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장남은 남측, 차남은 북측 국립묘지에 잠든 ‘독립운동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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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 생명의 은인” “국부가 죽어도 마음대로 울지 못하는 세상이었으니…”. 한 독립운동가에 대한 북한 김일성 주석의 평가다. 그가 ‘국부’ ‘생명의 은인’으로 고마워한 이는 지금 남측 국립현충원에 묻혀 있다. 어떤 사연일까.
식민, 해방, 분단, 전쟁이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은 독립운동가 가족사에도 투영됐다. 여기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독립운동가가 있다. 현재 자신과 장남은 국립현충원에, 차남은 북측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남북 모두에서 존경받는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장(현 국회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1882~1931)다.
손 목사는 당시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평양의 감리교 목사를 통해 기독교를 접했다. 기독교계 숭실학교에 들어간 그는 2년 선배인 김형직, 즉 김일성의 아버지를 알게 됐다. 목회자가 된 그는 독립운동을 했다.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담했고,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 암살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동대문교회 목사 시절(1914~1915) ‘종로경찰서 폭탄 의거’ 김상옥, 정동제일교회 목사 시절(1915~1918)에는 인근 이화여고 학생이던 유관순에게 영향을 줬다. 임시정부에도 적극 참여했다. 초대 의정원 부의장과 2대 의장(1919), 교통총장(1921), 대한적십자회장(1922)을 지냈다. 특히 국내 독립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안창호, 신채호와 가까웠다.
손 목사는 이후 만주 지린성에서 한인교회를 세운 후 민족유일당 운동을 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당시 김형직은 1926년 죽음을 앞두고 김일성에게 “손 목사를 찾아가라”고 했다. 손 목사는 세례를 준 후 자식처럼 보살폈다고 한다. 그의 자녀들과 김일성은 가까이 지냈다. 육문중학을 함께 다닌 차남 손원태와 김일성은 형제처럼 지냈다고 한다. 김일성은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 ‘손정도 목사’편에서 “나는 그를 친아버지처럼 존경했다. 손 목사는 나를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었다”고 회고했다.
손 목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1931년 서거했다. 한국 정부는 1996년에서야 만주에 묻혔던 그의 유해를 봉환해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국가보훈처는 2007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두 아들의 운명도 극적이다. 장남 손원일(1909~1980)은 ‘한국 해군의 아버지’가 됐다. 그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11일 해병병단을 조직했다. 이날이 한국 해군 창설일이다. 친일 색채가 묻어 있는 육군과 달리 해군은 독립적으로 건설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주역이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자란 손원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6·25전쟁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 국방부 장관, 서독 대사, 한국반공연맹 이사장 등을 지낸 후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차남 손원태 박사(1914~2004)는 미국으로 건너가 병리학자가 됐다. 그는 1991년 북한 초청으로 방북해 김일성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김정일 위원장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의 상중 기간에도 손 박사를 평양으로 불러 팔순잔치를 성대하게 했다. 측근들이 말렸지만 김 위원장은 “아버지의 뜻”이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손 박사가 2004년 별세하자 김 위원장은 유족에게 조전과 조화를 보냈다. 북측은 2005년 그를 애국열사릉에 안장했다.
손 목사는 남북 모두로부터 인정받는 이례적인 독립운동가다. 두 아들은 각각 남측과 북측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극적이지만 기구한 20세기 한반도 역사의 단면이다.
※참조 손준영 <거대한 뿌리>, 국가보훈처 공훈록 및 이달의 독립운동가 공적 개요, 손정도목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CBS <세 개의 무덤, 역사가 나눈 삼부자의 길> 등.
■ 특별취재팀
강병한(정치부), 유정인(문화부), 심진용(정치부), 박광연(경제부) 기자
강병한 기자 silverma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