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눈치 보면서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죽은 용사들에 대한 처우도 제대로 못하여 미망인 하나는 이나라를 버리고 이민까지 가게 되었지요. 그 미망인이 지난 대선 박근혜 후보 참조연설 한것이 많이 기억에 남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부분에 대해서 만큼은 영원히 자유롭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변명을 해오 이 부분은 대통령으로서 해서는 안 될일을 한 것이기 떄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가히 도쿄로 날아가 월드컵 결승전을 관람한 뒤 폐막식에 참석했다. 전사자와 유족들을 위한 대통령 의전은 없었다. 장례식은 해군참모총장 선에서 ‘조용히 알아서’ 치러졌고, 국방장관 합참의장마저 얼씬하지 않았다.
서해교전 전사자들에 대한 최고 예우는 해군 제2함대사령부 영내에 추모비 하나 세운 것이었다. 이후 1년에 한 차례 2함대사령부 주관으로, 있는 둥 마는 둥 치른 추모식은 초라했다. 전임 정권의 ‘햇볕’을 승계한 노무현 정권에서도 한가지였다.
증언자들은 말한다. “아군 피해가 컸던 것은 도발을 해와도 먼저 사격하지 말라는, 청와대 보고부터 하라는, 사실상 그냥 목숨을 내주라는 교전지침 때문이었다.” 유족들이 실의에 빠져 방황하는 사이 서해교전은 국민들의 관심에서 이내 멀어져 갔다. 어느 미망인은 조국에 환멸을 느낀다며 이민을 가버렸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3648681&code=11171340
제1연평해전 이후 김대중은 ▦북방한계선을 지키고 ▦선제공격을 하지 말 것 ▦상대가 먼저 발사하면 교전규칙에 따라 격퇴할 것 ▦전쟁으로 확대시키지 말 것으로 이루어진 4대 교전 수칙을 지시했고 해군은 ‘밀어내기’로 불리는 차단기동 개념을 도입했다.[19][20] 이후 제2연평해전에서 국군 피해가 컸던 것은 김대중 교전 지침, 차단기동 도입 때문이라는 증언이 있었다.[2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138603
당시 김대중은 북한의 무력 도발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여 국군 6명이 전사하였음에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4시간 35분만에 여는 등의 늦장 대응을 했다.[22] 군통수권자인 김대중의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우발적 충돌로 결론지었고, 같은 내용의 북한 통지문이 오자 그대로 수용했다. 김대중은 교전 다음날 예정된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다.[23] 이회창 후보는 의원총회에서 “정부는 서해도발이 우발적이라고 하면서 미국 일본에 냉정한 대응을 요청했다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가”라고 주장했다.[24]
제2연평해전 발발 다음날인 30일 김대중은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 사이타마로 출국하여 결승전 경기를 관람했다. 김대중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서해교전 사태에 대해 냉정히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며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함께 했다. 김대중은 회담에서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25]
교전 이틀 후 국군수도병원에서 해군장으로 거행된 합동영결식이 열렸을 때조차 김대중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등 내각과 군의 핵심 인사들마저 참석하지 않았다.[26] 국방부는 군 장례식은 장례위원장 이하만 참석하는것이 관례라고 해명하였지만[27] 해군장이었던 천안함 침몰 사건 희생자의 영결식에 이명박 대통령과 김태영 국방장관은 참석했다. 이후 제2연평해전 전사자 추모식에도 김대중은 참석하지 않았고[28][29] 이명박대통령은 2012년 추모식에 참석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제2연평해전을 ‘잊혀진 전쟁’으로 부르며 당시 김대중 정권의 처우에 분노하고 있다. 고(故)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 씨는 “부상당한 아들의 면회를 기다리며 TV를 보니 대통령이 일본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며 “(출국한) 성남 비행장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몇 분도 걸리지 않는데…”라고 말했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는 “서해에서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 대통령이 출국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전쟁이 나면 대통령은 밖에 있다가도 들어와야 합니다. 그게 정상적인 국가예요.”라고 김대중을 비판하였다.[30]
잭 프리처드 전 한반도평화회담 미국특사는 저서 ‘실패한 외교’에서 해군 장병 6명이 희생됐는데도 김대중(DJ)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오직 햇볕정책에만 매달렸다고 밝혔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서해교전 여파 때문에 7월 10일로 잡혀 있던 대북협상단의 평양 방문을 미루려 했으나 오히려 한국 정부가 예정대로 추진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미국 정부가 오히려 ‘한국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북한을 상대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우리 정부에 주의(注意)를 줬다고 프리처드는 밝혔다. 그리고 미 정부는 협상단의 방북을 연기했는데, 그때의 한미관계가 이처럼 ‘기괴했다’고 프리처드는 덧붙였다.[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