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을 짧게하기 위해 서술체로 씁니다.
나 자신은 광복절의 의미가 크기 때문에 광복절을 건국절로 대체하는 것은 반대한다.
다만 1945..8.15일이 광복절이고 그에 더해 1948. 8.15일은 건국절이나 중복됨으로 8.15를 광복절겸 대한민국 건국일로 불리는 것이 문제를 최소화하는 선택으로 본다.
1919.4.13일을 건국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은 1948.8.15일을 건국일로 할 경우 북한이 배제된다는 논리이나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북한을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임을 규정하였음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1948년 유엔 감독하에 치뤄진 5.10 선거를 김일성이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일부를 불법 점거하였고 그뒤 6.25전쟁으로 한반도의 비극과 분단 고착화를 가져왔으니 북한은 민족의 반역자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햇볓정책, 친북 정책, 낮은 수준의 연방제 등의 생각은 과거 임정의 좌우합작을 연상하게 한다.
일제시대 독립 운동이 1919.4.13일 창건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일사 분란하게 이루어진 듯 인식하지만 그당시의 상황은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한반도에 인접해 있는 상황에서 이념적 혼란기였고 한국의 독립운동도 만주와 중국, 그리고 연해주에서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독립운동이 상해 임시정부의 중국내 독립운동과 병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일 투쟁능력을 강화해야 했고 상황적으로 어려웠던 국민당이 공산당과 국공합작을 하게됨에 따라 장개석의 권유로 임정도 좌우 연합을 하게 된것이다. 좌우연합은 점진적으로 진행되다가 1942년 김원봉이 임시정부에 합류함으로써 1942년부터 1945년까지의 입정은 좌우연합의 임시 정부로 지낸 것이다.
김구계의 민족주의 세력은 왕정제의 폐지와 민주주의의 개념은 가지고 있었지만 이념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사실, 이념이라는 것이 마르크스 이후 공산주의가 대두되기 전까지 유럽에서도 명확하지 않았으며 유럽도 자유시장경제의 틀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혼재된 상황이었으니 이제 왕정제에서 벗어난 한국의 지도자들이 명확히 규정하기 힘든 상황이었음은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정세와 공산주의의 폐해를 명확히 궤뚫고 있었던 사람은 이승만이 유일한 것이고 입정지도부와의 마찰도 이에 기인하다. 김구는 민족주의자에 공산주의를 싫어는 했지만 뚜렷하게 임정의 이념노선을 규정한 것이 아니다. 이승만의 임정과의 마찰을 마치 임정에 반대하는 친일파의 행동으로 묘사하려는 한국좌파들의 편견은 이러한 이승만에 대한 반감의 표출일 뿐이다.
이런 혼란의 상황에서 조소앙은 3균주의를 주창함으로써 우파와 좌파의 중간영역에 사회주의적 가치를 임정에 도입했고 임정은 이 3균주의에 대해 별다른 반대없이 수용하였다. 이러한 3균주의의 수용은 건국강령에 포함하었고 임정의 복국과 건국 과정과 노선을 명확히 정립하게 된다.
나중에 김원봉까지 임정에 가세하며 1942년 이후 임정은 좌:우 50:50의 균형을 유지하게된다. 조소앙의 균부, 균권, 균학의 3균주의는 겉보기는 정말로 훌륭한 이념으로 보이나 실제적으로 토지국유제, 산업국유화의 공산주의에 치우친 사회주의 이념이다. 거기에 김원봉까지 가세한 40년대의 임정의 정체는 좌측에 기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임정과 미국적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개념으로 무장한 이승만이 어울릴 수 없었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지금도 국내의 좌파는 조소앙의 3균주의를 지지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실제로 이 3균주의의 일환으로 이승만 정권당시 농지개혁을 이룬 것은 높이 평가할만한 일이지만 전체적으로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이 서구의 민주주의, 시장경제였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이념으로 보는 것이 맞다. 조소앙의 3균주의 추구는 2차 대전후 세계적 흐름과 해방후 국민 전체의 의식도 과거의 전제주의를 탈피한 새로운 이념으로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상황에서 결국은 동구 사회주의로 흘렀을 가능성이 높으며 결국은 대한민국을 가난한 평등의 국가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의 치열한 반공노선은 오른 판단이었다.
해방후 국내에 입국한 임정 세력은 김구계의 민족주의 진영, 조소앙, 여운형계의 좌파 진영, 나중에 북한으로 달라뺀 김원봉의 공산주의 진영, 그리고 이들과는 전체적으로 다른 이승만 진영으로 나뉘어져 행동하게 된다. 누가 무슨 당이었는지 늦은 시간에 정리가 안되지만 하여간 그렇다.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로 무장한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절대로 허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김구와 임정세력은 통일 우선주의자로 충돌을 할 수 뿐이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북한이라는 집단이 공산주의 또는 동구 사회주의의 논리를 도입하여 냉전시대에 북한지역을 불법점거하고 6.25라는 민족 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범죄자 집단으로 판단하며 북한에 동조, 또는 동정적인 사람들의 판단을 의심할 수 뿐이 없다
결론으로 말하면 건국일 논란은 이승만 김구의 노선에 대한 지지세력의 대결이며 이에 더해 임정이 가지고 있던 3균주의와 통일 우선주의에 대한 지지세력과 좌파 세력이 1919. 4.13을 지지하는 것이고 나는 이를 적극 반대한다. 그에 더불어 국가의 성립요건과 역사적 사실을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1948. 8.15일이 대한민국 건국일임은 명약관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