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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갑신정변 이후 안동 김씨 균(均)자 항렬 사람들은 전부 이름을 바꿨습니다. 남양 홍씨 식(植)자 항렬 사람들도, 반남 박씨 영(泳)자 항렬 사람들도, 대구 서씨 광(光)자 항렬과 재(載)자 항렬 사람들도 모두 이름을 바꿨습니다. 저들은 자타공인, 당대 최고의 ‘금수저’ 가문이었습니다. '명문대가'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을 축출했다고 선포하는 집단 행위를 한 거죠.
김옥균 등은 자기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이 평생 기득권을 누리며 호의호식하려 했다면, 세상을 그대로 두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세상을 바꾸려 했다고 해서 기득권을 누리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김옥균 등은 모두 자기 가문의 기득권 덕으로 요직에 올랐습니다. 개혁의 꿈을 품은 뒤에도 기득권자의 삶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때 정변을 일으키지 않고 자기 기득권을 지키는 데에만 집중했다면, 김옥균은 암살당한 뒤 사지가 찢겨 전국에 전시되는 참혹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내내 출세 가도를 달려 이완용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을지도 모릅니다.
개혁이란, 자기 존재의 조건을 바꾸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기득권 세력 내의 개혁운동가들은 한편으로 자기 존재 자체가 주는 혜택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기 존재를 부정하려는 이율배반적 면모를 보이곤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존재와 의식의 불일치’를 비난하면,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개혁 대신 혁명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가들은 이 ‘불일치’ 때문에 상층이나 중간 계급 출신 지식인들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태도의 극단을 보여 준 게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이었습니다. 그들은 안경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지지자들까지 ‘기회주의적 지식 분자’로 몰아 학살했습니다.
자기도 기득권 세력의 일원으로 살았으면서 말로만 개혁을 주장했다며 조국 후보를 비난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하지만 역사상 수많은 개혁주의자가 많건 적건 '존재와 의식의 불일치'를 드러냈습니다. 이런 ‘존재와 의식의 불일치’를 문제 삼아 개혁 세력을 위선적이라고 비난하는 건 ‘반개혁세력’의 고정 레퍼토리입니다. 이런 비난에 동조하면, 기득권 가문에서 태어나 기득권을 유지 강화하는 데에만 몰두한 사람들이 오히려 일관성 있고 솔직한 사람으로 보이게 됩니다. 당대의 '기득권 구조'를 유지하는 게 도덕적으로 보이는 역설의 현상이 나타나는 거죠.
'개인적 도덕성'의 차원에서는 조국씨의 '존재와 의식'을 비교하고 불일치하는 점을 찾아내 비판,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도덕성의 차원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비슷한 환경에서 태어나 같은 해,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입학했던 조국씨와 나경원씨의 존재와 존재를 비교하고, 의식과 의식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기득권 세력 중에는 나경원씨처럼 '존재와 의식의 확실한 일치'를 보여주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고 고착되는 것은, '존재와 의식의 불일치' 때문이 아니라 '존재와 의식의 일치' 때문입니다.
‘존재와 의식의 불일치’는 개혁의 중요한 동력이고, ‘존재와 의식의 일치’는 수구의 일관된 원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