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6월 25일 부산의 충무동 광장. 이승만 대통령이 단상에서 연설을 하는데 뒤에서 한 노인이 왼손을 치켜들고
있다. 이승만 암살 사건의 암살 미수범은 안동 출신의 62세 유시태였고, 그가 암살을 할수있도록 도와준 이는 국회의원 김시현이었다. 유시태와 김시현은 일제강점기 가장 치열한 항일 무력독립운동 조직인 의열단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였다.
그들은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는 의열단의 기치에 따라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인 이승만을 응징하려 암살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승만을 향한 유시태의 권총은 결정적 순간 고장으로 발사되지 못했다
<영화 밀정과 암살에 등장한 독립운동단체 의열단>
광복이후 친일세력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에 이해 설립된 반민특위는 친일파들과 그배후에서 이들을
비호한 이승만 정권의 방해 공작에 무력화되어 해체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를 무력화 시키기
위해 공소시효를 대폭 단축 시키는등 끊임없는 법개정과 예산의 대폭 삭감. 사업비를 지급하지 않는등
정부기관의 기본 자료 제출조차도 거부했고 1948년 5월 18일 악명높은 친일파 고문경찰 노덕술과
일제경찰 출신의 무리들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 특위 활동을 중단 시키고 무장을 해제시켰다.
이후 김약수 국회부의장과 노일환 의원등 반민특위 핵심 관계자들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 라는
혐의를받고 체포되었고 6월 29일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되며 반민특위는 이승만정부의 의도대로 해체수순을 밟아나갔다. 이로서 우리민족의 지상과제였던 친일 청산작업은 허무하게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며 친일 세력은 그대로 친미주의로 갈아타며 이승만 정부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비협조와 방해로 오히려 친일 세력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나아가 이들이 한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였다. 이 때문에 사회 정의가 무너져 사람들의 가치관이 혼란에 빠졌으며, 사회에 이기주의와 부정부패 등이 횡행하는 토대를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