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호군 혹은 착호갑사
착호갑사는 이름에서 알겠지만 착호+갑사 2가지 단어가 합쳐진 명사이다.
조선시대에는 갑사 (甲士)라는 군인이 있었는데 갑사들은 의흥위(義興衛) 소속으로 5위의 중심 병력을 이루는 정예부대였다.
원래는 한양에서 (宿衛)를 담당하는 기간병이었지만, 이후 평안도와 함경도의 수비를 담당하는 양계갑사(兩界甲士)와
호랑이를 잡는 (捉虎甲士)가 생겨났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착호갑사라는 부대가 생긴걸까?
조선시대에는 호랑이가 얼마나 흔했는지 쉽게 눈에 띄였다고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호환에 대한 기록만 700건이 넘고 영조대에 이르러서는 호랑이에게 먹혔다는 기록문이 100여건에 이른다.
호환을 당하면 호식총이라는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영조 10년에는 매일 전국에서 호환으로 인한 장계가 올라왔고, 여름부터 가을까지 호환에 당하여 죽인 양민의 숫자가 140명에 이르었다.
11년에는 영동에서만 40명이 죽었으며 심지어 27년에는 경복궁안에 호랑이가 들어와 새끼를 낳기까지 하였다고한다.
영조 이외에도 태종, 선조등이 호환에 시달렸는데
태종은 조선왕조실록에 태종 10권, 5년 ( 1405 을유년 / 명 영락 3년) 7월 25일 밤 호랑이가 근정전 뜰에 들어왔다.
선조는 더 험한꼴을 보았는데 선조 214권, 40년 (1607 정미년 / 명 만력 35년) 7월 18일 창덕궁에 출몰하는 호랑이를 잡으라 전교하였다.
비망기로 홍경신이 전교하기를
"내가 듣건대, 창덕궁 안에서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쳤는데 그 새끼가 한 두 마리가 아니라고 한다. 발자국을 찾아 잡도록 전교를 내렸지만 초목이 무성한 지금은 군대를 풀어 잡기가 어려우니 발자국을 찾아 잡도록하는 방법이야 어찌 없겠는가.
부지런히 발자국은 찾아내지 않고 허풍만 떨고 용맹하지 못하다는 것을 미루어 알수있다.
짐승도 잡지 못하니 남왜와 북적과 마주치면 풍진만 바라보고는 군대를 도망칠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 없다."
(이렇게 초목이 우거지니 잡기 힘들듯하다.)
조선 건국초에도 경상도에서만 1년동안 수백 명에 달했고, 호환을 대비하기위한 전문 부대인 착호갑사를 세종 3년 당번과 하번으로 각 20명씩 처음 도입하였다.
이후 기록에 따르면 440명에 이르러 88명이서 5교대로 복무하였다고한다.
착호갑사가 되기위해서는 5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1. 180보에서 1개 이상의 화살 맞추기
2. 기사(말타고 활쏘기) 는 2번 이상 맞추기
3. 기창은 1번 이상
4. 달리기
5.양손에 30Kg씩 들고 100보 이상 걷기
일반적으로 지방에서 절도사가 지원자를 우선 선발했다.
지원자가 없으면 힘 좋은 장정을 택하여 강제로 징집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 호랑이 사냥은 지금으로 치면 로또라서 징집을 당한다고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고한다.
하지만 특채도 있었는데 호랑이 2마리 이상을 창과 활로 잡은자에 한해서는 특채를 하였다.
착호갑사는 호랑이를 잡을때 보통 2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첫번째는 타위라고해서 소음공해로 호랑이를 조지는 방법이다.
두번쨰는 함정으로 미끼로는 주변에서 개를 구해다가 묶은뒤 쇠뇌나 덫을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