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한국학 교수들이 저런 생각이 많아요
일본의 대학원 수업시간때 일제강점기 시절에 대해 수업하다가 엄청 싸웠었네요
애경을 만든 그 할배에 대해 미국인 교수가 쓴 책인데 뭐 갖은 친일행위가 - -;;
애경에서 그 책 막고 있다던 거 같던데...
암튼 그 책 보면 NBC와 보는 시각이 같네요
쨉 종특의 기습공격 및 학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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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쨉군함 운요호(雲揚號)의 강화해협 불법침입 포격.
-1895년 쨉 낭인들에 의한 명성황후 기습 시해
-1919년 3.1운동 당시 쨉의 한국인 전국적 학살(제암리 학살등)
-1920년 쨉군 19사단 보병75연대의 약 3만명의 한국인 양민 간도 대학살.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쨉의 6천명 이상의 한국 민간인 학살
-1895년 청일전쟁때 쨉의 기습공격,
-1905년 러일전쟁때 쨉의 기습공격,
-1937년 중일전쟁때 난징 대학살,
-1941년 미국에의 진주만 기습공격
-1941년 말레이반도 영국군 기습공격
그외 앞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등 크고 작은 잔악한 왜구의 민간 구분 없는
무차별적 셀수 없는 학살과 기습질.
나치가 유럽 전역에 가한 강제노역보다 더욱 악랄한 대규모의 수백만의 강제징용과
수십만의 성노예, 전쟁 총알받이, 천문학적 조세수탈과 막대한 식량, 지하,산림,수산,농축산 자
원 강탈에 우리말 우리얼 말살의 민족문화말살정책, 우민화,식민 교육, 위조지폐 남발, 각종 문화
재 수탈과 파괴등 이루말할 수 없는 해악과 함께 해방 이후 정치적 공백속에서 남북 분단으로
후차적 악영향.(남북 전쟁때보다 쨉의 악랄한 수탈시기에 한국인의 성장기 애들의 성장점이 최저
미국 국무부는 각국 정부의 인신매매 방지 활동과 관련해 일본을 15년째 2등급에 지정했다.
국무부가 매년 발표하는 인신매매 보고서는 세계 각국을 1~3등급으로 나누는데 인신매매 문제가 있지만 정부가 적절한 법·제도적 대응을 하는 나라를 1등급, 최소한 기준도 마련하지 않고 별다른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 나라를 3등급에 분류한다. 한국은 2002년 이후 14년째 1등급에, 북한은 2003년 이후 13년째 3등급에 속했다.
일본이 2등급 국가에 분류되는 것은 일본인 여고생, 외국인 등 취약한 지위에 있는 청소년에 대한 성매매, 동남아로의 아동섹스관광 등 문제에 일본 정부가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은 선진국들 가운데 유일하게 2000년 발효된 유엔 인신매매 방지 의정서에 비준하지 않고 있어서 인신매매 문제에 있어서 후진국으로 분류된다.
일본 군국주의의 정신적 기반은 무사도(武士道)이다. 일본 우익은 이를 전래의 윤리규범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실상은 20세기의 산물이다. 역사적 실체가 아닌 상징조작이다. 20세기 이전까지 일본의 어떤 기록에도 무사도에 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이를 날조해 제국주의 침략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자가 '무사도'란 책을 쓴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이다.
서문엔 집필 동기가 간단히 나온다. 그는 "종교교육을 하지 않는 일본에선 도덕을 어떻게 가르치는가"라는 벨기에 학자의 질문에 답이 궁해진 적이 있었다.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그는 일본의 무사도 정신이야말로 일본인의 도덕규범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본에도 제대로 된 도덕과 윤리 체계가 있다, 서양에 기사도가 있듯이 일본엔 무사도가 있다... 그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지니고 책을 썼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서양의 기사도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참고로 어릴 때 어렴풋이 듣던 유교적 덕목이나 사무라이 전설들을 버무려 만든 것이었다. 니토베의 상상력의 산물이었다는 얘기다. 무사도라는 게 정말 일본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왔다면, 왜 하필 사무라이의 시대가 끝난 뒤에야, 그것도 서양 생활을 한 청년의 손으로, 미국에서 영어로 먼저 쓰였겠는가
‘... 왜적은 두 세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를 납치해다가 머리털을 깎고 배를 가른 후 물에 깨끗이 씻어서 쌀, 술과 함께 제단에 올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좌우편으로 나위어서서 풍악을 울리고 절을 하였다. 제사가 끝난 후에 그 쌀을 두 손으로 움켜쥐어 나누어 먹고 술을 석 잔씩 마신 다음 그 여자 아이의 시체를 불에 태우는데...’
-고려사 권126, 열전 제39 변안열전 中
왜의 지배계급이라는 사무라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기록들을 보면 병법서 한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토쿄대 이노우에 교수
"일본은 고대 한국인이 세운 나라이다. 일본은 임나일본부 설치를 날조했을 뿐 아니라 오오진(應神)왕이 백제계 부여(夫餘) 후왕인 의라(依羅)이며, 기토라 고분의 40대 텐무(天武)왕은 신라 김다수(金多遂)임에도 일본인으로 변조했다. 최초로 일본을 지배한 천황은 백제인의 후손인 15대 오우진(應神·4세기)천황과 16대 닌토쿠(仁德·5세기)천황 부자다. 오우진 천황이 백제 복식을 입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온다. 이들 천황 부자에 의해 고대 일본의 가와우치(河內)왕조가 세워졌다.
USA캘리포니아대학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일본의 원주민 [조몬인],[야요이인(한국을 제외한 대륙민족)], [아이누족]을 정복하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탄생 시켰다.
존 코벨(John Cater Covell,1910~96)
"일본의 신도(神道).. 일왕의 뿌리..일본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등...한반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놀라운 일이다
심지여 1945년 8월15일 일왕이 자신이 타고 다니던 백마를 맥아더에게 넘기는 것으로 항복을 표현하는 것조차 한국식 이다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 ) 교토대학 사학과 명예교수는 일본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국보급인 고대 ‘신찬성씨록’을 자택 서재에 보관하고 있다. 우에다 교수는 그 책을 직접 필자에게 보여주면서 “비다쓰 천황은 백제 왕족이다.
"왜국을 최초로 정복한 한반도의 왕국은 가야가 틀림없다,왜국에서 발견되는 철기 무기가 모두 가야의 제품으로 재질 또한 가야의 철이다"
카큐슈우인대 오오노 스즈무 교수
"한국인은 일본인에게 금속 사용법을 가르치고, 야금·금공 기술을 전했으며,
염색·피혁제조·베틀 직조·기와 제조·의학·역법·천문학·조불(造佛)·사찰 건축·조탑 등 모든 것을 가르쳤다”(‘日本語の 世界’, 1980)
일본에 쇠로 만든 무기와馬具.쇠투구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때는 서기 4세기 후반인데, 이 시기의 일본 고분에서 나오는 철제품은 성분이 한국의 것이며, 일본의 철로 만든 제품은 5세기 후반에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新日本 제철 야와타 연구소의 분석결과)
‘大原眞人. 出自諡敏達孫百濟王也. 續日本紀合.’
대원진인, 그의 조상은 시호가 민달(비타쓰(敏達))이라는 백제 왕족이니라. ‘속일본기’ 기록에도 부합한다.
"(우리나라 할때)나라의 ‘백제천(구다라강:百濟川) 옆에 백제궁(구다라궁; 百濟宮)과 백제사(百濟寺)라는 큰 가람을 지었다. 조메이왕이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 ‘구다라노오모가리(百濟大殯)’로 장례를 치렀다’"
-일본 서기
14세기 초에 씌어진 일본 불교 왕조사인 ‘부상략기(扶桑略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推古天皇元年正月, 蘇我大臣馬子宿. 依合戰願, 於飛鳥地建法興寺,
立刹柱日 島大臣竝百餘人 皆着百濟服, 觀者悉悅, 以佛舍利, 籠置刹柱礎中.”
588년, 백제 왕실에서 건너온 건축가 태량미태(太良未太), 문가고자(文賈古子) 등에 의해 일본 최초의 칠당 가람이 아스카에 착공됐다. 위 대목은, 스이코 여왕이 등극한 직후인 593년 1월에 소가노우마코 대신과 만조백관이 ‘백제옷’을 입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백제에서 보내온 부처님 사리함을 찰주의 기초 속에 안치했다는 내용이다. ‘만조백관이 ‘백제복’을 입었다’는 것은 스이코 여왕의 아스카 왕실이 백제계 왕가임을 말해준다.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를 ○○○○가 만들었다.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지금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이두로 이 글을 다시 풀어보니 놀랍게도 이것은 고구려가 남침한 369년 당시 백제 땅이던 하동에서 후왕으로 있던 장수 집안이 동경까지 망명온 뒤 이곳에서 다시 백제 후왕으로 책봉된 내용을 담은 집안 이야기 였던 것이다.
이두로 풀이한 칼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기 471년에 “고” 확고는 조상이름을 적어 둔다. “오호 비꼬”어르신, 그 아들 “다가리 쪽니”어르신, 그 아들 “고리 확고”, 그 아들 “다사기 확고”. 그 아들 “바라 고비”, 그 아들 “가사 비리”, 그리고 그 아들은 “고 확고”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장수로서 대대로 섬긴바 그 임금님은 사기궁에 마실을 차리고 천하를 다스리시는 크신 확가 개로 대왕이시니라. 온 번 불리고 달구어 만든 이 칼에 우리 집안 내력과 뿌리를 적어두는 바이다
...................
이렇듯이 이나리야마 쇠칼의 글은 5세기 가운데 즈음에 옛 일본의 관동, 관서, 규슈 등 세 곳에 백제가 다무로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왜 왕실은 백제 왕실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혀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인 것이다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제대로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박살난 일본, 결국 용서를 빌기 위해 서기 742년에 사신을 파견하지만‥
애장왕(哀莊王)
5년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五年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 이를 기특하게 여긴 신라는 드디어 일본을 용서하고 속국으로서 인정한다. 서기 806년 속국에게 하교하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7년,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七年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 사찰을 수리하는 것조차 '종주국' 신라의 허락이 없으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본. 이후 '속국' 일본에 대한 종주국 신라의 사랑은 계속되고… 신라의 어버이와 같은 사랑에 감동한 일본은 서기 882년, 보답한다.
헌강왕(憲康王) 8년,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八年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중국의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공기가 맑고 부가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이 좋을 뿐만 아니라, 주민의 성격 또한 양순하기 때문에 떠나려 하지 않는다
-창세와 역사서<마크디시(al-Maqdi shi>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이드리시(이슬람 지리학자)-1154년에 신라가 포함된 지도를 만듬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대단히 좋은 나라다.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 - 아주 좋은 향기)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오면 곧 치유된다.
-무슬림이 남긴 것이라고만 전합니다-
중국 저쪽에 산이 많은 ‘신라(Shila)’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고 물 맑고 공기가 좋아
한번 간 무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후르다드베(Ibn Khurdadbeh)의 '제 도로와 왕국 총람' (이슬람)
신라 서라벌에는 약 17만호의 가구가 있었다. 이는 대략 90만-100만의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훗날 조선의 한양보다 4-5배나 더 많은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혹자는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과 함께 서라벌을 당시 세계 4대 도시로 꼽는다.
인구가 많다고 세계적 도시로 꼽는 것이 아니다. 신라, 특히 서라벌에는 초가집이 없이 모두가 기왓집이었다. 온통 금으로 뒤덮은 집도 수십채나 되었다. 그들의 부유함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신라는 차도와 인도가 나란히 잘 정비된 도로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인도 옆에 마차가 수월하게 다닐 수 있도록 바퀴 자국에 맞춘 도로의 흔적이 아직까지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도로 옆으로는 배수구의 흔적도 함께 남아 있다.
우선 서민층 거주 지의 경우, 집집마다 우물 하나씩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다. 이처럼 서민층에서도 각 집마다 우물을 하나씩 갖고 있을 정도면, 당시의 서라벌이 얼마나 위생이 청결한 곳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온돌을 사용하지 않고 숯으로 난방을 했는데 이를 뒷받침 해주기라도 하듯, 대규모의 숯 가마가 발견되기도 했다. 숯으로 난방을 할 경우,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의 주거환경은 상당히 쾌적했을 것이다. 상류층 거주 지역의 경우에는 본채 건물 외에도 별채와 화장실까지 구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계획적으로 잘 정비된 도시였던 서라벌은 마치 바둑판과도 같은 형태로 도시 주거지를 이루고 있었는데, '방'으로 나뉘어지는 이러한 거주 구역은 한 방당 약 8천평 규모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골목마다 출입문이 있어 치안상태도 좋았다. 그래서 '몇번째 골목, 몇번째 집' 하는 식으로 주소만 알면 집을 찾는 일도 매우 쉬웠다. 따라서 인구조사 또한 치밀하고 완벽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가구당 가축의 수까지 세세히 기록해 놓았다.
천년 전의 도시가 오히려 지금의 대도시보다 더욱 계획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KBS 역사 스페셜>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
-도화견문지(1080년경에 송나라의 곽약허가 지은 책)
근세조선
동아시아의 독보적 선진 공론 정치를 구현한 조선
(명, 왜엔 없는 조선 선비의 공론정치)
같은 유교문화권이지만 성리학의 영향, 특히 공론(公論)의 강도는 조선·명·에도막부가 달랐다. 에도막부에선 5~6명의 로주(대신)가 비밀 회합으로 대소사를 결정했다. 공론은 없었다. 황제의 권한이 강했던 중국에선 공론이 사실상 허락되지 않았다. 조선만 공론을 지켜냈다
야인과 왜인들은 모두 우리의 번리이고 우리의 신민이니 왕된 자는 똑같이 대우하고 차별을 없이하여 혹은 무력을 사용기도하고, 내가 즉위한 이후에 남만, 북적, 이것은 하늘의 끌어들이는 바이지, 나의 슬기와 힘이아니다. 흑룡강, 속평강, 건주위, 올량합, 이만주 동창등 심처 야인과 삼위 달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입조하기를 청하거든, 그 종인을 줄여서 후대하여 올려보내라
잉글랜드 100, 조선 134, 중국(강소성, 절강성) 191.
중국전체의 평균 총요소생산성은 191 이하일 것이나 이 역시 잉글랜드보다 高.
◇ 1인당 GDP 비교(조선 vs. 중국)
1820년 1인당 GDP - 중국: 600달러, 조선: 600달러
┃중국의 1인당 GDP 추이
- 인구의 비약적 증가로 인해 1500년부터 320년간 600달러 수준.
- 1870년 530달러로 추락.
- 1920~30년대 550달러대에서 등락을 반복.
┃조선의 1인당 GDP 추이
- 1870년 604달러로 반등
- 1911년 777달러(아시아 2위)
- 1917년 1,021달러
- 1939년 1,459달러
조선의 생활수준은 16세기말부터 상승하여 18세기 영·정조시대(1724~1800)에 정점을 기록한 후 하락.
- 16~17세기에는 중국보다 낮을 수 있으나 18세기 중국을 추월.
- 19세기(1820년)에는 다시 중국과 비슷한 수준.
◇ 조선의 교육복지
┃세종치세(재위 1418~50) 이후 18세기까지 지방향교, 사학(四學), 성균관 등 모든 유생들에게 무상교육, 무상숙식, 학비지급, 학전(學田)지급, 면세 및 요역면제.
-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논어」의 유교무류(有敎無類)의 원칙에 따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