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불쾌함을 표하는 분이 있어서 이 글을 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신'이라는 호칭은 결코 비하하거나 멸시하거나 낮게보는 호칭이 아님.
요즘은 방송 매체 등이나 인터넷 환경 등에서 이상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원래의 '당신'이라는 호칭은
대화하는 상대방 (2인칭)이나 제 3자 (3인칭)으로 사용되는데
상대방의 높낮이를 포함하지 않고 상대방을 호칭하거나
제 3자를 높이는 호칭으로 사용되었음. (적어도 내가 살아온 세월 동안 안에서는)
상대방과 대화하면서 내 부모님을 호칭할 때 '당신'이라고 칭했음.
사랑하는 상대방에게도 '당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음.
수 많은 시에서도 '당신'이라는 어휘가 시어 (詩語)로 사용되었는데
그 시들을 읽어보면
'당신'이라는 어휘가 비하칭 또는 멸칭으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존칭 또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음.
예로 만해 한용운의 글과 시인 김영철의 시를 적을테니 읽어보시길.
당신을 보았습니다.
- 만해 한용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려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인과 율
- 만해 한용운
당신은 옛 맹세를 깨치고 가십니다.
당신의 맹세는 얼마나 참되었습니까.
그 맹세를 깨치고 가는 이별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참 맹세를 깨치고 가는 이별은 옛 맹세로 돌아올 줄을 압니다.
그것은 엄숙한 인과율입니다.
나는 당신과 떠날 때에 입맞춘 입술이 마르기 전에
당신이 돌아와서 다시 입맞추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시는 것은 옛 맹세를 깨치려는
고의가 아닌 줄을 나는 압니다.
비록 당신이 지금의 이별을 영원히 깨치지 않는다 하여도,
당신의 최후의 접촉을 받은 나의 입숧을
다른 남자의 입술에 댈 수는 없습니다.
시어(詩語)가 된 당신
- 김영철
또 당신을 찿는군요.
부르다가 지칠 때도 된 것 같은데
소리도 못 내 안으로 울며
당신 이름을 부르는군요.
당신만 보이는 눈과
당신 음성만 들리는 귀와
오로지 하나만 담을 수 있는 가슴으로
오늘도 길을 나섭니다.
걷고 또 걷다 보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 테지요.
간절하게 원하면
언젠가는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질 테지요.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미안합니다.
당신을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함부로 당신 이름을 마구 불러
더 미안합니다.
시어가 된 당신,
내 가슴에 하나 뿐인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가슴이 떠나도
영원히 남아야 할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