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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9-01 18:51
[초현실] 조선 초기 압록강은 현재의 혼강(渾江)이었다. -긴글 버전-
 글쓴이 : 보리스진
조회 : 3,084  

1.서론
압록강은 위치가 변화하여왔다. 조선시대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지역명을 먼저 살펴봐야한다.
자성, 우예, 여연, 무창이라는 행정구역이다. 사군(四郡) 또는 폐사군(廢四郡)이라고도 부른다.
이 사군은 조선의 평안도 최북단에 위치했었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할 때부터 조선의 영토였고, 태종·세종(1416-1443) 때에 군(郡)이 설치되었다. 세조(1455-1459) 때에 군이 폐지되었으나, 성종(1484년) 때까지 주민 일부가 살고 있었고, 1500년대까지도 조선의 영토였음이 확인된다. 1600-1700년대를 거치면서 사군이 조선의 영토라는 인식은 변함이 없으나, 여진야인이 오래 거주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사군의 정확한 위치를 확실히 알지 못하던 시기였다.


2. 사군(四郡)의 위치
조선후기 기록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겠다.
18-19세기 지도를 보면 조선후기 압록강은 현재의 압록강이 맞다. 지명 기록으로도 현재의 압록강이 맞다. 그런데,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폐사군(廢四郡)의 본말(本末)에 대한 변증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사군은 압록강 너머 북쪽에 있다는 것이다.
<사료1> 『오주연문장전산고』(1788~1856년)
세조(世祖) 원년(을해)에 야인(野人)이 변방을 소란시키므로 그곳 백성들을 내지(內地)로 이주(移住)시키고 드디어 그 땅을 비워버렸다. 그러나 그 땅은 북쪽으로는 압록강 너머에까지 뻗쳤고.......
世祖元年乙亥 以野人擾邊 移其民於內 遂空其地 然而其土 北逾鴨綠

조선중기 당대의 기록에도 사군이 압록강 바깥에 있었다고 나온다. 1523년 기록에 야인이 파저강, 야로강, 사군이 위치한 곳까지 와서 살기 시작했다. 아직 압록강을 건너오지 못했으나, 앞으로 압록강 동쪽으로 들어올지 모른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군은 현재 압록강의 바깥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사료2> 『중종실록』(1523년)
파저강 이동은 되가 사는 곳이 근래에 더욱 심하게 번성하였습니다. 여염이 땅에 가득 차고 농사지을 땅이 좁아서 점점 사군(四郡)에 벌여 살게 되고, 야로강 이남에도 점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위로는 삼수(三水)부터 아래로는 의주(義州)까지가 장차 되가 사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이뿐이 아니라, 우리 나라가 힘으로 금하지 못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살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허실을 갖추 알고 때를 타서 일어나면 아마도 압록강 이동에 또다시 출입하는 형세가 될 것인데.......
婆猪以東虜居之盛, 近尤甚焉。 閭閻撲地, 耕種地窄, 漸至列居四郡。 也虜以南亦漸來居, 上自三水下至義州, 將爲夷虜之居, 不但此也。 我國力不能禁, 隔江相處, 備知虛實。 乘時動發則臣恐鴨綠以東, 又復有出入之勢。

사군은 1500년대까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였다. 1600년대 1700년대가 되면서 위치가 어딘지 정확히 알지 못하게 된다.
<사료3> 『중종실록』(1522년)
김주성합 등이 우리 지경에 다가와 여연(閭延) 성 안에서 거주하며 우리 강토를 경작(耕作)하므로....... 金主成哈等迫近我境, 至居閭延城內, 耕我彊土


3. 압록강의 위치
다음으로 압록강의 위치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자성, 우예, 무창군의 서북쪽에 압록강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1400년대 압록강은 사군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서북쪽에 1400년대 압록강이 있고, 그 가운데에 사군이, 그 동남쪽에 현재 압록강이 위치한다.
<사료4>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자성군(慈城郡)
대천(大川)은 압록강 상류(上流) 【군(郡) 서쪽에 있다. 】
大川, 鴨綠江上流, 【在郡西。】

우예군(虞芮郡)
대천(大川)은 압록강 상류(上流)이다. 【군(郡) 북쪽에 있다. 】
大川, 鴨綠江上流。 【在郡北。】

무창군(茂昌郡)
대천(大川)은 압록강의 상류(上流)이다. 【군(郡) 북쪽에 있다. 】 
大川, 鴨綠江上流。 【在郡北。】 

압록강의 위치 변화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조선초기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조선건국 시기에 이미 여연에 압록강이 있었다. 압록강을 界 또는 限이라고 기록하였으므로, 압록강은 영토 한계선, 국경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가장 서북단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초기에는 압록강이 서북쪽에 있었고, 사군은 그 동남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조 때에 자성, 우예, 여연, 무창 사군이 폐지된다. 주민들은 구성, 이산, 강계, 상토, 만포 등지로 이동된다. 하지만 영토를 줄이면 안된다는 여론이 모아져서, 압록강은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국경선 역할을 하였다. 행정구역만 폐지되었을 뿐, 조선의 영토는 그대로였다. 1484년까지도 주민 일부가 남아 있었고, 단지 땅을 비워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섬주민을 육지로 옮겨 섬을 비워둔 공도정책과 같았다.
<사료5> 『태조실록』(1395년)
의주에서 여연(閭延)에 이르기까지의 연강(沿江) 천 리에 고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두어서 압록강으로 국경을 삼았다. 
自義州至閭延沿江千里, 建邑置守, 以鴨綠江爲界。
<사료6> 『세종실록』(1436년)
압록강(鴨綠江)은 하늘이 만든 경계로서, 여연에서 자성에 이르기까지 적도가 침입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불과 6, 7개소이다. <중략> 
여연·자성·강계·벽동·이산·창성 등 모든 군(郡)은 모두 압록강 변에 책성(柵城)을 설치했다.
鴨綠江, 天作限界, 自閭延至慈城, 寇來之處, 不過六七 <중략> 閭延、慈城、江界、碧潼、理山、昌城諸郡皆設柵城於鴨江之濱
<사료7> 『문종실록』(1450년)
평안도 연변(沿邊)에는 긴요하지 않은 각 구자(口子)가 자못 많습니다. 우예(虞芮)로부터 무창(茂昌)에 이르기까지 각 고을과 구자(口子)가 강변(江邊)으로 옮겨 들어갔기 때문에 토지가 좁고 척박하여 백성들이 힘입어 살 수가 없으며....... <중략>
비록 국토를 넓히지는 못할지라도 조종(祖宗)의 봉강(封疆)을 줄일 수가 있겠습니까? 비록 얼마 안 되는 땅[寸土]일지라도 줄일 수는 없습니다. <중략>
우예(虞芮) 이상의 땅은 지금 비록 혁파하더라도 압록강(鴨綠江)의 큰 강을 경계로 하여 저 사람들 이 이곳에 들어와서 거처하지 못하게 한다면 진실로 땅을 줄이는 예(例)는 아닌 것입니다. 
平安道沿邊, 不緊各口子頗多。 自虞芮至茂昌, 各官各口子, 徙入江邊, 土地褊少塉薄, 民不聊生。<중략> 雖不得闢國, 其可蹙祖宗封疆乎? 雖寸土, 不可蹙也 <중략> 虞芮以上, 今雖革罷, 限以鴨綠大江, 彼人不得入居于此, 固非蹙地之例也。
<사료8> 『단종실록』(1453년)
비록 〈여연ㆍ무창ㆍ우예 등〉 3읍(邑)을 버린다 하더라도 큰 강(江)이 경계를 한(限)하여 띠[帶]처럼 둘러 있으므로, 우리의 봉강(封疆)은 예전과 같습니다.
今平安長城之役雖罷, 閭延、茂昌、虞芮等郡, 隔在江邊, 南道軍士越大嶺而戍守, 人馬俱疲, 盡賣田産, 因而逃散流入遼潘者, 甚多。 雖棄三邑, 大江限帶, 我之封疆如舊。 乞撤三邑之戍, 以慈城爲界, 以休南民, 以固邦本。
<사료9> 『세조실록』(1455년)
여연(閭延)·무창(茂昌)·우예(虞芮) 등의 고을은 강변에 포열해 있는데, 이제 이 세 고을을 혁파하고 자성(慈城) 1군(郡)이 홀로 적의 요충(要衝)을 막고 있습니다.
延、茂昌、虞芮等邑, 列於江邊, 今罷三邑, 慈城一郡, 獨當賊衝
<사료10> 『세조실록』(1459년)
자성(慈城)을 혁파(革罷)하여 그 백성들을 상토(上土)와 만포(滿浦)와 와동(瓦洞)에 옮기고, 이보다 앞서 옮겨가 살던 사람들을 구성진(龜城鎭)에 옮겨 안치(安置)하여.......
請革慈城而移其民於上土、滿浦、瓦洞, 其前此徙居人, 移置龜城鎭
<사료11> 『성종실록』(1484년)
여연(閭延)·무창(茂昌)·자성(慈城) 등의 고을을 폐지하고 그 고을에 살던 백성을 옮겨 살게 하여 채웠었다. 이제 듣건대 앞의 세 고을에 옮겨 온 백성이 거의 다 유이(流移)하였다 하니, 실로 이것은 수령(守令)이 어루만져 어거하는 것이 방도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경(卿)은 친히 그 고을에 가서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몇 호(戶)이고 유이(流移)한 것이 몇 호인지를 상세히 추고하여, 폐단 없이 쇄환(刷還)하도록 하라
革閭延、武昌 、慈城等官, 以其邑所居人民, 徙居以實之。 今聞前項三邑移來之民, 流移殆盡, 實是守令撫御乖方耳。 卿其親往本邑, 備細推考時存者幾戶、流移者幾戶, 無弊刷還。

행정구역상에서 사군은 북쪽에 있고, 만포는 남쪽에 있었다. 사군이 있던 지역이 전방지대가 되고, 만포가 있던 지역이 후방지대가 된다. 원래 압록강은 이 전방지대 바깥에 있었다. 이후에 후방지대로 이동되었다.
1488년까지는 압록강이 전방지대였던 사군지역에 남아있었던 것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1392-1488년의 압록강은 사군이 있던 전방지대 바깥에 존재했다. 사군의 북쪽에는 압록강이 국경한계선으로 존재했었고, 사군의 남쪽에는 만포, 상토가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사료12> 『성종실록』(1485년)
무창(茂昌)·여연(閭延)·우예(虞芮)·자성(慈城)을 혁파(革罷)한 뒤로 이 땅이 야인(野人)의 유렵(遊獵)하는 곳이 되었음을 들었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건대, 네 고을은 모두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하여 위는 삼수(三水)에 접하고 아래는 상토(上土)에 연(連)하여서 그 형세가 서로 의지하여 있고, 그 사이에 거의 4, 5백여 리의 땅이 비옥(肥沃)하여서 사람이 살 만하였습니다. 그리고 압록강은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한계이므로 압록강을 넘어서 경계로 할 수 없거니와 압록강도 못미쳐서 경계로 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수자리 사는 군졸(軍卒)이 험한 곳을 넘어서 왕래하는 것이 불편하다 하여 네 성(城)을 폐기(廢棄)하였습니다.
<중략>
네 성이 압록강을 따라 있는 것은.......
<중략>
여연 등 네 진(鎭)은 강을 따라 설치하고 그 사이에 보책(堡柵)을 세웠으며, 또 압록강의 천참(天塹)의 험함도 있어 다시 세울 만하나, 다만 토병(土兵)의 수가 적어서 남쪽의 군사를 빌어다가 함께 지켜야 합니다.
革罷茂昌、閭延、虞芮、慈城後, 此地爲野人遊獵之所。 臣竊惟四邑皆以鴨綠爲界, 上接三水, 下連上土, 形勢相依, 其間幾四五百餘里, 沃饒可居。 且鴨綠江天設限界, 不可過鴨綠爲境、縮鴨綠爲境。 今以戍卒之越險往來爲不便, 廢棄四城。<중략> 四城之沿鴨綠江, <중략> 閭延等四鎭沿江而置, 間以堡柵, 又有鴨綠天塹之險, 似可復立。 但土兵數少, 借南兵幷戍之。
<사료13> 『성종실록』(1488년)
옛 여연(閭延)·무창(茂昌) 등의 고을은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에 있는데.......
古閭延、茂昌等邑, 在鴨綠上流
<사료14> 『중종실록』(1522년)
신이 만포(滿浦)에 있을 때 여연(閭延)·무창(茂昌)에 와서 거주하는 야인(野人)이 겨우 30여 호였는데 지금은 부락이 점차 번성해진다니, 번성해지면 상토(上土)·만포(滿浦) 등의 진(鎭)에 장차 조석간에 변이 있게 될 것입니다. 
臣在滿浦時, 野人之來居閭延、茂昌者, 僅三十餘戶, 今聞, 部落漸至繁盛。 繁盛則上土滿浦等鎭, 將有朝夕之變。

1516년이 되면 압록강은 후방지대인 만포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1520년대의 기록들을 보아도 압록강이 사군이 있던 전방지대에서 만포가 있는 후방지대로 이동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압록강은 1488년까지도 원래 사군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중종(1516년)때에 이르러서는 압록강도 만포 지역으로 후퇴하게 된다.
<사료15> 『중종실록』(1516년)
“압록강 건너편의 나무를 베는 일은, 변방의 일을 아는 사람도 많이 입시(入侍)하였으니, 하문하여 처리하시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장곤이 아뢰기를, "강계(江界)로부터 삼수(三水)·갑산(甲山)·여연(閭延)·무창(茂昌)에 이르는 곳들은, 세조조 때에 수호(守護)하기 어렵게 되어 각보(各堡)를 내지로 옮겨 설치하였는데, 그 사이에 큰 산과 긴 골짜기가 있어서 초목이 무성하여 우러러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예전에 이극균이 나무를 벨 때에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지금은 마마동(麻麻洞)에서부터 주파리동(朱坡梨洞)·상토(上土)이하까지 강변의 벨 만한 곳과 만포(滿浦) 강변의 의심할 만한 곳은 이미 죄다 베었으므로, 산과 들에 초목이 전혀 없습니다.”
鴨綠江越邊伐木事, 知邊事之人亦多入侍, 宜下問處之。" 長坤曰: "自江界至三水、甲山、閭延、茂昌等處, 世祖朝不能守護, 故移設各堡于內地。 其間有大山長谷, 草木叢茂, 仰不見天。 昔李克均伐木時, 人多見死。 今自麻麻洞、朱坡梨洞、上土以下, 江邊可伐處及滿浦江邊可疑處, 今已盡斫, 故山童野赭矣。
<사료16> 『중종실록』(1523년)
점점 사군(四郡)에 벌여 살게 되고, 야로강 이남에도 점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위로는 삼수(三水)부터 아래로는 의주(義州)까지가 장차 되가 사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이뿐이 아니라, 우리 나라가 힘으로 금하지 못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살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허실을 갖추 알고 때를 타서 일어나면 아마도 압록강 이동에 또다시 출입하는 형세가 될 것인데.......
漸至列居四郡。 也虜以南亦漸來居, 上自三水下至義州, 將爲夷虜之居, 不但此也。 我國力不能禁, 隔江相處, 備知虛實。 乘時動發則臣恐鴨綠以東, 又復有出入之勢。


4. 1392-1488년의 압록강은 현재의 혼강(渾江)
그렇다면 1392-1488년의 압록강은 어디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국조정토록에 여연은 상토에서 서북쪽으로 320리 떨어져있다고 하였다.
상토는 만포 근처에 자리한 지명이었다. 만포는 1450년에 만호가 폐지된 이후 행정구역의 변화는 없다. 1450년 이후부터는 현재의 압록강변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만포에서 여연평까지 320리 떨어져있다고 하였으므로 교차검증이 확인된다.
여연은 평안도 가장 서북단에 위치했던 행정구역으로, 당시 압록강 발원지와 가까웠다.
(만포에서 서북으로 320리, 약 154km 떨어져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여연의 동북쪽에 압록강이 있다고 하였다. 세종 때에 영토가 넓어져 당시 압록강 바깥쪽으로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료17> 『국조정토록』(1614년)
여연은 옛날 읍의 이름이다. 상토의 서북쪽으로 320리정도 떨어져 있다. 세조1년에 읍을 폐지하였다.
閭延 古府名 在上土西北 三百二十里許 世祖元年廢
<사료18> 『중종실록』(1523년)
4일에 만포진(滿浦鎭)을 떠나 1식(息) 20여 리를 가서 사을외평(斜乙外坪)에서 자고 5일에 1식여 리를 가서 응평(鷹坪)에서 자고 6일에 3식쯤 가서 조명간(趙明干)에서 자고 7일에 2식 15리쯤 가서 하무로(下無路)에서 자고 8일에 2식 10여 리를 가서 여연평(閭延坪)에서 잤으므로, 치중(輜重)없이 경기(輕騎)로 종일 들어간 것이 여연까지 5일정(日程)이니.......
初四日滿浦鎭離發, 一息二十餘里斜乙外坪止宿, 初五日一息餘里鷹坪止宿, 初六日三息許趙明干止宿, 初七日二息十五餘里許下無路止宿, 初八日二息十餘里 閭延坪止宿, 無輜重輕騎, 而窮日入歸, 至閭延, 乃五日程也

상토가 강에서 100여리 떨어져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후기록을 보면 이 강은 당시 압록강이다. 후대의 기록에 상토가 만포 등이 자리한 강변에 있었다고 하였으므로, 1392-1488년의 압록강은 상토에서 100여리 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50km~60km 거리로 보인다.)
<사료19> 『성종실록』(1475년)
상토 구자(上土口子)는 강(江)과의 거리가 1백여 리(里)나 되어 적(賊)이 다니는 길이 매우 머니, 염려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平安道 上土口子距江百有餘里, 賊路甚遠, 似無足慮。
<사료20> 『성종실록』(1490년)
추파(楸波)·상토(上土)·만포(滿浦)·고산리(高山里)의 네 구자(口子)는 강(江)을 따라 나란히 배치하고 안으로 강계(江界) 한 부(府)를 설치하여 거진(巨鎭)을 삼았는데, 
楸波、上土、滿浦、高山里四口子, 沿江列置, 內設江界一府, 爲巨鎭, 

조선왕조실록에 명나라에서 요동 변장을 세우면서 조선영토와 접경했다고 하였다. 요동변장에서 동쪽으로 100여리 떨어진 곳에 창성부 운두이연대가 있고, 남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에 구령구자가 있었다. (100리는 48km이고, 60리는 29km이다.)
이 당시 요동변장 가운데 가장 조선영토로 다가와 있었던 지역은 애양보였다.
애양보는 현재의 애하 발원지 근처에 있었다. 현재의 지명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사료21> 『예종실록』(1469년) 
장장(長墻)으로부터 동쪽으로 창성부(昌城府)의 운두이 연대(雲豆伊煙臺)와의 거리가 1백여 리이고 남쪽으로 구령 구자(仇寧口子)까지의 거리가 60여 리입니다.
自長墻, 東距昌城府 雲豆伊烟臺百餘里, 南距仇寧口子六十餘里。
<사료22> 『성종실록』(1488년)
중국(中國)에서는 요동(遼東)으로부터 애양보(靉陽堡)까지 장성[長墻]을 쌓아서 적로(賊路)를 막았습니다. 애양보(靉陽堡)로부터 압록강(鴨綠江)까지는 비록 장성이 없다 하나
且中國自遼東至靉陽堡築長墻, 以防賊路, 自靉陽致鴨綠雖無長墻

상토는 현재 만포 부근이고, 애양보는 현재 애양진 부근이다.
상토에서 서북으로 154km 떨어진 곳에 여연이 있었고, 이 여연의 동북쪽에 당시 압록강이 있었다. 현재의 혼강(渾江) 상류지역에 해당한다.
그리고 상토에서 50km 이상 떨어진 곳에 당시 압록강이 있었다. 현재 혼강(渾江) 근처로 보인다. 
애양에서 동쪽으로 50km정도 떨어진 곳에 운두이연대가 있었다. 현재의 북고하(北股河)에 해당한다. 북고하는 혼강의 지류이다. 애양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진 곳에 구령구자가 있었다. 현재의 애하(靉河) 중류 또는 포석하(蒲石河) 근처이다. 운두이연대와 구령구자는 기록상으로 압록강 근처에 있었다.
그렇다면 1392년-1488년 압록강은 현재의 혼강이다. 혼강 본류와 지류를 모두 포함한다.
혼강에서 강물이 내려와 의주를 거쳐서 바다로 흘러가는데,이 의주 근처의 강줄기도 모두 포함한다.

5.결론
압록강의 위치변화는 1488년에서 1516년 사이에 일어났다. 지금까지 확인해본 바로는 명확하게 기록으로 나오는 시점이다. 더 정밀하게 살펴보면 아마 1500년대 이후로 보이는데, 추후 연구가 필요하다.
1392-1488년까지 압록강은 현재의 혼강(渾江)이었다. 1516년부터는 현재의 압록강으로 지명이 이동되었다.

<참고문헌>
<사료1>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폐사군(廢四郡)의 본말(本末)에 대한 변증설」(1800년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1A_0150_020_0060_2000_020_XML
<사료2> 『조선왕조실록』, 「중종」 49권, 18년 12월 11일(1523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K0_A18_12A_11A_00020_2005_025_XML
<사료3> 『조선왕조실록』, 「중종」 44권, 17년 5월 7일(1522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K0_A17_05A_07A_00050_2005_022_XML
<사료4> 『조선왕조실록』, 「세종」 154권, 지리지 평안도(1454년)
<사료5> 『조선왕조실록』, 「태조」 8권, 4년 12월 14일(1395년)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412014_002
<사료6> 『조선왕조실록』, 「세종」 73권, 18년 윤6월 19일(1436년)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806119_002
<사료7> 『조선왕조실록』, 「문종」 3권, 즉위년 8월 26일(1450년)
http://sillok.history.go.kr/id/WEA_10008026_004
<사료8> 『조선왕조실록』, 「단종」 9권 , 1년 11월 2일(1453년)
http://sillok.history.go.kr/id/WFA_10111002_001
<사료9> 『조선왕조실록』, 「세조」 2권, 1년 11월 10일(1455년)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111010_006
<사료10> 『조선왕조실록』, 「세조」 15권, 5년 1월 15일(1459년)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501015_003
<사료11> 『조선왕조실록』, 「성종」 168권, 15년 7월 5일(1484년)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507005_006
<사료12> 『조선왕조실록』, 「성종」 181권, 16년 7월 26일(1485년)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607026_003
<사료13> 『조선왕조실록』, 「성종」 215권, 19년 4월 5일(1488년)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4005_001
<사료14> 『조선왕조실록』, 「중종」 44권, 17년 3월 7일(1522년)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703007_002
<사료15> 『조선왕조실록』, 「중종」 25권, 11년 5월 30일(1516년)
http://sillok.history.go.kr/id/wka_11105030_004
<사료16> 『조선왕조실록』, 「중종」 49권, 18년 12월 11일(1523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K0_A18_12A_11A_00020_2005_025_XML
<사료17> 『국조정토록』, 「정파저강」(1614년)
<사료18> 『조선왕조실록』, 「중종」 49권, 18년 12월 20일(1523년)
http://sillok.history.go.kr/id/WKA_11812020_001
<사료19> 『조선왕조실록』, 「성종」 57권, 6년 7월 11일(1475년)
http://sillok.history.go.kr/id/wia_10607011_003
<사료20> 『조선왕조실록』, 「성종」 246권, 21년 10월 24일(1490년)
http://sillok.history.go.kr/id/wia_12110024_003
<사료21> 『조선왕조실록』, 「예종」 7권,1년 8월 13일(1469년)
http://sillok.history.go.kr/id/kha_10108013_004
<사료22> 『조선왕조실록』, 「성종」 217권, 19년 6월 11일(1488년) 
http://sillok.history.go.kr/id/WIA_11906011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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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컁컁컁 21-09-02 08:37
   
지도나 관련 영상이 있다면 같이 올려주시는 게 더 이해가 잘 될 것 같습니다.
Ghost 21-09-03 09:58
   
말보다 지도로 보여주면 더욱 효과적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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