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타워님.. 태국이 조선한테 조공사절을 보낸적도 있어요.. 왜구때문에 끊겼지만.. 그 시절에 이미 조선이 자기들보다 크고 발달한 나라라는걸 인정하고 인지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태국이 역사적으로 무슨 저동네 킹왕짱인줄 아시는데 제가 아는것만 미얀마에게 쳐발려서 거의 멸망했다가 살아난 역사도 있음.
그리고 캄보디아가 원래 저동네 킹왕짱이었어요. 태국은 그냥 근대 거치면서 지들 나름 식민지 안된거... 그리고 일본 하청해서 그나마 잘나간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는거 같은데 솔직히 제 눈에는 별로 대단해 보이지가 않아요.
이건 약간 한국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현태국왕말고 얼마전 서거한 태국왕은 오랫동안 훌륭한 인품을 유지하며 모든 태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존경을 받은분이셨습니다. 현제 왕을 조롱해도 왕실모독죄가 적용되서 처벌받긴 하겠지만 아마 형벌의 수위를 엄청 낮춰서 선고할겁니다. 저 엄청난 형벌은 저 국왕이였기때문에 받은거라 할수있죠.
태국이 영상편집에서는 나름 강국입니다. 동남아 광고시장에서 압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영화나 CF의 후반작업을 태국에서 한다고 하니까 그만큼
일자리도 많고 능력자도 많은게 당연하겠죠. 수준도 우리나라 못지 않다고 하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낫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태국도 징병제라서 밀리터리 쪽에 관심과 지식이 있는 사람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할 겁니다. 병력 수요보다 징집대상이 많아서 제비 뽑기하는 장면,
여기에 트랜스젠더 아가씨(?)가 추첨하러 오는 장면 같은게 우리나라 언론에
가끔 소개되고 해서 그렇지 나름 밀덕들이 많지 않을까 싶네요.
태국 영상 제작수준이 주변국가들에 비해 좋은 건 사실인데(주변국들이 다 고만고만하니..)
한국 못지 않고 일부는 한국보다 낫다는 건 완전 헛소리에요.
태국 광고시장이 크지도 않고, 자국영화 극장개봉되는거 일년내내 몇 편 될까말까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요. 일자리도 많고 능력자도 많을 시장구조 자체가 되질 못해요.
제 태국 지인들 중에 태국방송계 pd들이 있는데 걔네들이 한국 방송/영상 산업 엄청나게 부러워하면서 한국 방송/영상 항상 보면서 연구하고 한국에 와서 공부하고 싶어합니다.
한국하고 비교자체가 어불성설임. 한국의 영상제작 기술, 특수효과 등의 기술은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임.
와 진짜 댓글 보니 일본 냇 우익 보는거 같아...
태국 국민입장에서 뭐든 이야기 할수 있잖아요 ?
우리나라 무기나 사람좀 깔수도 있지
어찌 보면 넷 우익 보다 더 한거 아님?
저들이 틀린 말을 했다면 소스를 가져와서 틀렸다고 이야기 해야 하며
무조건 까는건 일본 넷 우익들이 하는거랑 다를바 없다고 봄
국뽕 있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지나치면 안될꺼 같아요
야인과 왜인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우리의 신민이니 왕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하여 혹은 무력을 사용기도하고, 내가 즉위한 이후에 남만, 북적,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아니다. 흑룡강, 속평강, 건주위, 올량합, 이만주 동창등 심처 야인과 삼위 달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입조하기를 청하거든, 그 종인을 줄여서 후대하여 올려보내라
잉글랜드 100, 조선 134, 중국(강소성, 절강성) 191.
중국전체의 평균 총요소생산성은 191 이하일 것이나 이 역시 잉글랜드보다 高.
◇ 1인당 GDP 비교(조선 vs. 중국)
1820년 1인당 GDP - 중국: 600달러, 조선: 600달러
┃중국의 1인당 GDP 추이
- 인구의 비약적 증가로 인해 1500년부터 320년간 600달러 수준.
- 1870년 530달러로 추락.
- 1920~30년대 550달러대에서 등락을 반복.
┃조선의 1인당 GDP 추이
- 1870년 604달러로 반등
- 1911년 777달러(아시아 2위)
- 1917년 1,021달러
- 1939년 1,459달러
조선의 생활수준은 16세기말부터 상승하여 18세기 영·정조시대(1724~1800)에 정점을 기록한 후 하락.
- 16~17세기에는 중국보다 낮을 수 있으나 18세기 중국을 추월.
- 19세기(1820년)에는 다시 중국과 비슷한 수준.
◇ 조선의 교육복지
┃세종치세(재위 1418~50) 이후 18세기까지 지방향교, 사학(四學), 성균관 등 모든 유생들에게 무상교육, 무상숙식, 학비지급, 학전(學田)지급, 면세 및 요역면제.
-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논어」의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원칙에 따른 것.
명, 왜엔 없는 조선 선비의 공론정치
같은 유교문화권이지만 성리학의 영향, 특히 공론(公論)의 강도는 조선·명·에도막부가 달랐다. 에도막부에선 5~6명의 로주(대신)가 비밀 회합으로 대소사를 결정했다. 공론은 없었다. 황제의 권한이 강했던 중국에선 공론이 사실상 허락되지 않았다. 조선만 공론을 지켜냈다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를 ○○○○가 만들었다.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지금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이두로 이 글을 다시 풀어보니 놀랍게도 이것은 고구려가 남침한 369년 당시 백제 땅이던 하동에서 후왕으로 있던 장수 집안이 동경까지 망명온 뒤 이곳에서 다시 백제 후왕으로 책봉된 내용을 담은 집안 이야기 였던 것이다.
이두로 풀이한 칼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기 471년에 “고” 확고는 조상이름을 적어 둔다. “오호 비꼬”어르신, 그 아들 “다가리 쪽니”어르신, 그 아들 “고리 확고”, 그 아들 “다사기 확고”. 그 아들 “바라 고비”, 그 아들 “가사 비리”, 그리고 그 아들은 “고 확고”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장수로서 대대로 섬긴바 그 임금님은 사기궁에 마실을 차리고 천하를 다스리시는 크신 확가 개로 대왕이시니라. 온 번 불리고 달구어 만든 이 칼에 우리 집안 내력과 뿌리를 적어두는 바이다
...................
이렇듯이 이나리야마 쇠칼의 글은 5세기 가운데 즈음에 옛 일본의 관동, 관서, 규슈 등 세 곳에 백제가 다무로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왜 왕실은 백제 왕실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인 것이다
근자에 사신이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횡사(黌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군졸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 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3년의 내용)-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
-도화견문지(1080년경에 송나라의 곽약허가 지은 책)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702~762)의 고려무(호선무) 시
金花折風帽 白馬少遲廻 翩翩舞廣袖 似鳥海東來
(금화 절풍모를 쓰고 백마로 천천히 도네. 넓은 소매를 펄럭이며 춤추는 모습이 해동에서 새가 온 듯하네.)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1960년도 1인당 GDP는 한국 155불, 일본 470불, 중국 인도 50불, 태국 100불, 필리핀 240불, 스페인 350불. 영국 프랑스 1300불, 미국 2900불 정도였습니다. (2010년 달러가치로 환산하면, 1960년 한국 1인당 GDP는 2천불에 해당.)
1960년 ~ 2010년 50년 사이에 한국, 일본, 스페인, 싱가포르의 1인당 GDP가 약 100배 정도 증가했고, 중국은 일부 사람들이 좋아하는 PPP로 따지면 GDP가 미국을 넘었지만,
중국, 일본, 스페인은 "세계서 가장 못 살던 우리나라가 누구 덕에 발전했다"고 홍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국의 역사와 역량을 싸그리 무시하는 최대의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한국은 "아프리카보다 못 사는 세계최빈국이던 우리나라가 누구 덕분에 잘 살게 됐다"는
2004년 한나라당 진영이 재집권을 위해 조중동,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퍼트린 프로파간다를
정부가 세금 들여가며 세계인에게 홍보한 결과
개도국 국민들이 중국 일본은 만만히 못 보면서 한국만 만만히 보는 겁니다.
일부 한국인이 "19세기까지 한국보다 훨 못한 나라였다"고 치부하는 그 일본조차
메이지유신 후 30년만에 중국을, 40년만에 러시아를 전쟁에서 이기고, 50여년만에 4위 경제대국으로 UN의 전신인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이 됐다가, 2차 대전으로 망하고 24년만에 2위 경제대국 되고, 90년대 후반에 1인당 GDP가 스위스와 1위를 다툴 정도로 성공한 것을
결코 특정 개인의 공으로 돌리지 않고, 수많은 일본인이 노력한 덕분, 일본민족의 저력으로 해석하고,
세계인에게 "일본은 전통적으로 중국과 대등한 나라였다"고 홍보하니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한국은 중화문명권으로 묶고, 일본은 별도의 일본문명권으로 분류할 정도로
서구인들이 아시아라고 하면 중국 인도 일본부터 떠올리고,
개도국 국민들이 "일본은 수백년전부터 넘4벽 국가. 한국은 수십년전 우리나라보다 못 했던 나라"로 인식합니다.
한국의 홍보는 losing mentality, 일본의 홍보는 winning mentality 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한국이 일본최전성기 수준의 경제력을 갖출 물적 토대를 다 마련하고도, "재벌 먹튀 + 외국인노동자 수입해 인건비따먹기하는 사장 먹튀"를 방치하는 탓에, 최대 잠재력의 반도 못 발휘하고 있는데
그나마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 자폭성 논리로 먹칠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한국이 잘 나가는 현실을 보고 싶은 사람이 가장 신경써야 할 대상은 일본인도, 일빠도, 국까도 아니라 이런 정부와 언론 + 먹튀하는 재벌 + 외국인노동자 수입해가며 인건비따먹기하는 사장들입니다.
T-50 이 훈련기라고 불리지만, 솔직히 그냥 전투기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스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훈련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록히드마틴이나 보잉 등 전투기 판매회사에 경쟁기종이라는 인식을 주지 않고,
또 구입하는 나라 입장에서도 전투기가 아니라 훈련기를 샀다고 하면 주변국가에 경계심을 늦출수 있기 때문입니다.
T-50은 틈새시장 공략을 정말 잘 한 모범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진행될 KFX사업도 무작정 크고 좋은놈으로 뽑아달라고만 할게 아니라
경쟁기종이나 국제수요를 잘 감안을 해서 국제시장에 통할만한 녀석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