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 이회영(1867-1932) 선생은 서구와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던 1867년 서울 남산골에서 이유승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역대 선조들이 계속 높은 벼슬을 한 조선조의 명문가였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냈을 뿐 아니라, 백사 이항복 이래 이유승에 이르기까지 9대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승․판서․참판을 지낸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이 가문에서 우당을 비롯해 형 건영, 석영, 철영과 아우인 시영, 호영 등 일곱 형제 중에 6명의 형제 50여 가족이 1910년 국치를 당하자 모두 만주로 가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가문 차원의 헌신으로, 서양에서 말하는 단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가문에서 사회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솔선수범하는 것)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 하겠다. 만주와 상해 등 광활한 대륙에서 그들 형제가 인재양성과 독립투쟁을 계속하는 동안 전 가족이 겪은 고초와 희생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석영․ 회영․ 호영 3형제가 만주와 중국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받아가며 장렬하게 순국했다. 해방 후에 아우 시영이 임정요인으로서 마지막으로 조국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간 지나온 세월이 그들 가문에게 얼마나 잔혹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이들 형제 중 우당은 가장 먼저 봉건적 인습과 사상을 타파한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고 온 몸을 던져 자신의 생각을 실천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대가족 망명 역시 우당이 주창했음은 물론이다. 형 석영도 말을 앞세우기보다 자기 살을 도려내서 실행을 우선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6천 석(石)이라는 거대한 재산을 모두 독립 운동자금으로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