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칸69님의 하기 글을 읽고 나서 조금 교통정리를 해야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짤막하나마 짚어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인지하고 있는 한도내에서 기술해 드리지요...
전반적으로는 차칸69님이 기술하신 내용들이 대부분 맞습니다.
다만 놓치신 부분이 있다면...
박정희씨가 만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궁극적 목표인
일본 육사를 통해 일본군 장교가 되기 위해서였고...
만주에서의 활동은 사실상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디딤돌 역할을 위한 것이었죠.
박정희의 출신 (소위 조센징...) 이나 당시 나이를 감안했을 때 다이렉트로
일본 육사를 진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왔죠.
하지만, 한가지 우회로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만주군이었죠.
당시 일본은 만주를 경영하면서 만주의 식민화 및 유화책 (소위 '당근' 이죠...)
으로서, 매년 만주군관학교 졸업자중 성적우수자 몇명씩을 일본 육사에 특채로 진학할 수 있는
특전을 베풀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따라서, 상황이 여의치 않은 박정희로서는 궁극의 목표인 일본군 장교가 되기 위해서는
만주군관학교 입학 -> 우수성적 졸업 -> 일본 육사 편입 -> 졸업후 소위임관
의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것이죠...
그 첫단계인 만주군관학교 입학부터 소위 '혈서' (진위여부는 차치하고 현실적으로 그 나이의
조센징을 만주군관학교에서 그냥 덮어놓고 받아줄리는 없고, 혈서가 아니더라도 당연히
무언가 적극적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유추가 어렵죠....) 를 통해 간신히 입학하게 되지요.
그게 1939년의 일이고, 결과적으로 위의 과정을 모두 거쳐 박정희는 드디어 일본 육군 소위에
임관하게 됩니다. 이 과정이 모두 끝났을 때가 1944년인 것이죠.
즉, 박정희의 일본군 임관이 44년이라고 하여 달랑 1년간의 일본군 생활이라고 기술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는 점입니다. 최소한 5-6년 이상을 일본군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니까요.
물론 이것이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인지... 일본에 대한 맹목적 동경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느쪽으로 결론을 내리더라도, 당시 시골의 일반적인 촌부가 수탈등을 덜 당하기 위해
일본 군관이나 경부에게 아부를 떠는 등의 행태와 비교했을때...
자발적 친일성향이 두드러지는 면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그 1년여 밖에 안된다고 하는 만주국 육군보병 제8단 에서의 활동도...
초반에는 소대장을 했었고 곧 8단장의 부관으로 지냈다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단장이 직접 부관으로 박정희라는 조센징을 뽑았다고 하는 것은...
박정희씨가 일본 상관들에게 어떤 식의 인물로 비추어져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또한, 익히 다들 아시다시피 만주국에 파견된 일본군인들의 주 목표는 당연히 팔로군 토벌이었고,
팔로군은 44-45년 당시 3개 사단 6개 여단체제로 한개 사단당 2개의 여단을 가지고 있는
편제였는데, 그 중 한개 여단이 바로 독립단 으로서 조선인들로 구성된 여단이었죠.
부관이라 행정일이 많았을 것으로 예상되긴 하나...
실제로 단장이 직접 전투를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니, 부관이 따로 부대에 쳐박혀 있었을 리는
만무하고, 박정희씨도 전투에 참여했을 것으로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전투기록 형태의 자료가 남을 수가 없는 것이.. 시기도 시기려니와, 보통 그런류의 기록들은
누가 지휘하는 몇연대가 총병력 몇명으로 적 누구누구가 지휘하는 사단과 싸워 어쩌구 저쩌구 식의
기록이기 때문에... 박정희씨 정도 지위의 군관은 기록에 이름이 남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참고로 친일규명위가 친일군장교에 대한 판단잣대로 삼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박정희씨의 경우 해방직후 일본장교 예편시 최종직위가 만주군 중위 였으니...
직제에 대한 요건은 해당하고, '적극' 이라는 표현만 부합하게 되면 친일인사로
규명되는 상황인 것이죠...
현재로선 산적한 이견들의 다툼을 보건데 아직도 몇년은 더 있어야 해결될 문제라고 판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