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기둥과 콘크리트판의 연결부위를 보강하는 지판에도 문제가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지판의 강도가 충분하지 못했던것이죠.
결국 기둥은 지판을 뚫고 콘크리트 바닥으로 서서히 튀어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총체적인 부실공사로 오랜시간동안 건물에 무리가 간 점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인은 또 있습니다. 엄청난 결정타를 한방 먹인 요인이죠.
삼풍백화점 천장에 올린 냉방기.....앞서도 나왔습니다만...
여름에는 이 냉방기를 틀어서 건물 내부를 냉각 합니다.
하지만 인근 아파트에서 이 냉방기로 인한 소음때문에 엄청난 민원이 제기되었고 결국 붕괴 2년전 냉방기의 방향을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니까...냉방장치를 굴림대에 싣고 이동하는 마지막 희대의 미친짓을 저지릅니다.
이게 왜 문제냐면 굴림대로 이동하면서 바닥에는 엄청난양이 충격이 가해지고 지붕 전체에 균열이 생깁니다.
균열이 발생한 콘크리트판은 하중을 기둥에 효과적으로 분산시키는것이 불가능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균열로 인해 바닥이 쳐지고 기둥이 바닥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95년 6월 29일, 결국 건물은 붕괴됩니다.
자, 그렇다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의 처음으로 돌아가 참사의 요인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맨 처음 삼풍백화점의 건물은 건설전의 계획상으로는 사무용 건물이었습니다.
4층 건물이었으며 건물 내부의 벽이 하중을 어느정도 버티고있는 그러한 구조로 되어있는 건물이었죠.
하지만 삼풍백화점의 주인은 이 건물의 용도를 백화점으로 바꾸었고 건설회사는 그것을 거절합니다.
결국 백화점의 주인은 건설회사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삼풍그룹의 계열의 건설회사에 건축을 맡깁니다.
그들이 맨 처음 한 일은 백화점의 상품을 진열하기 위해 건물내부의 벽을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 설치를 위해 콘크리트바닥 가운데에 구멍을 뚫었습니다.
게다가 공간확장을 이유로 기둥의 굵기를 25%가량 줄이고 에스컬레이터 부근의 기둥은 여기서 1/4를 더 날려버립니다.
이렇게 되면서 "플랫 슬래브 구조"로 지어지는 삼풍백화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둥이 매우 약해지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여기에 추기적으로 기존에 4층이던 건물을 5층으로 증축하며 건물에 하중을 더 추가하고 말았고 여기에 한술 더 떠 맨 꼭대기층인 5층에는 무거운설비가 들어가는 식당을 배치하여 더욱 더 많은 하중이 심각하게 얇아진 기둥에 전달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삼풍백화점측은 옥상에 올려놓은 냉방장치로 인해 인근아파트에서 민원이 들어오자 냉방장치를 기존의 반대방향으로 옮기는 방법을 택했고 비용절감을 이유로 기중기대신 굴림대에 올려 반대쪽으로 옮기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이 과정에서 콘크리트 바닥에 균열이 발생합니다.
한편 콘크리트기둥과 콘크리트바닥 사이를 보강하는 지판의 강도가 너무 약했고 콘크리트 기둥이 지판과 콘크리트바닥을 뚫고 서서히 올라오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닥은 점점 더 아래로 쳐지기 시작하고 기둥을 점점 더 위로 뚫고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1995년 6월 29일, 백화점은 붕괴되고 맙니다.
이 사건으로 501명의 사망자와 93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6명의 실종자가 발생합니다.
어느 사고나 그렇지만 이러한 대형사건에는 더욱 더 초기 구조가 중요한데요. 당시 한국에서는 이런 사태가 날 줄 전혀 몰랐으며 구조작업의 개념도 몰랐기에 구조작업이 매끄럽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고이후 소방서와 경찰, 인근 군부대, 특전사를 비롯해 지역주민과 자원봉사자 해병전우회 심지어 미군에서도 사고현장에 몰렸고 그 와중에 소방본부와 경찰, 서울시,중앙재해대책본부 등이 서로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제대로 된 지휘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소방본부가 지휘를 하는것으로 합의되었으나 이 후에서 기관과 유가족, 자원봉사자 사이에서 불협화음이 속출했습니다.
당시 사고직후 소방차에서 소방수를 뿌렸는데요. 이 소방수의 목적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지하주차장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는데도 있고 매몰자들을 위한 식수의 역할, 그리고 더위로인한 생존자의 탈진을 막기위한 용도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소방수로 인해 몇몇 생존자는 소방수를 먹고 구조되었지만 몇몇은 이 물로 익사를 하는 안타까운 상황도 발생했다고 합니다.
사고 초기에 서울시는 실종자수를 200여명으로 집계하다 후에 400여명으로 집계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게다가 당국에서 팔 2개+다리 2개+머리+몸통=시체 1구로 피해자 인원을 추산하여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백화점이 붕괴되기 전 삼풍그룹의 회장을 비롯한 고위간부들은 백화점이 무너질것이라는것을 미리 알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귀중품을 비롯한 돈이 될만한 재산은 미리 다른곳으로 빼돌리고 서둘러 백화점을 빠져 나왔다고 합니다.
참사발생 5일 후 삼풍그룹의 이준 회장은 MBC와의 취재에서 "무너진다는것은 다시말해서 손님들에게 피해도 가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지는거야!"라고 역정을 내는 행동을 합니다.
다른사람의 목숨과 자신의 재산을 등치시킬정도로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있다는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기자들이 "명색이 최고 책임자인데 할 말 없으세요???" 라고 묻자 "아유~ 그건 사장에게 물어보셔~"라고 회피를 하는등의 행동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행동에 전 국민은 분노했고 심지어 아나운서조차 "제정신이 아닌것같다"라는 분노를 대 놓고 드러낼 정도였습니다.
이준 회장의 발언은 전세계적으로 비난을 받았고 전세계로 생생히 중계되어 나라망신을 톡톡히 시켰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본같으면 회장에게 책임이 없더라고 도의적인 책임을 스스로 물었을것이다"라고 비난했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저딴놈은 죽을때까지 감옥에 쳐박아도 모자란다"고 가루가되도록 비난했다고 합니다.
1996년 8월 23일, 대법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이 확정되었습니다.
이 준 회장에게 징역 7년 6개월형이 확정되었고 삼풍백화점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설계변경을 승인해 준 이충우 전 서초구청장과 황철민에게는 징역10개월과 추징금 300만원,, 삼품백화점 사장 이한상(이 준 회장의 차남)은 징역 7년형이 처해지게 됩니다.
이 준 회장은 2003년 4월 출소했고 그 해 10월4일 지병으로 사망합니다.
삼풍백화점의 사장이었던 이한상은 2002년 10월에 출소합니다. 이 후 "삼풍사고로 상처받으신 분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가 있기를 기도한다. 삼풍사고가 영적인 전쟁의 한 사건이었다고 믿는다. 저와 함께 고난을 받으신 많은 분들의 고난과 헌신이 귀하게 쓰여 하나님 이루시는 일에 진보가 있다면 감사할 뿐"이라는 인터뷰와 함께 몽골에 선교사로 출국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교도소에서 겪은 고난을 신앙으로 극복했다고 포교를 하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이 사건 후 한국정부는 전국의 모든 건물에 대한 안전평가를 실시했고 그 결과는 가히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전체 고층건물의 1/7(14.3%)는 개축이 필요한 상태였다.
-전체 건물의 80%는 크게 수리할 부분이 있다.
-한국 내 전체 건물의 2%만이 안전한 상태였다.
이로인해 당산철교를 비롯한 여러 구조물이 철거되고 다시 튼튼히 지어집니다.
하지만 19년 후인 2014년에
이와 비슷한 사건이 또 일어나면서 우리사회의 고질적인 안전불감증이 증명되었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여러가지 도시괴담을 낳았는데요.
그 중 하나가 삼풍백화점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아크로비스타의 엘리베이터 겉면색이 귀신을 쫒아내기 위해 팥죽색으로 칠해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최근 인천 청라의 한 아파트는 철근은 "절반만" 쓴 채 시공하여 부실공사라는 말이 있는데요.
건물의 강도를 생각하지않고 했다면 정말 이나라의 안전불감증은 어디까지일까 궁금해질 정도입니다.
그리고 20여년의 시간이 지난 현재 또다시
육 해 공에서 사고가 한번씩 터졌습니다.
제발 더 이상의 사고는 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정부패와 비리와 안전불감증으로 수 많은 생명을 앗아갔으면서도 그 사건을 곧 잊어버리고 비슷한 새로운 사건을 뻥 뻥 터뜨리는걸 보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엽기/호러가 아닐까요?
이걸보면 귀신보다 사람이 무서운게 사실인가봅니다.
이 글을 보고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안전에 대한 소중함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