 했음 


이 국민당군 잔당이 생산하고 CIA가 후송한 마약들이 온 아시아와 미국까지 헤집어 놓으면서 그 유명한 “골든 트라이엥글”의 역사가 여기서 시작됨


진짜 냉전 미국은 레전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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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미얀마와 중공을 끼고 있는 국민당군간의 밀월관계를 우려해서 이 사안이 결국 유엔 안보리까지 가게 됨

결국 유엔에서 각국이 대만 규탄안을 발의하자 대만-미국-미얀마-태국 4개국이 공동으로 3차에 걸친 미얀마의 국민당군 잔당 철수 작전을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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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은 철수하는 국민당군 잔당들 

일단 50년대 중반 잔당 6천여명이 귀국을 시작하고 총사령관 리미 장군까지 철수하면서 운남반공구국군의 해체를 선언함 

하지만 이에 반발한 류위안린 장군이 남은 잔당을 규합해 미얀마 국민당군을 제1,2,3,4,5군 체제로 재편했음 

거기다가 장제스가 미국 몰래 귀국한 7백명 정도를 다시 미얀마로 원복시키고 설상가상 당시 중공에서 대약진 운동이라는 지옥을 피해 미얀마로 넘어온 중국인들까지 합류시키며 그 전보다 세가 더 커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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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은 3차에 걸친 철수작전에도 이악물고 남은 1960년대 미얀마 국민당군 서부군(西部军) 제 1군 소속 병력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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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 잔당들한테 몰래 물자 제공하던 대만공군 PBY 까탈리나 한대가 미얀마군한테 격추당함 

존나 극대노한 케네디 대통령은 당장 장제스한테 잔당들 철수 시키라고 윽박을 지르면서 압박하고 

결국 미얀마에 진을 친 국민당군 잔당 3,300명 병력에게 공식적으로 관계단절을 선언하면서 선을 긋게됨 

하지만 어림도 없지 대만은 미국 몰래 또 대만 국방부정보부는 철수 준비중이던 리원환 장군을 잔당 지도자로 임명하면서 

미국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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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폐화 23-11-29 17:19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하였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같은 해 10월 14일에는 광저우를 접수하고, 11월 30일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충칭(重慶)마저 함락시켰다. 12월 10일 장제스는 대륙 최후 거점인 청두(成都)에서 타이완(臺灣, 대만)으로 탈출했고, 12월 27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청두에 입성함으로써 대륙에서 국민당을 완전히 몰아냈다.

즉 국민당군은 1949년 12월 27일까지 본토에서 전원 철수했고 나머지 잔여병력은 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1950년 10월 19일 한반도에 처음 침입한 이래,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총 병력 약 240만 명 이상 투입되었다. 이 가운데 전투 중 사상자는 전사자 18~20만 명을 포함해 약 36~40만 명,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인한 사상자를 의미하는 비(非)전투 사상자 38~ 4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또한 중공군도 한반도에 곧바로 군대를 투입했기 때문에 대만과 그 주변잔당에게는 신경쓸 여력도 없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