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중에 사람이죽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무거운 돌로 짓눌러 다리 뼈를 부수는 고문도 종종 이루어졌다.
1608년.
온양의 8, 9개 마을에서
10여명의 사람들이 난데 없이 군인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잡혀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잡혀온 이유가
곧 반란을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잡혀온 사람들은 반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평범한 주민들이었으므로 크게 당황하게 된다.
사연인즉슨,
당시 온양의 군수였던 이질수(李質粹)가
우연히 활을 제조하는 기술자로부터
항간에 떠도는 헛소문을 들은 것이 발단이었다.
온양에서 반란을 도모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은
막연하게 넘겨 짚는 생각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질수는 반란을 하는 무리들을 체포하면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도취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질수는 정확히 사실을 파악하기도 전에
충청도 감사 이용순(李用淳)에게,
자신이 반란을 꾸미고 있는 무리들을 잡을 것이라고 보고해 버린다.
상부에 보고를 하고
대충 짚히는 사람 10여명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지만,
이질수는 그제서야
자신이 허무맹랑한 뜬소문을 잘못 넘겨 짚고 일을 벌인 것임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미 "반란을 꾸미는 무리들이 있다"는
엄청난 보고를 올린 마당에
자신이 헛소리 한 것이라고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반란이라는 엄청난 사건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가 부주의하게 잘못된 사실을 퍼뜨리고
무고한 사람을 체포한 일이 되어 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승진하는데 큰 얼룩으로 남을 일일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처벌을 받을 가능성도 컸다.
이질수는 결국 어떻게든 체포된 사람들이
정말로 반역을 꾸민 범죄자로 꾸며야 했다.
이질수는 붙잡은 사람들이 진짜 범인이기를 간곡하게 바랬기에
스스로 자신이 체포한 사람들이 반역자임에 틀림없다고
자꾸만 스스로 되뇌이면서 믿었던 듯 하다.
그러나, 잡혀 있는 사람들로서도 없는 사실을 실토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반란을 꾸민 죄는 처벌이 사형 밖에 없으며
그 처형 방식도 매우 잔인했기 때문에
보통의 고문 방법으로는 범죄에 대한 인정을 하기 어려웠다.
이때문에 이질수는 새로운 고문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이질수는 잡혀온 사람들을 감옥에서 꺼낸 뒤
철로 되어있는 기묘한 크기의 솥 앞에 앉혀 놓았다.
그리고 그 솥에 불을 지펴 벌겋게 솥을 달구면서,
잡힌 사람들에게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달군 솥을 머리통에 뒤집어 씌우겠다고 한 것이다.
죄가 없는 사람들이 만족할만한 답을 하지는 않았고,
이질수는 달군 솥을 머리에 씌워 버렸다.
사람은 고통스럽게 죽어나갔다.
이런 방법으로 이질수는 사람들을 차례로 죽여나갔다.
이질수는 반쯤 미쳐서 고문을 계속 진행해나갔다.
그런데, 고문을 진행하던 도중
맑은 대낮에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면서 비가 쏟아졌고,
불이 꺼지고 솥이 빗물에 식게 되어
고문을 계속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제서야 이질수는 크게 겁을 먹고 허겁지겁 고문을 중단했다.
상황이 무시무시하게 돌아가자,
이질수는 당황한다.
당시 이질수는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신분을 위조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닥치는대로 마을들을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이질수는 신분을 위조한 사람들을 쫓아다니다가
조사하게 되는 민가의 주민들을 심하게 괴롭혔고,
나중에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는지,
이질수 스스로 애꿎은 민가의 재물을
범죄와 연루된 것이라고 몰아 붙이며 약탈하며 다니게 된다.
결국 나중에는 온양 인근 사람들이 짐을 싸서 피난을 떠날 준비를 하기에 이른다.
이질수가 가두어 두고 고문했던 사람들 중에 살아 남았던 사람들은,
이 사건을 서울 조정에서 직접 관할하게 되면서
대부분 죄가 없는 것으로 풀려나게 된다.
이후 조정에서는 온양 일대의 민심이 흉흉해진것을 바로 잡기 위해
특별히 승지를 파견하여 상황을 추스리게 하였다.
한편 모든 사건의 중심이었던 이질수는
1609년 1월 3일 지평이었던 한찬남(韓纘男)의 건의로,
파직되어 자리에서 쫓겨 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