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首유 치 환 십이월의 북만(北滿)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黑龍江) 말라 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비적(匪賊)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寒天)에 모호(모糊)히 저물은 삭북(朔北)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율(律)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계구(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除)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 온 피의 법도(法度)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험렬(險烈)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명목(瞑目)하라 ! 아아 이 불모한 사변(思辨)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이 시들을 보면 동북연군 빨치산 대장 허형식이 생각난다.
허형식은 서대문형무소 앞의 왕산로의 주인공 왕산 허위 선생의 손자쯤된다.
허위 선생은 13도 창의군 대장으로 대한제국시절에 지금으로 치면 법무부 차관쯤 하다가 낙향한이후 1907년 13도 창의군 대장이 되어서 서울 진공작전을 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 1호 사형수 되신분이다.
허형식이나 허위 선생은 지금은 경북 구미시 사람인데, 박정희 대통령과는 거의 같은 동네 사람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동네 형뻘인 허형식은 북만주 빨치산 대장중에서 가장 혁혁한 공로를 남겼다.
사실 북한에서 허형식을 부각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김일성이 했다는 전공중에 허형식이 한일도 많고, 김일성 김책 같은 이들이 사실 허형식의 동료나 부하로 볼수 있기때문이다.
허형식은 일제의 대대적인 북만주 토벌작전때 밑에 있던 김책 김일성은 소련으로 보내고 자기는 끝까지 북만주에서 싸우다가 일본군 총맞고 사망하고, 시체는 머리가 잘려서 효수되었다.
안동 출신인 이육사도 허형식과는 외가쪽으로 친인측이다. 이육사가 광야라는 시에서 초인은 백마를 잘 타던 허형식을 말한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통영출신의 유치환의 수 라는 시는 유치환이 만주에 있을때 일본군에 의해 효수된 머리를 보고 지은시인데, 시기적으로 1년 2년쯤 차이가 나기는 한데, 허형식의 효수와 연관되어서 뭔가 아련하다.
누군가 박정희가 만주군에서 동북연군 독립운동하던 사람들 토벌에 앞장섰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도 사실 연도상 차이가 난다. 허형식은 1942년 죽었고, 그후 만주에 항일운동 독립군은 사라졌다고 보인다.
박정희가 만주에서 소위하던것은 1945년으로 보인다.
어찌되었던
공산주의 자본주의 일본제국주의 피지배민족의 젊은이, 그리고 전쟁...
참 다사다난한 시절이었구나 하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