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이었다. 잠이 오질 않아 거실에 나가 TV를 켜보니 케이블에서 ‘분신사바’라는 공포 영화를 방송하고 있었다. 영화는 그닥 재미있지 않았지만 고등학교때의 기억이 생각났다.
한참 더운 여름 밤 우리는 야간자율 학습을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의 야자 시간은 정말 지루했다. 수능은 아직 먼 나라 이야기 같았고 선풍기에서는 나오는 뜨거운 바람은 짜증만 일으켰다. 교실 안의 애들 모두 지쳐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분신사바를 하자는 얘기를 꺼냈다. 학교에서 한참 유행하던 놀이였지만 나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친구들은 나보고 해보라고 했었다. 분신사바를 하는 방법은 별거 없었다. 연습장을 한 장 찢어 자음과 모음을 위아래로 적은 뒤 좌우에는 숫자를 적는다. 그리고 가운데에 선을 그어 양쪽에 O와 X를 써놓고 2명의 아이가 펜을 잡은 채 중앙에서 힘을 뺀 채 원을 계속 그리면서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걸로 귀신이 나타날거 같지는 않았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오이데 쿠다사이. 분신사바. 분신사바. 오이데 쿠다사이...”
몇 번을 주문을 외운 뒤 우리들의 질문을 받아줄 귀신이 왔는지 물어본다.
“지금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가운데의 선에 멈춰있는 연필은 질문을 받자 O를 향해 천천히 이동했다. 구경하던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 커졌고 어떤 애들은 쇼하네란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았다. 나도 솔직히 믿기지 않는 일이 였지만 지금 순간 내가 잡고 있는 연필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움직이고 있었다.
“야 야 뭘 물어보지?”
막상 불러냈지만 질문할 거리가 없었다. 문득 난처해지는 순간 한 아이가 질문을 던졌다.
“제 생일이 언제입니까?”
조금 어이없는 질문이었지만 곧 연필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은 곧지 못한 선을 그으며 숫자를 몇 번 이동하였다.
2...1..7....
그리고 펜은 중앙으로 돌아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질문을 던진 아이를 보니 얼굴에서 핏기가 가셔있었다.
“어..어떡해.. 정말 맞췄어.”
그제서야 믿지 않던 아이들도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다시 질문이 던져졌다.
“저기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잘될 수 있을까..요?”
또 연필이 돌기 시작했다. 연필은 O쪽으로 이동해서 그 안에서 또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질문을 한 아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친구인 듯 한 애들이 핀잔을 준다. 그제서야 조금 무서운 기분이 사그러 들었다. 얼굴을 들어 내 손을 마주잡은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약간 굳어있는듯 한 얼굴이었지만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살짝 미소를 짓는다. 그래 이건 놀이지...
그 뒤로 질문이 몇 개 더 이어졌다. 그 중에는 분신사바를 시험 해보는 것 같은 질문도 있었지만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연애점이라던가 하는 내용도 적절한 대답이 나왔다. 그렇게 한참 재미를 보다가 쉬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얘기에 나는 마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귀신님 이제 끝내도 될까요?”
허락을 맡지 않고 그냥 끝내버리면 귀신이 분신사바를 한 사람에게 붙어버린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연필은 내 질문에 가운데를 빙빙 돌더니 X로 이동하였다. 아이들은 그냥 끝내라고 하였지만 나는 그 이야기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다시 얼굴을 들어 같이 분신사바를 하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역시나 굳은 얼굴로 연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은 뒤 다시 질문하였다.
“귀신님 이제 끝내도 될까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연필은 여전히 X에서 돌고 있었다. 아이들은 슬슬 짜증난다는 듯 나에게 손을 때라고 말했고 그 순간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종이 울렸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연필에서 손을 때려 했다. 그런데 나와 같이 손을 붙잡고 있는 아이가 놓아주지를 않았다. 여전히 얼굴이 굳어있었다. 귀신이 붙는 것을 무서워 하는 것 같았다.
“괜찮으니까 손 놔.”
의자에서 일어났지만 손은 계속 연필에 붙잡혀 있었다. 슬슬 짜증이 일기 시작했고 나는 손을 확 잡아당겨 겨우 연필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노려보다가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상한 아이였다. 그 이후 학교에 분신사바를 하는 아이들은 더 늘었지만 나같이 잘 맞히는 경우는 있지 않았다. 물론 나는 그 이후에는 한 번도 분신사바놀이를 하지 않았다. 왠지 그렇게 잘 맞춘다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애... 누구였지..”
생각해보니 그 때 같이 분신사바를 했던 아이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그 애 이름이... 이름표에는 이사현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 같긴 했는데...
이것저것 떠올려 보던 중 전화가 와서 받았다. 고등학교 동창의 전화였다.
“미현아 이번 일요일에 동창회 있는데 나올꺼지?”
“그래? 몇 시에 어디인데?”
“3시에 종각역 2번 출구. 잊으면 안된다?”
“응. 아참 소정아 물어볼게 있는데.”
“응? 뭐?”
“옛날에 나 분신사바 했을 때 있잖아.”
“아 그때? 신기했지. 너가 했을 때 같이 잘 맞추던 적도 없잖아”
“그때 나하고 같이 하던 애 누군지 알아?”
“응? 글쎄? 누구였지?”
“아마 이름이 이..사현? 응 그렇게 기억하는데.”
“뭐? 그럴 리가. 주현이 언니 이름 아냐?”
“응? 주현이 언니?”
“어. 그때 우리 고1때 주현이 언니 죽었다고 주현이 집에 문상도 갔었잖아. 기억 안나?”
아아.. 그랬었다. 분명 그 때.... 순간 몸이 경직되며 서늘한 기운이 등에서 허리까지 흩고 지나갔다. 이제야 생각이 났다. 그때 그 얼굴.. 나를 노려보던 그 얼굴.. 분명 주현이 언니의 문상을 갔을 때 봤던 장례 사진 속의 주현이 언니의 그 얼굴이었다.
그러면 난 그 때 죽은 사람과 귀신 부르기 놀이를 했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