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공산주의자의 준동때문
대한민국 건국 당시 유라시아 거의 대부분 국가에 공산국가가 세워지고 있었음
그 당시만 해도 전체주의와의 싸움에서 막 승리했던 시기였기에 미국은 공산당 세력의 무서움을
모르고 있었음
이승만 대통령만이 홀로 공산당의 사악함을 깨닫고 공산당과의 전면 전쟁에 돌입함
그래서 경찰 경험이 많은 친일 경찰을 중용한 것임
당시 독립운동가 출신인 경무부장 조병옥도 기꺼이 친일경찰을 중용하는데 동의함
그 당시 공산세력이 얼마나 준동했는지는 위키백과에 나와있음
하루가 멀다하고 소요와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거의 소탕함
만약 이때 남로당을 소탕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6.25전쟁에서 패배했을 것임
지금도 좌빨들이 이렇게 준동하고 있는데 하루빨리 처단하지 않으면 제2의 6.25를 맞이하게 될 것임
좌빨들하고는 대화가 안통함. 소탕시켜야 함
해방정국에서 좌빨들의 반란 사건들
1. 1946년 10.1 사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미군정에서 '공산당 활동 불법화'를 공표함과 동시에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림
공산당은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1946년 9월에 대대적인 파업을 벌였는데, 이것이 9월 총파업
9월 총파업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가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음 대구지역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자 이에 대한 항거로 발전하게 됨
- 대구지역 반란 -> 경북지역 반란 -> 경남지역 반란 -> 충청지역 반란 -> 서울,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지역 반란 -> 전남, 전북 지역 반란
2. 1947년 제주 4·3 사건과 남로당
1948년 남로당의 김달삼 등이 5.10 총선거와 남한 단독 정부수립 반대 등을 내세우며 경찰에 대해 무장봉기하여 상호 간의 교전이 발생했다.
미군정 측과 조병옥 경무부장(일제강점기 신우회 회원, 신간회 재정부장, 총무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등이 이에 강경론을 주장했다
동년 10월 정부 측이 파견한 군 병력이 대대적인 소탕 작전에 돌입하면서 최대 수만 명에 달하는 제주도민들이 살해당하고 중산간 마을의 95%가 방화되었다.
3. 1948년 2·7파업과 남로당
남로당은 강경투쟁으로 전환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투쟁이 바로 민설에서 주도한 2·7파업이다. 1948년 2월 7일 아침,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은 통신과 운송설비의 가동을 중지시키면서 총파업에 들어갔다.
4. 1948년 여순 14연대 반란사건과 남로당
대한민국 국군 14연대의 인사계 상사였던 지창수가 14연대를 이끌고 봉기하여 여수시와 순천시 일대를 장악했다가,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으로 들어간 사건
10월 27일 반란사건이 완전히 진압된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남로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수천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여순 반란 공모자로 몰려서 살해되었다. 이후 남로당은 사실상 소멸 상태에 이르렀다.
남로당이 대한민국 내에 주도한 여러 파업과 폭동, 반란사건과 그 이후 이어진 한국전쟁을 겪은 후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을 제정, 대한민국 내 모든 공산주의 세력을 국가보안법에 의거해 공권력을 이용해 축출하였다.
빨치산은 1964년까지 활동하다가 소멸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