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구조 조정 요구, 예상보다 ''가혹'' |
부실 금융기관 정리 강력 요구…2.5% 성장 등에 최종 합의 |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에 대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조 조정 요구가 당초 예상보다 가혹해 협상이 막판 진통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정치권과
재계는 사실상 이와 상충하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어 긴급 자금 지원이 확정된 후에도 파란이 예상된다.
한국 정부와 국제통화기금
협상단은 일단 저성장과 초긴축이라는 거시 경제 운용 방향에 대해서는 합의한 상태다. 그러나 일부 조건에 대해서는 이견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최종 합의안 발표일로 예정되었던 12월1일 임창렬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은, 필리핀에서 열린 ‘아세안+6’재무장관 회의에 참석한
국제통화기금 미셸 캉드쉬 총재와 직접 전화 통화를 해 교착 상태를 풀어보려 했으나 불발로 끝났다.
양측 의견이 가장 엇갈리는 부분은
부실 금융기관 정리 문제. 11월19일 발표된 금융안정종합대책에 따르면, 정부는 종금사는 내년 1월, 은행은 3월, 그밖의 금융기관은 6월까지
실사 작업을 벌인 후 처리 방침을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 협상단은 이런 방침이 지나치게 안이한 것이라는 입장을 보여 왔다. 이에
따라 국제통화기금 협상단은 일부 부실 종금사와 은행을 파산시키라고 강력히 권고하기 시작했다.
대출금 회수 유예, ‘악재’
가능성
국제통화기금은 또한 2%대의 저성장을 권고해 왔다. 은행 파산으로 인한 금융 혼란과 대량 실업을 우려하는 정부는 두
가지 요구 조건에 대해 국제통화기금의 양보를 끌어내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자칫하다가는 우리 정부가 대외 결제 불능 상태에 빠질 우려가 있어,
국제통화기금의 요구 조건을 모두 수용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일부 금융기관 정리는 국내 금융 시장의 자금난을 더욱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금융기관 차입금이 많은 일부 기업의 도산이 불가피해진다.
국제통화기금과 한국 정부, 재계의 상황 인식과 대처
방법이 크게 엇갈리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지난 11월29일 일본 대장성을 방문해 자금 지원을 확약받고 돌아온 임창렬 경제부총리 겸
재경원장관은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기자들로부터 국제통화기금이 은행을 정리하거나 재벌의 차입 위주 경영을 혁신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해 임부총리는 “국제 금융계를 안심시키고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도 그런 일을 하는 게 필요하다”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그
후부터 줄곧 금융기관과 기업의 강도 높은 구조 조정을 역설해 오고 있다.
그러나 재계는 정부가 일단 기업의 숨통부터 터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11월27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30대 기업 기조실장 회의를 열어 김영삼 대통령에게 대출금 상환 만기 연기와 같은 특단의
조처를 건의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재계는 이와 함께 경제 위기의 책임이 상당 부분 금융실명제에 있다고 보고, 이를 전면 유보하라고
요구했다.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둔 정치권은 재계의 이런 요구에 화답하고 있는 형국이다. 한나라당·국민회의·국민신당 등 3당
후보들은 모두 공개적으로 실명제 유보에 찬성한다는 뜻을 밝혔다. 또한 3당은 11월30일 총무회담을 갖고 실명제 유보 문제를 포함해 대출금 회수
유예 등 재계의 요구를 논의하기 위해 임시국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문제는 재계와 정치권의 이런 움직임이 국제통화기금을 비롯한 국제
금융 시장에 경제 개혁을 거부하는 퇴행적인 움직임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업에 대한 금융기관 대출금 만기 연장 조처는 금융기관에 엄청난
부담을 안겨 주어 시급한 부실 금융기관 처리에 악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상당수 경제 전문가들은 실명제 유보가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제고하라는 국제 금융 시장의 요구와 배치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92쪽 경제 시평 참조). 결국 재계와 정치권은 아직도 현재의 경제 위기가 개방
시대 산물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제화 시대의 냉엄한 현실 논리가 있다면, 그것은 국제 금융 시장이 결코 부도 위기 국가의
몇몇 금융기관이나 기업의 눈물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