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은 대일 굴욕외교인 동시에 대미 굴욕외교
2차 대전 전후처리를 위한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평화조약인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결국 일본의 전쟁책임을 관대하게 처리했다. 미국이 중심이 된 이 조약에서 소련·중국·한국은 서명국에서 배제했다. 미국이 일본에 주둔하고 개입해 일본의 안전을 지키는 내용으로 하는 미일안보조약도 맺었다. 다음 달인 1951년 10월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요청으로 한일회담을 시작했다.
케네디 행정부에 이르러 미국은 한일관계개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미 국무성이 주한·주일 미 대사관에 1962년 7월13일 발송한 전문에는 “합리적인 일본의 제안을 받아 한국 측이 흥정에 나서도록 만들기 위해 한국정부에 대한 추가적인 압력이 필요하다면 미국의 개발차관 공여가 협상타결과 관련돼 있다고 말하라”고 돼 있다. 한국정부 최고위층을 접촉해 청구권·무상공여·장기저리차관을 패키지(일괄타결)로 처리하도록 압박하는 내용도 있다.
한일협정은 강제징용 등 피해자 보상금액을 놓고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한국에게는 실질적인 이익을 주는 반면 일본에게는 명분을 주는 방식을 선택했고, 미국이 3억5000만~4억5000만 달러의 금액을 제시해 협상을 압박했다. 한일 양국은 3억 달러에 협상에 합의했고, 양국은 각자 언론에 합의를 포장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의도대로 한일협정이 타결됐다. 국내에서는 굴욕적인 한일협정 반대시위가 발생했다. 한일협정은 대일 굴욕외교면서 동시에 대미 굴욕외교였다.
한일협정의 성격은 베트남 전쟁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미국이 1964년 동맹국에게 베트남전 참전을 요청했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물론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던 일본도 파병 요청을 거부했다. 하지만 한국은 ‘한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이 빠져나가 한반도 안보위기로 이어진다’는 논리를 펼쳐 5만명의 젊은이를 전쟁터로 보냈다.
서울대 박태균 교수는 박정희 정권이 파병을 서두른 이유 중 하나를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꼽았다. 4·19혁명을 계승하고 ‘민족주의’를 집권이념 중 하나로 제시했던 군사정부는 65년 한일협정으로 스스로의 이념을 포기한 상황이었다. 반대여론을 잠재울 계기는 베트남 파병밖에 없었다. 1965년 5월 박정희의 미국 방문이 돌파구가 됐다는 분석이다. 이로써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견고해졌고, 한일 양국의 수교로 미국이 원했던 한미일 삼각동맹의 틀이 완성됐다.
과연 미국은 믿을만한 국가일까요???????
계속 이대로 가다가는 미국의 주도하에 일본이 북한으로 진격하는 모습을 볼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