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금나라의 시조 함보가 고려 평주 출신의 중 김준이라면 함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궁예입니다. 궁예가 세운 나라 이름은 처음에 고려였습니다. 그리고 성은 김(金)씨였죠. 궁예의 아버지는 경문왕으로 추정됩니다. 『선생님이 궁금해하는 한국 고대사의 비밀』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경문왕은 김응렴입니다. 궁예는 신라 왕족 출신이었던 것입니다. 궁예는 고려인이기도 하고, 신라인이기도 했던 것이죠. 중국과 고려의 여러 기록에 고려인 출신, 신라인 출신이 뒤섞여 있는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또한 궁예(弓裔)는 우리 이름으로 ‘활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궁(弓)은 ‘활 궁’이고, 예(裔)는 ‘후손 예’입니다. 예(裔)는 ‘옷 의(衣)’와 ‘밝을 경(冏)’으로 이루어진 글이죠. 그러나 ‘밝을 경(冏)’은 ‘상나라 상(商)’의 생략형입니다. 즉 예(裔)는 상나라의 시조에 대한 제사를 모시는 후손들이 입는 예복(禮服)을 뜻합니다. 즉 예(裔)는 옷 복(服)과 뜻이 통합니다. 장보고의 우리 이름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입니다. 즉 장보고의 우리 이름 역시 ‘활보’입니다. 궁(弓)은 뜻을 따고, 복(福) 또는 파(巴)는 소리를 딴 것이죠. 마찬가지로 궁예의 궁(弓)은 뜻을 따고, 예(裔)는 옷이라는 뜻의 복(服)의 소리를 딴 것이죠. 즉 궁예 역시 우리 이름으로 ‘활보’였던 것이죠. ‘활보’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 바로 함보(函普), 합부(哈富), 감포(堪布)였던 것입니다.
또한 궁예는 중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미륵불이라고 칭송받으며 왕이 되었고,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전제 정치를 일삼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궁예가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 918년은 궁예의 나이가 약 60세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문왕의 재위기간은 861년부터 875년까지이므로 궁예의 나이는 918년 당시 60세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것은 『금사』에 기록된 “금나라의 시조는 휘(諱)가 함보(函普)이고, 처음에 고려로부터 왔는데 나이 이미 60여세였다.”라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또한 함보가 여진족으로 떠나기 전 살았던 곳은 고려의 평주(平州)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은 어디였을까요?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따르면 평주는 오늘날의 황해도 평산입니다. 그러나 궁예가 최후를 맞이했다고 추정되는 지역은 오늘날의 강원도 평강입니다. 먼저 『삼국사기』와 『고려사절요』의 기록들을 봅시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미복으로 산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조금 후에 부양(斧壤) 백성에게 살해되었다. _『삼국사기』궁예열전 중에서 발췌.
궁예가 이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미복(微服)으로 북문을 빠져나가서 바위 골짜기로 도망하였다가 조금 후에 부양(斧壤, 평강) 백성에게 살해되었다._『고려사절요』 태조 원년(918)조에서 발췌.
두 기록은 글자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이지 사실상 같은 내용입니다. 즉 궁예가 왕건의 쿠데타 소식을 듣고 당황하여 미복으로 위장하고 궁궐을 빠져나갔다가 부양(斧壤)에서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부양(斧壤)은 현재 강원도 평강(平康)입니다. 사실 『삼국사기』와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 전하는 궁예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너무 간략하고 그 내용 또한 개연성이 없을 정도입니다.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궁예가 당황하여 미복으로 위장하고 궁궐을 빠져나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합니다. 궁예는 반란군을 이끄는 장군으로서 세력을 키워 나라를 세운 인물입니다. 궁예는 역적 혐의로 많은 관료와 신하들, 심지어는 왕후와 아들들까지도 처형할 정도로 반역에 대비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궁예가 왕건의 쿠데타군에 대하여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하는 기록은 거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궁예 세력은 왕건 세력과의 결전에서 패배하였고, 궁궐을 빼앗기고 경기도 포천, 강원도 평강 등지에서 반격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지역에서 구전되고 있는 지명 전설에 따르면 궁예 세력이 보개산성(포천 관인), 운악산성(포천 화현), 명성산성(철원 갈말) 등에서 왕건 세력과 항전을 벌인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는 궁예 세력이 왕건 세력과 10년 이상 항전했다는 전설도 남아 있습니다. 최남선이 쓴 「풍악기유」에는 “구레왕(궁예왕)이 재도(再圖)할 땅을 둘러보는 데”라는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풍악기유」는 최남선이 궁예의 무덤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있는 강원도 평강 삼방협에서 채록한 전설이죠. 이처럼 궁예는 최후까지 재기를 꿈꾼 것으로 보입니다. 궁예는 ‘용잠호장(龍潛虎藏)할 땅이 없겠느냐?’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풍악기유」의 전설 속에서도 궁예는 xx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왕건 세력은 왜 궁예의 최후를 백성들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한 것일까요? 단순히 민심을 잃은 궁예가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실제로 궁예가 백성들에게 살해당했다면 이것은 왕건 세력이 자신들의 집권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도 대대적으로 선전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궁예의 최후는 너무나도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궁예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을 가능성입니다. 궁예가 전설처럼 끝까지 저항하다가 시체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면 이것은 왕건 세력에게는 큰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왕건 세력이 이를 수습하려고 궁예가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기정사실화한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궁예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부양(斧壤)은 현재 강원도 평강(平康)입니다. 평강은 현재 북한 지역으로 궁예가 마지막 저항을 하던 전설이 남아 있는 강원도 철원 명성산성과 인접한 지역이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궁예가 함보이고, 평주(平州) 출신의 중 김준과 동일 인물이라면 궁예가 최후를 맞이한 평강이 바로 평주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시 말해 궁예는 평강에서 사라졌고, 여진족 완안씨의 시조가 되어 재기를 꿈꾼 것으로 보입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금나라의 시조는 고려인이면서 신라인인 함보입니다. 함보는 고려 평주 출신의 중 김준입니다. 즉 함보는 고려인이면서 신라인이고, 고려 평주 출신이면서 불교의 승려이며, 성은 김씨였습니다. 그런데 이 조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바로 궁예입니다. 궁예는 고려를 나라 이름으로 사용한 고려인이었으며, 신라 경문왕의 아들인 신라인이었습니다. 또한 평강(평주로 추정)이라는 지역에서 최후의 모습을 보이고 사라졌으며, 미륵불을 자처한 승려 출신이었고, 성은 김씨였습니다. 게다가 궁예의 우리 이름은 ‘활보’ 즉 ‘함보’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왕건에게 쫓겨난 궁예는 자신의 세력들을 이끌고 여진족이 살던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그 후손이 바로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였던 것입니다.
-<한국사의 비밀 20가지>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