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몰리자 공포정치로 몰고가고자 무고한 시민들을 살해한 사건으로, 이미 법원에서 그 진실이 밝혀진 사건이다.
“1차 인혁당 사건은 북한과의 연계성이 뚜렷했다. 인혁당은 남파간첩 김영춘에 포섭된 도예종·이재문, ‘빨치산’ 출신 박현채 등이 조선노동당 강령을 토대로 작성한 정강에 기초해 62년 1월 결성한 地下黨(지하당)이었다. 지하당은 통상 중앙당인 북한 조선로동당의 지령을 받아서 활동해 온 남한 내 비밀조직을 가리킨다. 인혁당 역시 북한의 지령에 따라 간첩활동을 하다 64년 검거됐다. <2012년 9월 22일 뉴데일리>
위는, 수구언론들이 말하는 인혁당 사건이다. 그러나, 이는 진실과 다르다.
지만원도 인혁당 동영상을 제작해 혹세무민해왔다. 그는 인혁당 동영상에서 1차 인혁당 사건은 간첩이 배후조종했다며 그 간첩을 '김대영'이라고 발언했다. 그러나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간첩으로 발표한 인물은 '김대영'이 아니라 '김영춘'이다. 지만원 씨는 '김영춘'을 '김배영'으로 착각하고 있다. '김대영'이란 이름도 틀렸다. '김배영'이다.
<인혁당 사건의 진실>
1964년 중앙정보부는 1차 인혁당 사건을 터트리면서, 김영춘이라는 남파 간첩이 배후조종한 지하당이라고 수사발표했다. 그런데 김영춘은 남파 간첩이 아니라 국내 첩보부대에서 포섭해 북파시킨 공작원이다. 1964년 당시 중앙정보부도 김영춘 북파 공작을 담당했던 과장을 정식으로 조사했는데 그 담당과장이 김영춘은 우리가 포섭해서 북파시킨 우리 공작원이라고 진술했다. 김영춘 북파 공작에는 중앙정보부의 예전 직원도 개입했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김영춘은 우리측 첩보부대에서 북파시킨 공작원이 아니라 국내 미 첩보부대에서 북파시킨 공작원이라는 말도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김영춘이 남파 간첩이 아니라 우리쪽 요원임을 알았으면서도 김영춘을 남파 간첩으로 날조해 1차 인혁당 사건을 발표한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들은 18일 간 철야조사를 했음에도 중앙정보부의 수사발표와 달리 아무런 혐의점을 찾지 못했고 기소할 수 없다며 1 명을 제외한 담당검사들이 사표를 제출, 옷을 벗어버렸다. 기소할 검사가 없어지자 검찰은 담당 검사도 아니었던 당직 검사를 통해 기소를 했다. 1차 인혁당 사건 연루자들은 3년에서 1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가 발족되자 국민들은 저항했다. 1973년 10월부터 유신체제 반대 시위운동이 더욱 거세지자, 1974년,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 사건과 2차 인혁당 사건을 터트려 공안정국으로 몰고간다.
-군사정권과 그 후신인 한나라당/새누리당 정권이 정치적으로 불리할 때 번번히 꺼집어내는 간첩단 사건, 종북-좌빨 몰이는 이 정치세력의 상투적인 짓이죠-
중앙정보부는 10년이 지난 1차 인혁당사건 연루자들을 다시 체포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2차 인혁당 사건)을 수사발표하면서, 남파 간첩 김배영이 북으로부터 인혁당을 재건하라는 지령과 자금을 받아 1차 인혁당 사건 연루자들과 모의해 인혁당을 재건한 사건이라고 조작한다.
그러나, 김배영은 1차 인혁당 사건의 수배자로 1차 인혁당 사건이 터지기 2년 전부터 친형이 있는 일본에 있었다. 1964년 인혁당 사건이 터지고 일본에까지 수배가 떨어지자 갈 곳이 없어진 그는 살기위해 조총련을 통해 북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1967년까지 북에서 간첩 교육을 받게 되고 그해 말 남파되어 내려왔다가 그해에 검거되어 1971년 사형되었다. 2차 인혁당 사건이 터졌던 1974년에는 그가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인혁당을 재건할 수도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기소된 2차 인혁당 사건 8 명에게 사형판결을 내리고, 형이 확정되자마자 18 시간만에 형을 집행, 사형시켜버린다. 당시, 국제법학자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으며 주일 대사를 역임했던 라이샤워는 뉴욕타임즈 기고를 통해 한국 정부를 맹비난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사체에 얼룩진 고문이 드러날까 사형당한 8 명의 시체를 유족들에게 넘기지도 않았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안병직 교수는 조선일보TV에 출연해 인혁당 사건에 북한과 연계된 간첩의 실체가 있다는 발언을 했다. 뉴데일리, 조선일보, 안병직, 지만원 씨는 인혁당 사건을 간첩단 사건으로, 북한이 배후조종한 사건으로 날조해왔다. 그러나, 2010년 이명박 정부 당시 남파 간첩으로 날조되었던 김영춘 씨의 유족들은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정부는 북파 공작원이었던 김영춘 씨에게 배상하라"는 승소 판결을 받았다. “서울중앙지법도 2010년 5월27일 김상한(김영춘)씨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국가는 북파공작 수행으로 희생된 김씨의 유족에게 28억원을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정씨는 “인혁당 사건은 처음부터 조작임이 명백한 사건인데,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2012월 9월 17일 경향신문>
* 2차 인혁당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신직수 입니다. 신직수는 중앙정보부장, 법무부장관, 대통령특보 등 정권의 요직을 두루 거칩니다.이 신직수가 애지중지 데리고 다녔던 후배검사가 김기춘. 유신헌법 안을 만든 자가 이 신직수와 김기춘 두 사람이죠. 박근혜가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나라당이 3공, 5공의 후신인 걸 몰랐냐"고 이재오에게 말했죠. 그 후신답게 박근혜 정부에서 승승장구하는 자들 중 주로 군사정권 때의 인물들이 많죠.
Link<김기춘의 유신 작성>