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1887년
~1964년)
독립운동가, 전 정무직공무원,전라북도 순창 출생
-청년의병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무료 변론,대한민국 대법원장이
되기까지
아버지는 사간원 정언상희(相熹),3남매 중 외아들
일제강점기 변호사로 활동,항일 운동 관련 각종 사건,항일 운동가들의 변호를 자처.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2대 대법원장으로 재직.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체결 되었을때 최익현에 감화,
1906년 20세 때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
1910년 일본 니혼대 전문부 법학과,메이지대 법학부 졸업,주오대학 고등연구과 수학후
귀국
일본 유학중 금연회(禁煙會)조직으로 조선 유학생 학자금 보조
1919년 경성 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 개업
변호사 시절 수많은 독립 운동 관련사건을 무료변론 하였으며,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1923년 허헌·김용무·김태영 등과 형사 공동 연구회를 창설했으나 ,실제론
항일변호사들의 공동전선 모임이었다.
이들은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 운동 후원 단체로 무료변론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까지도 돌봤다.
김병로는 1932년 신간회 해체후 사상사건 변론에서 제한을 받게 되자 경기도 양주로
내려가 은둔했고
창씨개명은 커녕,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그가 맡은 독립운동 관련
사건은,
여운형·안창호 치안유지법 위반사건,김상옥 의사사건(金相玉義士事件),
광주항일학생운동, 6·10만세운동, 정의부·광복단사건,
조선공산당사건 , 광주 학생사건 진상조사위원
대법원장 재임 9년 3개월 동안 그는 사법부 밖에서 오는 온갖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사법권독립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확고했던가는 이승만과의 마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6·25 전쟁 때 다리도 절단되었으나 의족을 짚고 등원할 만큼 강인하고 강직한
성품이었다.....
진정한 우리나라 보수의 롤모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