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를 폐기한 제헌헌법
헌법을 처음 만들 당시 한국에는 이렇다 할 헌법 전문가가 없었다. 당시 보성전문학교 공법학 교수였던 유진오는 “한국에 있어서 유일한 공법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진오는 미군정의 조선인 기구인 남조선과도정부의 법전편찬위원회, 한국민주당, 이승만의 영향 하에 있던 행정연구회 등 “5ㆍ10선거를 추진하던 3대 세력 전부로부터 단일헌법초안 작성을 부탁”받게 되었다. (<헌법주체회고록>: 10~31) 제헌국회는 유진오로부터 제안 설명을 듣고 그가 작성한 헌법초안을 토대로 한 조항 한 조항 축조 심의해가며 제헌헌법을 완성했기에 유진오가 쓴 <헌법해의>는 제헌헌법에 관한 독보적인 권위를 갖는 해설서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정부의 초대 법제처장이기도 했던 유진오는 법제처장 재임 중 발간한 <헌법해의> 초판에서 제헌헌법의 경제조항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경제문제에 있어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했다고 설명했다. 이 놀라운 표현은 수정판인 1952년의 <신고 헌법해의>에 가서는 “개인주의적 자본주의국가 체제에 편향함을 회피하고 사회주의적 균등 경제의 원리를 아울러 채택”한 것으로 완화되기는 했지만, 제헌헌법에 따른 대한민국의 초기 경제질서가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를 따른 것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현재 한국의 ‘애국보수’들에게는 참으로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제헌헌법이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깜짝 놀랄 정도로 급진적인 색깔을 띨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를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이행기의 특수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막대한 적산은 우익으로 하여금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물질적 양보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일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이익분배균점권을 강력히 주장한 문시환이 “해방 후에 우리가 경제 상태는 노자와 협조될 수 있는 큰 중요한 원인”으로 적산을 꼽았다. 이는 단독정부 수립 전후 정치엘리트들이 정치적으로 격렬했던 계급투쟁을 경제에 대한 국가기구의 계획과 통제를 통해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불행하게도 제헌헌법이 갖고 있었던 진보적인 조항도 현실에서 구체화되지 못했으며, 제헌헌법을 만든 의원들이 공유하고 있던 낙관적인 예상도 실현되지 못했다. 바이마르 헌법이 추구한 사회국가의 영향을 받은 유진오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대한민국 경제질서의 기본으로 규정했으나, 신용옥이 지적한 것처럼 “‘사회정의’로 표현된 사회국가의 이념을 뒷받침할 주요 기제들이 삭제되어 허구화”되었다. (신용옥: 37) 유진오는 1949년 6월 23일 헌법안 제1독회에서 제헌헌법안에 대한 제안설명에서 “이 헌법의 기본정신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와의 조화를 꾀하려고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경제민주화’는 사실 60여 년 전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를 출범시킬 때 그 구성원들과 맺었던 지켜지지 않은 오래된 약속이었다.
역사와 책임 (한홍구 역사논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