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이라 생각하여 올려봅니다.
악을 최소화하는 방법 - 민주주의
(전략)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은 가장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여 많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사악하거나 거짓말을 잘 하거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지극히 무능하거나 또는 그 모든 결점을 지닌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이며 강점이다. 권력자가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권한범위 안에서 합법적 수단으로만 통치하도록 하는 법치주의, 언론·출판·사상·표현·집회·시위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은 법률로도 그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도록 한 헌법, 입법부와 사법부를 행정부와 분리하여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도록 하는 삼권분립, 감사원과 국가인권위원회 등 국가권력의 오·남용을 예방하고 시정하는 일을 주된 임무로 하는 독립적 국가기관 설치, 복수정당제와 같은 제도화된 권력분산과 상호견제 장치가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핵심이 된 것은 모두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국가가 선을 행하는 것도 동시에 방해한다. 설혹 플라톤이 왕으로 세우려 했던 현자가 대통령이 된다 할지라도, 그는 자기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국회와 헌법재판소, 언론과 정당 등 다른 권력기관들을 사악한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홉스와 마키아벨리를 추종하는 인물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역시 만사를 자기 마음대로 하지는 못한다. 다른 권력기관들을 전투적 자유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가 장악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훌륭하고 지혜로운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선한 일을 많이 할 수 없게 만든다면 이는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마음대로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대가로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부작용이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이러한 강점과 약점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민주주의 그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민주주의가 최선의 인물을 지도자로 뽑아 최대의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경우, 민주주의는 자칫 '다시 실망하기 위해서 매번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비극적 이벤트'로 전락할지 모른다. 뽑아놓은 지도자가 알고 보니 최선의 인물이 아니었다거나, 선하기는 하지만 능력과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실망하게 되고, 그래서 대중이 선거 자체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잃게 되면,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교묘한 위선으로 잘 무장한 최악의 인물이 달콤하지만 실현할 수 없는 약속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는 중우정치(衆愚政治)로 타락할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결점 때문에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후략)
- 국가란 무엇인가 中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