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당시 부산 국제신문 기자였던) 나는 1980년 5월23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에서 그 流血(유혈)사태를 취재했고, 그 뒤에도 계속 관심을 가져왔다. 경상도 출신인 기자는 광주에서 취재를 하는 데 큰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지역감정이 광주사태의 중요한 원인은 아니란 느낌이 왔다. 계엄당국이 당초 광주사태의 본질을 지역감정 쪽으로 돌린 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광주시민 전체가 들고 일어난 것은 공수부대원들의 과격한 진압에 대한 거의 동물적인 분노 때문이었다. 신군부에 의한 金大中씨의 연행도 한 촉발요인이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金大中 석방』을 요구하는 구호는 다른 구호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리가 낮았다(그 뒤 검찰조사에서도 金大中씨가 광주사태를 조종했다는 說은 부정되었다).
『全斗煥 타도!』란 구호 뒤에는 『金日成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따랐다. 시민들이 간첩으로 의심가는 시위자를 붙들어 계엄당국에 넘겨 주기도 했다. 무장 시위대의 교도소 습격사건, 무기고 탈취, 기관총 사격, 장갑차와 차량 돌진 등으로 계엄군을 몰아낸 뒤 광주를 장악한 이른바 「시민군」 지휘부는 軍紀(군기)를 비교적 엄정히 잡아 약탈 등의 피해는 최소화되었다. .
기자는 5월27일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탈환된 직후, 구경나온 시민들 중에서 경상도 말을 하는 청년을 한 사람 알게 되었다. 그는 전남도청 2기동대 소속 전투경찰관(상경)인 南모씨였다. 경북대학교 정외과 2학년에 다니다가 입대했다고 했다. 그는 5월21일 전남도청을 지키다가 시위대가 몰려오자 私服(사복)으로 갈아입고 달아났다. 다행히 고마운 아저씨 집에 숨어들어 7일간 지냈다는 것이었다. 南상경을 따라 그 집을 찾아갔다. 부동산 사업을 한다는 50代 초반의 광주 아저씨는 부인과 함께 기자 일행을 맞아들이더니 점심대접을 해주면서 『제발 지역감정 치원에서 이 사태를 보지 말라』고 부탁했다. 南상경도 『공수부대원들이 몽땅 경상도 군인들이란 얘기는 틀렸고, 광주시민이 경상도가 밉다고 일어났다는 얘기도 사실이 아니다』고 역설하면서 과잉진압의 목격담을 들려주었다.
기자는 광주사태를 취재하고 부산에 돌아와 광주시민들을 옹호하는 발언들을 하고 돌아다녔다. 그때 부산의 일부 지역에선 경상도 사람들이 광주에서 당했다고 전라도 사람이 갖고 있는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휴가원을 내고 광주 취재를 했다고 회사에서 잘렸다. 그 몇 달 뒤 전두환 정권은 나를 反정부 기자로 분류, 언론계에서 추방할 기자 명단에 넣었다. 3년 동안 다른 일을 하다가 언론계(조선일보 월간조선부)로 복직한 것은 1983년 10월이었다.
http://nac.or.kr/article/view.php?id=nac_news&no=6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