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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조총련과 일본 정치인들에게서 정치자금 받던 김대중이 1970년대에는 주한미군 철수시키고 일본군과 중국군 불러들여 연방제 통일하자고 선동하였었다. 1970년대의 김대중?정치 이슈는 연방제 통일이었다.
그런데, 1980년 봄에 직선제 개헌 반대를 들고 나왔다. 사실, 김대중이 광주폭동을 일으킨 것도 최규하 대통령의 대통령 직선제 선거를 위한 선거법 개정을 폭력으로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1980년 봄에 시위가 있었다. 과격 시위가 있었다. 요즘 사기꾼들은 당시 과격 시위가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사기치는 모양인데 문제는 시위 구호였다. 당시 시위 구호는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끙끙이 속으로 김대중이 직선제 개헌 반대를 정치 이슈로 들고 나왔으며, 광주 폭동을 선동하였던 것일까? 여기 그의 두 측근의 증언이 있다.
김대중 가문의 오랜 가신이었던 이기동씨는 김대중이 5월 22일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키고 신현확 총리 내각을 강제로 퇴진시키고 선거 없이 자기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예비 내각 명단을 미리 짜놓았었다고 증언한다.
김대중 미화 작업의 대표적인 문인 박노해 시인은 그의 『윤상원 평전』에서 김대중이 최규하 대통령 정권을 강제로 전복시키고 자기가 집권하기 위해 그의 최측근 윤상원으로 하여금 5월 9일부터 예비고 무기 탈취조를 조직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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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중순의 시위구호는 “최규하 퇴진” “신현확 퇴진” “개헌 반대”였는데, “개헌 반대”는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최규하대통령 정부는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고, 그 새 헌법에 의거하여 1년 내로 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그 한가지목적을 위하여 탄생한 과도정부였던 반면 1980년 봄의 시위는 과도정부가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는 것을 훼방하기위한 시위였었기에 그 시위구호가 “개헌 반대”였다.
1960년대의 통혁당 사건 이래 적화통일세력은 줄곧 무장봉기에 위한 공산주의 혁명 노선을 유지하였다. 1975년 월남에서 도시 게릴라 방법에 의한 무장봉기로 공산주의 혁명이 완성되는 것을 본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는 남한에서 그 방법을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구체화하였다. 이것이 1979년 11월의 <명동YWCA위장결혼식 사건> 때부터는민중봉기에 의한 정권교체론으로 발전하고, 이듬해 1980년 3월 김대중이 신민당 대선 후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선거가 아닌 민중봉기로 정권을 교체시키겠다는 김대중의 집권 전략으로 가닥을 잡았다.
당시 선거가 아닌 민중봉기로 정권을 교체시키겠다는 김대중의 집권 전략을 지지하던 세력의 논리는 최규하 대통령과신현확 총리는 유신잔당이므로 과도정부는 헌법 개헌을 주도할 자격이 없고, 민중봉기로 과도정부를 전복시킨 후 김대중이 임명하는 쉐도우 내각이 새 헌법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집권 전략이 성사되게 하기 위해서는 과도정부의 선거법 개정을 방해하여야 했으며 그래서 당시 시위 구호가 “최규하 퇴진” “신현확 퇴진” “개헌 반대”였다.
이것은 당시 학생으로서 시위현장에 있었던 시대의 증인이 아는 사실이요 <5 · 18 이전 성명서>로서의 기록물들에명시되어있는 사실이다. 직선제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친 시민군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선거가 아닌 무장봉기의 수단에의하여 정권을 교체시키려던 의지가 시민군 성명서들에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