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머나먼 유배지였던 제주도는 해금법으로 입출도 조차 자유롭지 못한 섬이었습니다.
그러다 1923년 제주 오사카간 직항로가 개설되자 일제식민통치시대의 수탈을 이기지 못해 다수의
제주도민은 가난과 절대적 빈곤상태를 탈피하기 위해 대거 일본으로 이주하였고 지속적으로 많은 수가 도일하였는데
그수가 무려 제주도민의 30프로 정도인 5만여명이 넘었다고합니다.
광복후 1947년 1월 11일 서귀포 법환리 출신 재일 동포들이 고향 마을에 전기를 가설하기 위해 [복시환]이라는 선박에
기증한 자재를 싣고 오던 중 경찰 당국에 의해 밀수선으로 적발되고 이들에 의해 모리의 대상이 됩니다.
당시 제주사회는 6만여명의 귀환자들로 인해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 여러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로 인한 극심한 혼란상황과 더불어 친일경찰이 군정경찰이 되어 군정관리들과 작당하는
모리행위까지 일삼던터라 제주도민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죠.
결국 경찰의 3.1발포사건을 계기로 이러한 사회적 혼란은 민중혁명을 노리던 남로당의 좋은 먹이감이 되었고
한국전쟁이전 발생한 이사건은 1954년까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