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에게 많이 당했어요. 단재 선생의 조선혁명선언 있잖아요. 유신독재 반대하는 운동권 지하조직의 교과서가 됐다면서요. 단재 선생은 죽고 없으니 타겟을 그 아들(이 여사의 남편)로 잡았죠. 그러니 우리(일가)가 빨갱이 새끼로 쫓겨서 얼마나 다녔는지…”
이 여사는 단재 선생 묘소를 참배하러 갈 때마다, 그 마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회고하기도 했다. 단재 선생의 먼 친척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임에도 단재 선생의 후손들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청원군 단재 묘소(현재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소재) 가는데, 그 동네가 (고령 신씨) 집성촌이에요. (묘소 있는 곳으로) 올라가면서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보고 (남편이)인사하고 올라갔어요. 그렇게 묘소 참배하고 내려오면 동네가 확 비어있어요. 우리 아이들 업고 다닐 때인데, 목마르다 배고프다고 난리여도 어디 갈 데가 있어야죠. 전 우리 남편보고 (마을 사람들이) 정말 매몰차고 못됐다고 그랬어요. (아이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다 그러니까 밥 한 숟갈이라도 먹고 가자고 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저보고 그래요. 그냥 가자고요”
이 여사는 그 이유에 대해 남편이 다음과 같이 말했음을 회고했다. 모든 동향을 정보기관에서 감시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고 나면 (중앙정보부)기관에서 와서 (마을 사람들)모두 못살게 구니까, 우리가 (묘소) 갈 때는 그렇게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다 있다고 하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