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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링크 )
The economy had been subject to a wide variety of Government controls which limited the development of free market forces and contributed to instability in portions of the industrial sector.(이전 페이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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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AMERICAN ECONOMIC RELATIONS: 1961-63
한-미 경제적 관계들:1961-63
1961년에 박정희가 권력을 잡았을 때, 경제적 정책들은 변화되었다. 경제적 성공을 위한 필요조건으로써의 재통합에 촛점을 맞추기 보다는, 박은 독립적 경제 발전의 긴 범위의 전략을 채택했다. 그는 그의 정치적 정통성의 머릿돌과 대중적 지지의 열쇠로써의 경제적 절차를 바라보았다. 경제적 성장은 그의 정부의 다른 목표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 목표는 미국에의 의존에서 벗어나서 자급자족의 국가경제를 향해 이동하는 것이었다.
박 정권은 1962년 1월에 1차 계획을 발행했다. 그것은 장면정부에서 만들어졌지만 실행되지 못했던 계획이었다. 그 목표는 빈약하게 한정됐고 과도히 야심찼지만, 그 계획은 몇몇의 국가적 목표를 수립했고 정부가 몇몇의 긍정적 행동을 취하도록 이끌었다. 예를 들어서, 매우 높은 비율의 통화확장을 통하여 1차 계획은 자본 형성의 증가와 외국 원조에의 의존의 감소를 불러냈다.
그 계획은 다음에 뒤따르는 것들에 대해 전혀 조심스럽지 않았다: 가뭄, 하이 인플레, 금융 스켄들, 그리고 개입된 정치권력의 통합의 필요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 지배의 기간동안 ,특별히 1963년에, 경제적 조건에서 약간의 분명한 개선을 보았다. 박은 경제적 계획 과정에 많은 전문가들을 대려왔다. 1차 계획은 현실적 수준으로 수정되었고, 정부는 1961년과 1962년의 통화 확장의 결과에 따른 한바탕의 하이 인플레이후 금융적 균형과 함께 더 큰 고려를 보여주었다. AID와의 의견일치로, 박은 수입대체 전략은 한국의 장기적 관심사가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경제적 성공은 상당한 숫자의 실업자들과 불완전 고용된 사람들을 사용할 수 있을 노동-집중적인 공업들에 기초한 수출-주도경제의 추구에 의해 더 잘 성취될 수 있었다.
평가: 당연하게도 당시 장면 정부는 이승만 정부의 잘못을 고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장군이 나타나서 그 계획을 가지고 어찌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장면이 만들고 박정희가 추진한 1차 계획은 몇가지 빼고는 쓸만한 계획이 아니었고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합니다. 수입대체전략에서 노동집약적 수출주도경제로 바꾸자고 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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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정부의 수입대체산업화 경제개발계획을 상당부분 참고하고 초반에는 이대로 밀어붙이려고 했지만 곧 잘못된것을 깨닳고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정책으로 선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