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연수원에
사상 최초로 대학의 동아리에 가까운 노동법학회등 각종 학회가 구성되고, 대학생들의 농활을 본 따 ‘무변촌 법률봉사활동’을 기획하다가 연수생
전원이 한명씩 불려가 ‘너희들은 대학생이 아니라 공무원’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야 했다. 결국 사법연수원에서 제적될 수도 있는
대형사건을 치고 말았다. 대법원장임명 문제를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 열린우리당의 문병호 의원등과 몇 명이 신림동의 여관방에 모여 사법연수생
집단서명을 모의했다. 신림동의 여관방에서 밤을 세워 집단모의를 한 후 민태식변호사와 함께 성남의 우리집으로 와 4벌식 수동 타자기로 사법개혁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작성했다. 다시 모인 우리는 실무수습을 나간 연수생들을 법원과 검찰을 찾아다니며 서명참여를 설득했고, 종로의 어느 음식점에
모여 서명을 취합한 후 이를 언론에 공표하는 무모한 일을 감행했다.
아무리
세상이 폭발적으로 변하는 시기라고는 하지만 공무원의 신분으로 집단행동과 정치개입이 금지되어 있었고, 더구나 수습시기에 있는 학생의 신분이었으므로
문제를 삼으면 제적은 물론 집단행동으로 형사처벌도 감수해야 했다. 대중의 생명을 건 투쟁으로 온 사회가 커다란 역사의 변곡점을 넘어가는 힘겨운
시기에 나의 미래와 안위를 위해 외면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정부는 사회의 노도와 같은 요구를 점진적으로 수용할 태세였으므로 연수생들의 요구도
대부분 받아들이게 되어 누구도 징계외 제재를 당하지는 않았다. 이 역시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미 내친 걸음에 한걸음 더
나갔다.
우리는
연수원측의 제지로 ‘무변촌 봉사활동’을 포기하는 대신 각종 운동단체에 지원을 나가기로 결정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나는 처음에 성남
YMCA의 시민중계실에 상담원으로 지원을 나오면서 당시 빈민운동가 이상락, 건설노동자 이태영, 이용원 총장등을 만났다. 다음으로 서울 종로구에
있던 ‘석탑’이라는 노동운동단체에 노동법상담역으로 자원봉사를 나갔다가 결국 이들중 일부가 성남에 '일터' 라는 노동운동지원조직을 만들 때
변호사개업을 준비하며 이들과 함께 참여했다. 존경하는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 자원봉사를 나가면서 박석운소장과 박주현 변호사, 김선수 변호사를
만났고, 이분들로부터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7)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다
연수원에
입소한 후 바른 의식을 가진 동료들과 비밀스런 모임을 가지며, 나는 역동성이 있는 변호사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고, 앞으로 지역운동이 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100% 받아들여 성남에서 개업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나이도 어리며, 중고등학교조차 나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경력이라고는 남의 이름으로 공장노동자 생활을 한 것이 전부인 내가 과연 변호사로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 문제였다. ‘공부
못해서 변호사 개업했다’는 말 듣지 않으려고,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사라도연수원의 시험공부도 열심히 했고 현직임용이 가능한 나름대로 괜찮은
성적을 얻었다.
안동에서
검찰시보생활을 하면서 마약사범과 퇴폐사범을 단속하고, 허용범위내의 수사를 진행하며 검사직에 많은 매력을 느꼈고 변호사 개업을 하겠다는 마음이
일시적으로 흔들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4개월의 검사시보생활을 마치고 상경할 때쯤 안동에서 처음 시보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어떤 사람으로부터
‘처음에 볼 때하고 달리 사람을 노려보고 추궁하는 듯이 보여 섬뜩할 때가 있다’는 말을 듣고 검사지원을 영원히 마음속에서 지워버렸고, 안동지청의
시보를 마치고 책보따리를 싸들고 나오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정적인 판사생활은 체질에 맞지 않았고, 결국 개업을 하기로 확정하였는데 문제는
예상되는 가족들의 반대와 과연 변호사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연수원시절
‘기모임’에서 변호사개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해 변호사에 대한 일반시민들의 의식을 조사한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시민들의 변호사에 대한 이미지로 첫 번째가 돈이 많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사기꾼이다 라는 것이었으며, 인권옹호에 도움을 준다는 항목은 네
번째 였으며,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무려 70%를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황인철 교수는 최고의 고객층은 한번 상담을 하거나 소송을
의뢰해서 좋은 결과를 얻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사기꾼이 되지 않고, 돈만 밝히지 않으며, 성실하게 상담을 해
주고, 질 사건을 수임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말씀들은 하지 않지만 집안에 ‘판검사’ 한번 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
가족들, 특히 어머니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였다. 사회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평생 헌신해 온 어머니에게
차마 ‘성적은 되지만 판검사 임용을 포기하고 사회운동을 하기 위해, 내가 겪은 험한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변호사 개업을 하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가장 나쁜 방법을 선택하고 말았다. 어느날 나는 어머니에게 “성적이 부족해 판검사 임용이 불가능하다”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지금은 어느정도
눈치를 채고 계시지만 언제 날을 잡아 어머니께 거짓말을 한 것을 사죄드려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아직도 하지 못하고 있다. “굶어죽는 변호사 못
봤다”는 말에 기대를 가지고 무모함을 발동해 1989. 3. 연수원동기와 성남시청앞에서 공동으로 개업을 했다. 은행과 신용금고를 찾아다니며
대출을 받으려고 하였지만 나이 27살(호적으로는 25살)의 미혼 청년에게 돈을 빌려 주려는 곳은 없었다. 마이너스 대출 500만원과 돌아가신
조영래 변호사님의 소개로 국민은행에서 빌린 500만원으로 어찌어찌 개업은 했지만 앞길은 암담했다. 그러던 중에 첫 번째 사건을 맡게 됐다.
형사사건이었는데 그 내용이 참 기가 막힌 것이었다, 어떤 종교단체에 가입한 아들이 종교단체의 의식을 집전하는데 필요한 돈 3,00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친구인 동료신도와 함께 짜고 자기가 납치당한 것처럼 위장하여 아버지를 위협해 몸값으로 돈을 받은 사건이었는데, 자식은 아들이라는
이유로 방면되고 친구가 구속되게 되자 아들이 시청앞에 있는 내 사무실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자기들은 지금은 돈이 없고, 우선 구속영장을 기각해주면 150만원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형사사건 수임료가 얼마쯤인지도
몰랐는데 그가 제시하는 금액은 매우 큰 금액이었다. 형사사건은 수임료를 미리 받지 않으면 나중에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던
나는 그의 말을 믿고 나름대로 성심성의를 다해 변론을 하여 구속영장이 기각되었는데, 그들은 그 이후로 종무소식이었고, 이후 이들의 행방은 지금도
알지 못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은 일부러 초짜인 나를 찾아와 사기를 친 것으로 보이는데, 27살의 갓개업한 무경력의 애송이 변호사를
찜쪄먹은 그들과 그에 대한 어린 나의 모습이 우습게 회상된다.
1989년
개업해부터 그 다음해까지 수입은 없었지만 하여튼 일거리는 무지하게 많았다. 지역운동을 하겠다고 성남에 개업을 했으니 지역의 현안을 내몰라라 할
수 없었고, 사람들은 변호사도 변호사 나름이고 빛좋은 개살구라는 사실은 모른채 요구사항은 엄청나게 많았다. 사무실 1층에 있던 생맥주집의
10-20만원의 외상갚도 제대로 갚지 못하면서 좌우간 하는(?) 일, 아니 쫒아다니는 일은 무지하게 많았다. 집회현장의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될 것 같은 이상한(?) 목사님들과 어울려 화염병을 싣고 날랐고, 가끔씩 시위가 격화되면
한두개씩 투척하는 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시위할 때는 시위대였고, 시위가 끝난 후 또는 시위대가 체포된 때는 노상변호사였다.
화염병투척혐의자가 체포되면 파출소에 쳐들어가 증거제시를 요구하고 형사소송법, 불법체포를 운운하면 당시 경찰은 대부분 시위대를 놓아 주었다.
당시는 변호사가 아주 귀해서 보통은 검사, 판사급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지, 파출소의 순진한 경찰관들은 아마도 처음으로 파출소에 찾아온
변호사의 존재를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였을 것이다...
1989년
말경으로 기억된다. 미상공회의소를 점거하고 제과 구속을 당한 후 구로등지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친구와 함께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이 문제를
포함해 동료변호사와 약간의 이견이 있어 동업관계를 청산하고, 용감하게도 법원앞에 단독 사무실을 개업했다. 약 1년의 시간이 지나며 작은
사건이지만 수임사건이 있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어느정도 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독자적인 활동과 판단이 필요하기도 했으며, 함께할 친구의
자리도 필요했다. 혼자 사무실을 얻은 후부터 본격적으로 노동현장 지원활동에 나섰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해 밤에 비밀리에 만나는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자정이 넘은 시간에 3공단의 공장담을 넘었고, 최루탄연기 가득한 길에서 노동자 시민들과 함께
했다.
수십명에
이르는 구속시민과 노동자들에 대한 무료변론활동에도 많은 시간을 투여했지만 노동자들의 억눌렸던 욕구가 분출하던 시기에 좀더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을 위해 1991년경 안양로 선배 등과 함께 이천상담소를 개소하고 매주 월요일에 노동상담을 위해 이천에 출장을 다니기도 했다.
광주노동상담소의 개설과 운영에도 참여하였고, 분신노동자의 시신을 지키며 병원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밤을 세웠다. 노동상담역으로 함께 일하게 된
친구외에 세상의 거친 풍랑을 피해온 연성만 선배 2인이 노동상담역을 담당하면서 사무실이 의뢰인이 아닌 노동자들로 북적이기도 했다. 노동자의
단결과 최소한의 기본권 확보가 어느정도 이루어지면서 노동조합결성 지원, 노동문제 상담은 노동단체와 노동조합이 어느정도 자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게
되면서 나의 역할에 어떤 변화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http://cafe.daum.net/finding10/fqjE/183?q=%C0%CC%C0%E7%B8%ED%2C%20%BC%BA%B3%B2%BD%C3%C0%E5%C0%CC%20%B5%C7%B1%E2%20%C0%FC%20%BB%EC%BE%C6%20%BF%C2%20%B3%AF%B5%E9..%20%C0%DA%C7%CA%B1%E2%B7%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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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부는 모르겠고, 처음 검색해봤는데도 나오는데 왜 찾기 어렵다고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