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년 전, 돈 없고 궁핍했던 나는 한 개인 홈페이지에 업로드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다운 받아, 마치 우연히 손 안에 만원이라도 쥔 것처럼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대학 입학도 실패했던 나에게, 이문열의 삼국지, 세계 문학 전집, 가즈나이트 따위에 열광하던 나에게, 내 호구도 감당 못하던 나에게 어디서 그런 지적 열망이 나왔겠는가? 와레즈 싸이트를 뒤져가며 게임에 몰두하던 한심한 날 잡아주고, 멍청한 나에게 그 내용이 무엇이든(정치 성향이든 뭐든) 세계를 알고싶은 지적 충동을 불러 일으킨 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보다 10살 이상 어른인 사람들이 그것을 읽고, 그것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논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아직 기존 문화를 컴퓨터에 옮겨 오는 수준에 불과했다. 네이버-다음같은 포털이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전, 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는 소스를 이용해 개인 도메인을 건 홈페이지를 운영했고, 그 홈페이지는 오프라인에서 향유하던 문화를 인터넷으로 확장되는 경로가 되었다. 그렇게해서 살아남은 싸이트가 오유와 디시인사이드. 지금에야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압도하고 있다지만, 당시에는 온라인의 그 방대한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오프라인 지식을 채워넣어야했다. 즉 기존 세대의 문화와 의식과 사고가 온라인에 투영되고, 그들이 향유하던 것들이 온라인을 수놓고 있었던 것이다.
옛 것과 현재의 것이 중첩되어 쌓아 올려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용해되어 여러 방향으로 뚫고 나오려고 기를 쓰고 있었던 거 같다. 그 한 가운데 최초의 온라인 정치 운동이라던 안티 조중동이 있었다.
여러분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안티 조중동이란 싸이트는 과거와 현재가 뜨럽게 녹아, 인터넷 논객이란 새로운 형상을 만들던 용광로, 가마 터, 거푸집 같았다. 진중권이 댓글로 논쟁을 하고, 강만준이 누굴 지지해야하냐며 으르렁대고, 유시민이 언론은 뭐냐며 윽박지르고, 양신규같은 지식인들이 위대한 지적 논쟁을 이끌어내고, 그들의 모습을 신화의 한 페이지로 바라보던 어린 난, 그들 아저씨들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난 충동에 사로잡혀 유혹되어졌다.
뭔가 토하기 위해선 뭔가 채워 넣어야하는 건 인지상정. 위대한 논쟁들이 여기 저기서 생길 때, 글 하나, 글 둘을 쓰면서 오늘은 어떤 지적 농담을 외삽할까 따위의 것들을 고민할 때, 세계에 대한 나의 태도와 싸가지를 생각할 때, 난 학질 걸린 몸뚱이처럼 부르르르 떨며 고통스럽게 먹고 뱉어내고를 반복해야했다. 동시에 그건 희열..
어린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배운다. 난 어른을 보고 배웠다. 요즘 어린 아이들은 누굴보고 배울까.
정치를 이야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제 인터넷이란 공간은 시대가 중첩되어 '어떤 것'이 되기위해 몸부림치던 그 시절의 인터넷이 아니다. 젊은이들은 점점 더 개개인의 자폐적 쾌락을 탐닉하게 되었고, 그들은 어른으로부터 뭔가 배우지 못한다. 무엇이 되겠는가. 무엇이.. 줄 끈어진 연처럼 세계는 허둥대고 있고, 진화는 거듭되지 않고, 지식은 퇴화되고 있고, 누굴 엿보며 충동해야했던 이데아도 사라졌다. 진중권은 트위터질하며 욕먹고, 블로그를 만드는 건 돈벌이에 불과하며, 손 안에 마르크스는 말하지 않는다.
시간은 면면부절 도도한 흐름을 만들며 흘러간다고 했나? 하지만 과거로부터 자신을 일깨운 마지막 세대. 그 도도한 흐름이 기름진 땅덩어리, 풍요로운 어장을 형성하던 시절은 지나가고, 기껏해야 웹 모바일 게임과 사사로운 쾌락들에 지배되는 세대, 그 시간이 단절된 세대를 우리는 감당하지 못 할 것이다. 바로 그 세대는 과거를 온전히 지켜 전해주지 못했던 너희와 나의 책임이 될 것이기 때문에..
무엇도 안 될 판에 마르크스가 무슨 상관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