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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시정부때 김구와 박정희의 만남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그때 김구는 박정희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던것 같습니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뭔가 시험을 해보았던거 같아요
역사란게 아이러니하기는 하죠
백범 김구.이순신.등은 박정희 덕분에 영웅이 되었다고 봐야죠.
사실 그 이전에는 일반시민들은 이 분들에 대해 잘알고 있지를 못했어요.
알았어도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고 있지는 못했죠.
김구는 우에서는 김일성등 빨갱이와 내통했다며 좌로 몰리고
좌에서는 극우로 몰리는 수난을 당했죠
백범일지는 김구가 쓴게 아니라 춘원 이광수가 각색했다라는 주장들이 있죠.
김구의 노선은 갈짓자 행보였는데 반소.반공.반택.ㆍ등등..뮈 이당시의 위인들이 이념으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던건 이분만은 아니죠
시대가 그러했으니까...어는게 옳은건지 판단이 불분명한 시대였지않습니까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했는데 임시정부 정통론이었죠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정적제거작업도 망설이지 않았죠
그의 아들 김신이 5.16에 공신인 점도 있고..
해방이후에는 그러했겠죠.국민들의 지지가 있었고.그렇긴해도 이미 터전을 잡은 세력들에 의해 기댈곳이 없는 처지로 빠졌고..북한은 김일성이에게 조아렸다.라고 하여 김구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 이후로는 별로 영향력이 없었고...
김구를 복권시킨건 분명 박정희였다.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는 이승만보다 김구를 높게 평가했고.이승만이 사망할때까지 그의 귀국을 거부했죠.
박정희는 임시정부요인들에 격찬을 가했고.건국훈장을 수여했죠.
역사의 아이러니란건 바로 이점인데 김구는 진보의 아이콘.박정희는 보수의 아이콘이라는 점이죠
개인적으로는 박정희를 존경합니다.비판받을 부분이 없지 않으나 청년시대때의 만주국에서의 군생활.혹은 남로
당 가입같은건데 .
시대의 혼란스러움을 들어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어요
박헌영.여운형같은 이들이 사회주의를 신봉하다 숙청당하고.숱한 지식인들이 그길을 따라갔다라는건 판단이 그
만큼 불분명한 시대였다.라는 거겠죠
일제 식민지 때는 일반백성들이 조국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이 있었을까
솔직히 그조차도 의심스러운데..현실을 들여다보면 양반.상놈으로 신분제가 엄격했고.천민은 그낭 죽을때까지 천
민으로 살아야 했었고.게다가 봄이면 보링고개로 풀뿌리죽도 먹지못해 소나무껍질을 벗기고.산은 전부 민둥산에.
어떤 기분이었을까요.북한의 주민들이 조국을 버리고 탈북을 한다.당시의 조선사회가 더 나았을까요.
500년의 조선사회에서 기득권은 쌓이고 쌓여서는 민중은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었는데요.
독립운동은 그나마 기대할게 있었던 그 사회의 기득권층들이 아니었을까.한쪽의 기득권은 일제와 부합하여 이득
을 챙기고.다른 쪽의 기득
권은 그것으로 부터 밀려나서는 독립의 길을 걷게된..결국 일반백성들은 아무래도 좋았을..
왜냐하면 일본군 1000명 모집하면 2.3000명이 지원을 하고 했었던게 현실이니까요
그런 시대에서 박정희의 젊은시절의 과오를 그 사람자체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친일파는 사실 당시의 야당인 한민당(박정희 때엔 민주당)
이었죠.친일파들이 주축으로 해서 만들어진 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5.16으로 친일파를 척결했다라는것도 동감합니다.
인터넷이란 공간이 가지는 허약함? 취약점 가운데 하나가 이겁니다.
1-2%의 글 잘쓰는 논객이 여론흐름을 이끌거나 특정한 글 하나가 진실을 왜곡하고 호도하기도 하죠.
2004년 여름 반민족행위 친일진상규명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됩니다.
이 개정안이 정치권과 언론을 발칵 뒤집었던 이유는 친일조사대상을 언론을 포함한 것과 중위에서 소위로 변경한 내용 때문이었죠.
이를 두고 당시 야당(한나라당)은 박정희를 타켓으로 하여 박근혜 대표를 죽이기 위한 정부와 여당의 공작정치로 규정하고 대여투쟁이 나섰을 뿐만 아니라 자칭 민족신문이라 포장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대대적 여론몰이에 나섭니다.
이 즈음 인터넷에서 일명 김정균 일기라며 박정희 비밀독립군 주장이 등장합니다.
지금도 김정균을 검색하면 아마 당시 누군가에 의해 작성 유포된 글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거의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작성된 당시 글 그대로가 지금까지 돌아다닐 겁니다.
당시에도 이 글의 주장에 대해 그 진위요구가 있었습니다만 해당 글을 유포한 자 가운데 그 누구도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해 주지 않아 묻혀버렸죠.
그런데 이 글을 진실로 믿는 이들이 여전히 있군요.
김정균 일기가 실제 존재하고 이와같은 내용이 담겨있다고 치죠.
그렇다면 이와는 반대되는 주장을 담은 기록들도 함께 테이블에 올려놓고 박정희의 친일행위 여부를 논해놔야 할 것입니다.
중국 국가기록보관소에 보관된 자료 중 일제시기 만주국에 부역했던 관리들과 군인 등 감옥에 갖힌 전쟁범죄자들의 자술서가 있습니다.
이를 엮어 만든 책 "만주국의 통치와 내막"이 발간되기도 했죠.
이 책 내용중 박정희가 있었다는 만주군 보병8단의 직속상관 류분이 제7여단장으로 근무할 당시 열하성 청룡현 서남부 반벽산 지역을 토벌하였다는 내용과 단장이 양승무 였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부대개편 후 열하성에 머물며 토벌했다는 내용도 있죠.
열하성은 바로 팔로군과 조선의용대가 위치하던 곳입니다.
보병8단의 토벌하였다는 것은 팔로군과 전쟁을 하였다는 이야기죠.
그런데 이 보병8단의 장교로 근무했던 박정희는 이와 무관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해 놓고 박정희의 친일여부를 면밀히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한 개인의 일기에 불과하지만 김정균의 주장도 함께 조사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역사적 진실을 끌어내야죠.
박정희의 친일논란과 관련하여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사망한지 30 여 년이 지났음에도 그에 대한 조사나 평가작업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 박정희란 인물에 대해 당당하고 자신있다면 뭐가 두려워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시도하는 것일까요?
더이상 역사의 진실을 숨기고 포장하여선 안되며 단지 나의 사상과 이념에 근거하여 인터넷에 떠도는 오래된 글 하나를 마치 진실인 양 믿어서도 안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