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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4-12 16:05
플레이트 아머(판갑)에 대한 궁시 실험[Historiae님 블로그펌]
 글쓴이 : 무세띠
조회 : 924  


양덕들이 판갑을 향해 100파운드급 장궁에 아머피어싱 화살을 걸고 실험을 하는 모습이다.
해당 판갑은 무려 열처리도 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고, 100파운드급 장궁은 절대 무시할만한 힘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국궁은 약 60파운드) 제대로 관통시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중에 안으로 들어가는 화살은 관통보다는 지속적인 충격으로 말려들어갔다고 하는것이 옳을것이다.

영국의 "채널 4"의 다큐멘터리 "영국을 만들어낸 무기들"(Weapons that made Britain) 시리즈에서도 그러한 면이 나오는데 사실상 판갑 바로 앞에서 장궁으로 직사를 갈겼는데도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장 궁이 세간에 크게 알려진 계기가 바로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에서 바보같은 프랑스 기사들을 학살했다는 내용인데, 사실 아쟁쿠르에선 대부분의 프랑스 기사들이 불완전한 코트 오브 플레이트 류의 약간의 판갑을 덧덴 체인메일을 걸치고 있었고 그나마도 기사들 보다는 군마들에게 피해를 입혀 낙마시킴으로서 전투력을 상실케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사 실 체인메일(사슬갑옷)만 하더라도 화살에 대한 충분한 방어력이 있었다. 1108년 두아조(Duazzo)전투 때에도 비잔티움 궁병들은 중무장한 프랑크 기사들의 갑옷을 관통하지 못해 말을 노렸다고 하며, 십자군 전쟁당시 살라딘의 서기 Baha 'al-Din의 기록도 그것을 뒷 받침한다. 그는 기록에서 "프랑크인들의 갑옷은 두터웠고, 사슬갑옷 또한 억세기 그지 없어 우리의 화살로는 그들을 죽일수가 없었다. 몇ㅤㅂㅕㅊ 병사들은 등에 화살 10개가 꽃혔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대열을 유지했다.."라고 적고 있다.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프랑스 기사대는 잉글랜드군의 화살을 보란듯이 튕겨내며 전진했다.
이런 기록은 우리나라에도 있는데, 편전을 걸고 사슬갑옷에 몇발의 화살을 쐈으나 관통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사 슬갑옷도 이러할진데 중세 후기에 나오는 플레이트 아머는 화살로서 관통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이들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성궁또한 윈들레스 같은 복잡한 기계식 장치를 이용하는 석궁을 제외하곤 이런 판갑에 대한 제대로된 관통을 바라기 힘들었다고 한다.
Vernile 전투 당시에는 이러한 플레이트 아머를 걸친 이탈리아 기사들이 장궁병들의 화살세례를 뚫고 상대를 개박살 낸적이 있었다. 이후 화승총이 등장하고 총기의 시대가 오지만 이런 플레이트 아머는 퀴레시어(Cuirassier)같은 장갑 총기병들에 의해 무려 18세기까지 그 맥을 유지했다.

한국사람들은 활의 민족이다 보니 활에 대해 맹신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활이 전투에서 하는 역할은 동서고금을 비롯해 적의 전열을 흐뜨러 뜨리는 용도였지 활만으로 전투 자체를 종결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웃통까낸 야만인들 상대로 궁병들이 하루 반나절을 쐈는데도 정작 활에 의한 사망자는 별로 없었다 - 라는 소리가 있을만큼 활의 관통력과 충격력은 약한 편이었고, 갑옷을 입은 상대에겐 더 했다. ㅤㄸㅒㅤ문에 활로 유명한 몽골기병도 항시 전력의 5분의 2는 근접전을 담당할 중기병이었고 세조이후로 무과가 철처히 궁시 위주로 이루어진것 또한 임진왜란의 패전 원인이되기도 했으며, 궁극적으로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던 초기의 화승총들이 활을 대체할수 있었던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출처:

Historiae ::[http://historiae.egloos.com/175054]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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