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하게는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직선제로 전환하자는 운동이었지요.
유신헌법 자체는 박정희대통령이 중화학 공업화 즉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다른측면에서 보면 분명한 독재시스템이기도 했지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신 이후로는 그 한계점도 명확해진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유신헌법을 개정하자는 주장은 분명히 일리 있었던 주장이라고 봅니다.
아무튼 하나의 정치 견해일수 있는 이 생각은 당연하게도 박정희 대통령 사후 민주화운동을 이끌게 되지요.
문제는 이 분들이 너무 조급했다는 데 있습니다. 유신헌법이 개정되어야 한다는 신념은 그 시점에서 어디까지나 본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현실로 존재하는 최규하 대통령은 헌법에 의해 국무총리로서 대통령을 승계한 정통권력이었고 정당한 집권자였습니다.
문제는 이분들은 조급성에 기초해서 자신들의 생각이 절대선이며 최규하는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유신잔당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자신의 생각이 국민에 의해 승인된 헌법보다 위에 있다는 믿음이었던 게지요.
이 믿음에 기초해서 이 분들은 강력하면서 때때로 폭력을 불사하는 시위를 벌입니다. 명분은 유신잔당 퇴진 즉 최규하 퇴진 그리고 민주인사 석방이었습니다.
이 폭력을 불사한 시위는 반대쪽 즉 정권쪽을 자극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신군부라고 불리우는 정권내 강경파들을 특히 자극했고 이 정권대 강경파 (아직까지는 쿠데타세력이라고 확정짓기까지는 애매한)들은 이 학생시위를 강경진압해야한다고 최규하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지요.
최규하는 이 두세력의 사이에서 쪼그라들다가 이후 이 강경파(라고 쓰고 쿠데타세력이라고 읽습니다)들의 쿠데타를 막을 힘조차 상실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 강경세력의 대결은 전국적으로 벌어지게 됩니다만 유혈사태로 끝나는 건 광주였지요.
왜 광주에서만 이렇게 유혈사태로 끝나게 되었는지는 많은 의문이 있습니다. 확실한건 광주지역 시위대들은 매우 강경했다는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보통 국민의 눈으로 보게 되면 광주사태는 초기에는 민주화운동 (최규하 정권 반대)의 성격을 띄다가 급진화 하면서 폭동화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를 빌미로 신군부 쿠데타 세력이 사회혼란 방지라는 구호로 쿠데타에 성공하게 됩니다. 광주사태가 없었다면 전두환이 과연 쉽게 권력을 장악할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지금도 종종 합니다.
추신 : 5.18 시위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최규하 정권 퇴진운동 및 유신헌법 개헌이었습니다만 반전두환적 성격도 있긴 했습니다. 전두환이 헌법을 어기는 세력이라서 반대했다는 의미는 아니었고요..
전두환은 최규하 정권의 실세 즉 최규하를 지키는 초강경파라는 의미에서 반대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