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괴담] 없어
때는 지금으로 부터 5년 전 여름이였습니다.
강원도에서 파농사를 하는 외삼촌이 계신데 여름방학때 등록금도 벌고 좋은 농촌 경험도 해보지 않겠냐면서 한 친구가 절 꼬드겼었죠.
저는 녀석이 그냥 친구가 아니라 절친이였던지라 흔쾌히 가겠다고 했습니다.
막상 가보니 하는 일은 파농사가 아니라 배추농사였는데 대체로 친구는 농약치기 보조였고 제가 농약줄을 잡았습니다.
통에서 농약줄을 빼는 일은 별 어려운 것이 아닌데 100M를 넘게 약을 치고 나서는 돌아올 때는 줄을 일일히 당겨서 수거해야 하니(...)
한 달이 지났을땐 팔 근육만 요상하게 늘어 있더라구요.
농약치기는 그나마 쉬운 편에 속했었고 비료푸대를 여기저기 지고 나르거나 잡초를 뽑는 일,
경작을 위해 갈아엎은 돌 골라내는 일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잡초는 며칠만 지나면 정말 밀림처럼 솟아올라서 나중에는 제 키만해지더라구요.
그냥 뽑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움켜쥐고 있는 소중한 흙도 탈탈 털어내야 했습니다.
(강원도의 논밭은 대 지주가 농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빌려주는 식이였는데 들어오는 수입이 건물주 부럽지 않는다고도 하더군요.)
어쨌거나 여기 강원도에서 친구와 일하면서 강도 높은 힘든 일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그래도 축복의 비가 자주 내려서 나름 많이 쉬었던 것 같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 정말 행복했습니다.
저와 친구는 외삼촌이 마련해준 방 한칸에서 같이 지냈는데 원래는 애기들 방인데 임시로 비워준 거였다고 하셨습니다.
장마가 길어져서 눈치가 보였지만 사람은 적응의 생물이다보니 그런 평화로운 나날에 또 금방 적응했습니다.
워낙에 강원도에서는 따로 즐길거리가 없다보니 나가서 놀기보다는 그냥 시원한 방에서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려는 듯
미친듯이 잠만 잤던 것 같습니다.
...그날은 좀 느낌이 이상했지만요.
줄창 내리는 비에 날씨가 꽤 선선해졌고 습도도 그리 높지 않았기에 좀 추웠던 것 같았습니다.
전 선잠을 자다 반쯤 깨어났는데 너무 잠만 자서인지 머리가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도로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친구가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평상시에도 저와 친구 둘 다 tv를 전혀 보지 않다보니 어지간해서는 방에 있는 tv를 켜는 일이 없었는데.... 라는 생각도 했지만
뭐, 심심하니 tv를 볼 수도 있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속으로 빠져들려고 하는데 친구가 계속 이렇게 중얼중얼 거리는 겁니다.
[없어, 없어, 없어, 없어, 없어, 없어, 없어, 없어, 없어...]
전 녀석이 볼만한 채널이 없나 싶어서 그냥 무시할려고 했는데
그 미친놈이 계속 뭐가 없다면서 중얼중얼 거리는 것이였습니다.
그래도 적당히 말하다가 그만두겠지... 했는데
녀석은 장장 30분을 [없다]고 중얼거렸습니다.
결국 잠을 자려다 빡친 저는 그대로 확 일어나 친구에게서 리모컨을 빼앗았습니다.
잠이라는게 들려고 하다가도 누가 자꾸 방해를 하면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닌데
그걸 장장 30분을 넘게 참았으니 저도 상당히 열받은 상황이였습니다.
저는 TV를 꺼버리고는 [뭐가? 뭐가 없어? 뭐가 없어?
무슨 채널이 없다고 자꾸 없어, 없어, 없어 계~속 중얼거리고 난리야?]
친구는 엄청 당황해 하더니 자긴 그런적 없다면서 발뺌을 하는 것이였습니다.
해명하기를 자기는 닌텐도 게임을 하다가 질려서 TV를 튼 것은 맞는데
혹시 내가 깰까봐 조용히 하고 TV를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어난 제가 자기한테 막 화를 내고 있으니 억울하다는 것이였죠.
그러나 저는 정황을 그대로 납득 할 만큼 이성적이지 못했고 정말 멱살 잡고 싸움이라도 할 생각이였습니다.
그런데 자긴 진짜 아니라고 말하는 친구의 목소리, 입모양을 지켜보는 가운데 갑자기 누가 제 귀에 대고 분명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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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어.]
* 실화입니다.
친구에겐 사과를 했는데 녀석이 더 겁에 질려서 그 날 저녁 잘 때 달라붙더군요.
출처: 루리웹괴담게시판 - 리린냥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